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Ⅳ
1910 국권 피탈, 무단통치 실시
1911 105인 사건, 조선교육령 공포 /20세
1912 토지조사사업 시작
1914 제1차 세계대전 발발, 김마리아 일본 다시 유학
1916 경복궁 터에 조선총독부 청사 기공식
1918 제1차 세계대전 종료, 파리강화회의
1919 2.8독립선언, 3.1운동, 김마리아 귀국·체포·고문,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조직, 임시정부 수립, 문화통치 실시
1921 김마리아 상하이 망명 / 30세
1922 이광수 민족개조론 발표
1923 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 결렬, 김마리아 미국 망명
이번에 다룰 청년은 이 글에서 조명하는 9명의 청년 중 유일한 여성입니다. 여성의 도전은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을까요? 역사가 시작된 이래 여성은 뚜렷한 약자였고, 여성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스스로 결정하기보다는 남성주의 사회가 규정한 사회 규범과 여성상에 따라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남녀평등이라는 개념이 익숙한 지금에도 여성상에 대한 인식 개선은 여전히 더디게 개선되고 있는데, 화폐 인물 선정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현재 사용되는 5만원권의 주인공은 신사임당입니다. 5만원권은 1973년 1만원권이 처음 발행된 이후 30여 년 만에 처음 발행된 고액권이라는 점에서 경제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지만, 화폐 인물 선정의 관점에서는 과연 이것이 21세기의 시대상에 부합하는지는 의문입니다.
화폐의 인물 선정은 시대가 기리고자 하는 바람직한 인물상을 정하는 중요하고 공정한 일이 되어야 했지만, 권력자들은 여기에 정치적인 의도를 반영하려고 했습니다.
화폐사를 잠시 살펴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 인물 도안의 주인공은 이승만이었습니다. 그는 4.19혁명으로 대통령에서 쫓겨나기까지 무려 12년간 10종의 화폐에 자기의 얼굴을 등장시켰습니다. 그 후 여러 변화를 거쳐 박정희의 유신체제 때 1천원권에 이황, 5천원권에 이이, 1만원권에 세종이 등장하여 지금의 큰 틀이 잡힙니다.
그런데 박정희가 구상한 초기 화폐 도안은 ‘세종대왕(백원)-이순신(오백원)-이황(천원)-이이(오천원)-석굴암 여래좌상(만원)’이었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정치적으로 이념적·지역적·위계적 질서를 반영하여 설계됩니다.
▫이념적: 조국근대화와 자주성(세종대왕)-구국의 영웅(이순신)-학문적 자주성과 유교윤리(이황)-국방 자주성 및 유교윤리(이이)-신라 정통성의 표상(석굴암 여래좌상)
▫지역적: 서울(이순신)-경북(이황)-강원 및 경기(이이)-경남(석굴암 여래좌상), 특정지역(충청도·전라도)은 배제함
▫위계적: 왕(세종)-군인(이순신)-관료(이이)-영남출신(이황·석굴암 여래좌상)1)
석굴암 여래좌상은 종교 논쟁을 불러일으켜 최종적으로 제외되었지만, 여기서도 여성은 애초부터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1962년 백환권에 저축 강조를 위해 저축통장을 들고 있는 어머니와 아들의 모자상이 등장한 적은 있었지만, 역사적 인물로서 여성이 화폐에 등장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상황 때문에 5만원권에 성평등의 관점에서 여성이 화폐에 등장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2) 그리하여 5만원권에 여성 인물이 최초로 등장하게 됩니다.
5만원권에 신사임당이 최종 선정되었을 때 신사임당이 태어난 강릉시에서는 환영 의사를 밝힙니다. 반면 여성계는 예상대로 정반대의 반응을 보입니다. 당시 한국은행은 신사임당 선정 이유로 ‘교육과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효과가 기대된다’고 밝혔는데, ‘현모양처’라는 전근대적인 여성상이 사라져가는 21세기에 시대를 역행하는 결정을 내렸으니 여성단체들의 반발은 너무도 당연했습니다.3)
현재 화폐에 사용되는 인물은 이순신, 세종, 이황, 이이, 신사임당으로 모두 조선시대, 전근대 시기의 인물입니다. 이 중 이순신·세종의 업적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황·이이·신사임당은 그 시대 존경받는 인물이긴 하지만 다른 유명한 역사 인물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업적을 이룬 인물이라고 말하기에는 논란의 소지가 있습니다. 게다가 세 사람은 성리학적 신분 질서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현대의 시대적 이념과 배치되는 부분도 존재합니다.
