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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Sep 07. 2023

징심록(澄心錄) 추기(追記)

생육신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징심록(澄心錄)은 마음을 맑게 하는 기록이란 뜻입니다. 추기(追記)란? 본문에 덧붙여 기입하는 글입니다. 생육신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고 단종을 향한 충절을 지킨 신하들인데, 사육신은 죽어가면서도 단종에 대한 충성을 부르짖었고, 생육신은 세조에게 등을 돌린 채 평생을 단종을 추모하며 살았습니다.


징심록 추기 1_김시습, 박제상공의 경지를 찬탄하다


<종합요약>

조선시대 초기 지식인이며, 나이 5세에 이미 세종대왕으로부터 천재로 인정을 받은 김시습 선생은 징심록(澄心錄)과 금척지(金尺誌)를 직접 읽고 그 유래와 내용을 자세하게 서술하여 놓은 《징심록(澄心錄) 추기(追記)》를 썼다. 이는 징심록(澄心錄)과 금척지(金尺誌)의 문헌적 가치를 현대에 고증해 주는 유일하고도 귀중한 문헌으로, 그 내용을 대략 소개하면 이렇다. 징심록(澄心錄)은 관설당(觀雪堂) 박제상(朴堤上) 선생이 지은 것으로, 영해 박씨 집안에 대대로 전해 내려온 지 천여 년이 되었으니, 그 귀하고 소중함이야말로 어떠하겠는가. 박제상 선생은 진리(眞理)를 꿰뚫은 자요, 원만하게 깨달음을 얻은 자로서 징심록(澄心錄)의 기록은 옛 역사에 뿌리를 둔, 도(道)를 깨달은 정각자(正覺者)에게서 나온 것이다. 징심록(澄心錄)은 멀리는 태고(太古)의 일에 관계되고, 넓게는 우주(宇宙)의 일에 관여되어, 그 광대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으며, 동방 창도의 역사와 하토 변이의 기록이 들어 있다. 신시(神市) 이래 왕의 설과 유호씨 전교의 일에서 천하의 모든 법이 나왔는데, 이는 유·불·도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있었던 우리의 역사요 사상이다. 박제상 선생의 집안은 금척(金尺)을 보유한 연리지가(硏理之家)로서 가문의 전통에 특별한 이치가 있는데, 이것은 천웅도(天雄道, 화랑도의 근원)의 전수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신라에서 고려를 거쳐 조선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천웅도(天雄道)는 금척(金尺), 곧 천부경(天符經)의 도(道)를 말하는 것으로서, 우리 민족 고유의 도(道)이다. 사람들이 해가 동쪽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는 것만 알고 서쪽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는 것은 모르니, 이는 소위 징심록(澄心錄)이 말하는, 눈이 너무 밝기 때문이다. 지금 한 사람이 밤중에 눈을 감고 해의 뒤를 따른다면, 반드시 이 해가 서쪽을 따라서 동쪽으로 향하는 것을 볼 것이니, 편견을 버리고 또 대지와 산천이 공중에 떠서 함께 도는 것을 볼 것이다. 이렇게 되면 동쪽이 바로 서쪽이요, 서쪽이 바로 동쪽이 되어 마침내 동서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 이때에 곧 원만한 깨달음(圓覺)을 얻을 것이다. 사물을 성찰하여 증리 하는 진법과 신라가 금척(金尺)과 옥적(玉笛)을 쓴 것은 상고(上古) 시대에 연유한다. 그러므로 태고불역(太古不易)의 진법이라 할 수 있다. 신라 52대 효공왕 때, 왕위 계승의 분쟁이 있으므로, 영해 박씨 종사(宗嗣) 박문현(朴文鉉, 810~?) 선생은 선세 입언(立言)의 전통을 계승하여, 100세의 고령으로 조정에 나가 세론(世論)을 환기시켰다. “신라를 세운 근본은 부도(符都)를 복건(復建)하는 데 있다. 위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이 일에 힘쓸 것이요, 감히 사사로이 영화(榮華)를 도모해서는 안된다. 이는 입국(立國) 당시의 약속이기 때문에, 천년이 지났다고 하더라도 어제처럼 살아있는 것이다. 어찌 그 본의(本意)를 잊는 것을 참을 수가 있겠는가! 옛날의 조선은 곧 사해(四海)의 공도(公都) 요, 일역(一域)의 봉국(封國)이 아니며, 단군의 후예는 모든 종족의 심부름꾼이요, 한 임금의 사사로운 백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라의 근본(根本)이, 다른 나라들과는 현저하게 다른 것이다. 우리들은 마땅히 각성하여, 일체의 분쟁을 불태워 버리고, 마음을 돌이켜 반성하는 것이 옳다.” 이에 국론(國論)이 크게 바로잡히고 조정이 숙연해져, 왕위(王位)가 바로잡혔다.

이로써 가히 《징심록(澄心錄)》의 유래를 추측할 수 있으니, 소위 입언(立言)이란 것은 반드시 금척(金尺)의 수리(數理)에 있으며, 그 근본은 곧 천부(天符)의 법이다. 금척(金尺)을 금으로 만든 것은 변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자[尺]로써 제작한 것은 오류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금척(金尺)의 형상은 삼태성(三台星)이 늘어선 것 같으며, 머리에는 불구슬(火珠)을 물고, 네 마디(節)로 된 다섯 치이다. 그 허실(虛實)의 수(數)가 9가 되어 10을 이루니, 이는 천부(天符)의 수(數)다. 능히 천지조화의 근본을 재고, 인간 만사에 이르기까지 재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죽은 사람도 재면 살아나는 신비한 신기(神器)이다. 금척(金尺)을 가지고 있던 박혁거세 왕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능히 왕으로 추대된 것은, 그 혈통의 계열이 반드시 유서가 있었기 때문이며, 금척(金尺)이 오래된 전래물임을 또한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꿈에 금척(金尺)을 얻은 것이 어찌 우연이겠으며, 세종대왕이 박제상공의 후예들에게 지극한 정성을 보인 것은 당연한 바가 있는데,

훈민정음 28자의 근본을 《징심록(澄心錄)》에서 취하였음에랴! 아, 변하지 않는 진리(眞理)의 법(法)이 안개에 싸여, 인간세상의 풍파 중에 엄마 뱃속 아기처럼 감추어져 있어 진 징조가 있어,  백성이 태어난 시원(始原)의 역사가 누누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비밀스럽게 전해져 고요하고 적막한 채 아무 소리도 없으니, 박제상 선생의 집안은 참으로 오랜 옛날 별천지의 씨족이라. 대대로 자취를 감추어버린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니, 진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로써 가히 백결선생의 도풍(道風)과 가법(家法)을 볼 수가 있으며, 상고(上古)에 있었던 도(道)가 이어 내려온 세상 일부분의 모습을 엿보기에 족하니, 읍루씨가 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혼탁한 세상에서 이름을 끊어버린 것이 역시 까닭이 있기 때문이었다. 


제1장

[징심록]은 운와(雲窩) 박공(朴公)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책이니, 그의 비조(鼻祖) 관설당(觀雪堂) 제상공(堤上公)이 지은 것이다. 後代 宗家의 여러 後孫들이 복사(複寫)하여 전한 것이 천여 년이 되었으니, 그 귀하고 소중함이 어떠한가.

슬프다! 우리 가문 선대의 박호공(卜好公, 신라 내물왕의 아들. 눌지왕의 동생)이 일찍이 공의 큰 은혜를 입은 지 천 년이 지난 후에, 또 공의 자손과 이웃이 되어 한집처럼 오가며 가족같이 만나보고, 나는 또 훌륭한 가문에서 수업하고, 이 세로(世路)의 말(末)을 당한 것을 연유로, 公의 후예(後裔)와 더불어 다시 세한지맹(歲寒之盟)(김시습과 박계손 사이에 맺은 약속)을 맺어 천리 밖으로 유랑하니, 이것이 바로 天命이란 것인가. 기나긴 고금(古今)의 일을 생각하고 회포(懷抱)를 펼치니 슬프고도 슬플 뿐이다. 오늘 이 책을 읽으니 갑자기 천 년 전 옛날로 돌아가 公을 뵈옵는 것 같고, 더욱 우리 家門 先代의 祖上들을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할 뿐이다.


제2장

[징심록]의 기록이 멀리는 太古의 일에 관계하고, 넓게는 宇宙의 일에 관여하여 그 광대함은 진실로 말할 수가 없으며, 우리 東方創都의 역사와 하토변이(夏土變異, 중국의 변화)의 기록은 사람으로 하여금 참으로 숙연(肅然)하게 한다. 통칭 그윽한 의미가 仙道와 佛法과 비슷하나 같지 아니하다. 당시 신라에는 잠시도 仙. 儒 .佛이 침투해 오지 않았으니, 이는 古史에 근거한 것이 분명하다. 그 신시(神市) 왕래의 설과 유호씨의 전교(傳敎)의 일이 진실이니, 고금천하(古今天下)의 모든 법이 모두 여기서 나와 잘못 전해져 변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같지 않음이 유불(濡佛)의 世界에 용납되지 아니하며, 또 제왕의 관경(管境)으로부터 배척을 당한 것은 진실로 당연하다. 기록 중에서 말하기를, 이 책은 광명(廣明)의 時代(단군의 시대를 가리키는 것)부터 있었다고 하였으니, 그 時代는 과연 어느 時節인가.


제3장

삼가 모든 역사를 자세히 살피어 이리저리 상세히 참고하건대, 당시의 세상사람들은 제상공(堤上公)을 천이연구가(天理 硏究家)라 하였으니, 그것은 신자천(申自天)公의 말로도 더욱 분명하다.

혁거세왕의 증손에 형제가 있었다. 그때의 사람들은 큰아들이 작은아들의 神聖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 작은아들이 바로 파사왕이요 공의 5대조다. 소의 神聖이라는 것은 비단 기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역시 그 理致와 道理가 어떠한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公의 할아버지 아도(阿道)公은 124세까지 살았으며, 아버지 勿品公은 117세까지 살았고, 후대에도 역시 백 세까지 산 사람이 많이 있었으니, 公의 집안 전통이 반드시 특별한 이치가 있는 것 같다. 이는 혹 옛날 천웅도(天雄道)의 전수자(傳授者)이기 때문이 아닌가.