5만원권은 최초의 여성 인물 선정이라는 역사적 중요성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은 결국 여성이 가정과 가정교육을 돌봐야 한다는 남성 중심주의 시각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21세기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이런 잘못된 의도 때문인지 한국은행은 당시 5만원권 인물 선정의 구체적인 과정은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현모양처라는 여성의 역할은 신분제도가 무너져가고 자유와 평등 의식이 싹트는 개화기 시대에도 변함없이 굳건했고, 여성이 신식 교육을 받는 것도 남편과 자녀를 위한 최소한의 교양을 위해 장려되었을 뿐입니다.
이렇듯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인식은 역사적으로 깊이 뿌리내려 있고, 화폐사에서 살펴봤듯이 성별에 따른 차별적 인식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김마리아는 남성중심주의 시대이며, 일제강점기였던 격동의 시대에 여성 차별과 민족 차별이라는 시대적 역경에 도전한 민족 지도자입니다.
김마리아 가문은 독립운동 가문이라고 불릴 정도로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약하고 해방 후 김구와 함께 남북 분단을 막기 위해 힘쓴 김규식 외에도 5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되었고, 일제강점기에 많은 독립운동가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민족운동가로 성장합니다.
김마리아는 ‘교육’을 통해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는데, 8살에 소래교회 부설 학교 입학을 시작으로, 정신여학교, 일본 동경여자학원, 중국 금름대학, 미국 파크대학·미주리주립대학·시카고대학교대학원·콜롬비아대학교대학원·뉴욕신학원 등에서 수학했습니다.4) 이것은 당시의 일반 남성들도 쉽게 쌓을 수 없었던 교육 경력이었습니다.
학문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연단한 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이것이 개인의 출세를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이런 신념은 학문과 민족 운동을 언제나 병행했던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일본 유학 당시에는 유학생 여성친목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2.8독립선언에 참여했고, 3.1운동 당시에는 국내에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했습니다. 또 중국으로 망명한 후 상하이에서는 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하고, 미국에서는 근화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추대됩니다. 김마리아는 민족 운동에서 여성이 주체적으로 앞장설 수 있도록 가는 곳마다 여성 단체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녀의 업적이 더욱 무거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일제의 잔혹한 고문에도 자신의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던 데에 있습니다. 3.1운동 당시 체포되어 일제의 잔혹한 고문을 받았을 때, 그녀는 이미 심각한 고문 후유증을 얻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석방된 후,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여성 독립운동 단체를 재건하려는 노력으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장 믿었던 동료의 배신으로 재차 체포되어 다시 한번 혹독한 고문을 당합니다.
20대의 청년은 그 고통이 극심해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살기 위해 망명을 시도하고, 극적으로 성공합니다. 하지만 민족 구하는 일을 중단할 수 없어 탄압의 위험을 무릅쓰고 40대에 다시 일제 치하의 고국에 돌아오는 결단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교육자로서 민족운동을 펼치다 고문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겨우 50대 초반이라는 이른 나이에 안타깝게도 생을 마감합니다.
남성 중심의 시대에, 민족 탄압이 일상이던 일제강점기에 남성의 몸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역경에 도전한 청년 김마리아의 삶은 역사적으로 약자인 여성도 시대에 도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청년 김마리아의 생애는 살펴볼 가치가 있고, 이를 바탕으로 이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여성상을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능하다면 이제 5만원권의 인물은 김마리아로 대체해야 하지 않을까요?
1) 김판수, 「'국가'에 의한 상징에서 '국민'을 위한 상징으로 : 한국 신권 화폐 '도안' 선정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을 중심으로」, 『한국사회학회 사회학대회 논문집』, 한국사회학회, 2007, 43쪽
「[전지적 기재부 시점] 지폐 인물은 어떻게 선정되나요?」, 기획재정부 공식 블로그
2) 이규섭, 「[부일시론] 화폐 속 인물 성(性) 불균형」, 부산일보, 2007.2.7
3) 이주영, 「여성계 “5만원권 신사임당 안돼”…반발 확산」, 한겨례, 2007.11.07.
4)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16·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