公의 징심헌시(澄心軒詩)에 이르기를, 

(아지랑이 초초하게 흐르는 걸 바라보니/ 나그네의 마음도 가을처럼 지는구나/ 세간의 견백(堅白, 견고하고 희다)도 유유한 일도/ 징강을 대하고 앉아 근심을 잊는다)

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公이 품은 道의 一端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견백(堅白, 견고하고 희다) : 촉각은 견고, 시각은 흰돌, '눈을 감고 만져보면 단단하다 느끼고, 만지지 않고 보기만 하면 단단한지를 알지 못한다'라는 것으로 한쪽 편견(흑백논리)으로 무지함을 말하는 내용입니다.


제4장

가만히 생각하면 연경(아지랑이)은 티끌 같은 세상의 풍조요, 客心(나그네의 마음)은 自我의 잡념(雜念)이다. 연기처럼 일어난 먼지와 잡념이 피차 떨어져 나가 한 점의 찌꺼기도 없으니, 오직 있는 것은 맑은 가을 징강(澄江)의 本原 뿐이다. 그렇게 한 후에 견백석(堅白石) 고금의 증리(證理)에 통하기 어려운 것을 징강(澄江)을 대하고 앉아 근심을 말하지 않으니, 소위 澄江을 대하고 앉는다는 것은 철저하게 전체를 통하여 내려다본다(관조, 通觀)는 뜻이요, 또 소위 근심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古今의 세상사람들이 당면한 일에 집착(執着)하는 데 국한하고 전체를 통찰하지 못하여 스스로 문란(紊亂)에 이른다는 뜻의 근심이요, 그것을 슬퍼하는 것이 깊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한 수의 詩는, 가히 公이 깊은 깨달음의 경지에 서 있어, 근심스러운 인간세상과 깊이 단절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일은 또 公의 칭호가 세 번 변한 것에서도 볼 수 있다. 처음에 호를 도원(桃源)이라 한 것은 반드시 시조왕탄생처(始祖王 誕生處)인 선도산의 뜻이요, 다음에 石堂이라고 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堅白을 통찰한다는 뜻이요, 세 번째로 觀雪堂이라고 한 것은, 즉 남김없이 녹아 없어져 깊은 깨달음을 다한 곳이라는 뜻이다. 하물며 生命을 바쳐 절개를 세우고 불에 타서 눈으로 변하는 기우(奇遇, 이상한 인연으로 만남)를 몸소 실천한 분임에야.

그러므로 {澄心錄}을 쓴 根本이 고사에 근거하여 증각자(證覺者)에게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그 고사는 비단 한 문중에 전해진 것만이 아니요, 公이 보문전(寶文殿) 이찬(伊飡) 十年 사이에 반드시 그 상세한 것을 얻었을 것이다.


징심록추기 2_상고시대 법으로 징심록 저술함을 찬탄함


제5장

대저, 세상사람들이 다만 해가 동쪽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는 것만 알고, 서쪽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는 것은 모르니, 이는 소위 《정심록》이 말하는, 눈이 너무 밝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곧 빛을 없애고 밤을 만들어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어둡게 하여, 해가 서쪽을 따르는 이치를 증명하게 하는 것이다.

지금 한 사람이 밤중에 눈을 감고 해의 뒤를 따른다면, 반드시 이 해가 서쪽을 따라서 동쪽으로 향하는 것을 볼 것이니, 이에 곧 편견을 버리고 또 대지와 산천이 (공중에) 떠서 함께 도는 것을 볼 것이다. 이렇게 되면 동쪽이 바로 서쪽이요, 서쪽이 바로 동쪽이 되어 마침내 도서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 이때에 곧 원만(圓滿)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눈을 감고 돌을 만지면 다만 그 견고(堅固) 한 것만을 알고, 만지지 않고 보기만 하면 다만 그 흰 빛만을 알게 될 것이니, 이는 표면의 감각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표면과 이면 두 감각의 오고 감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고 만지는 감각을 모두 갖춘 후에야 곧 그 전체를 얻을 것이요, 비록 표면의 감각만이라도 그 오고 가는 이치를 알면 역시 그 전체를 얻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단단한 것이 흰 것이요, 흰 것이 단단한 것이 되어 끝내는 단단한 것과 흰 것의 차이가 없어지므로, 이것을 가리켜 통관(通觀)이라 하는 것이다.


제6장

무릇 事物은 모두 겉과 속이 있다. 속이 빽빽하면 충실(充實)하고, 드물면 구멍이 뚫린다. 겉이 빽빽하면 色이 모이고, 드물면 없어진다. 이는 허실(虛實) 공색(空色)의 교추(交推, 오고 감)인 것이다. 또 實이 빽빽하면 堅固하고, 드물면 氣가 빈다. 色이 빽빽하면 質을 만들고, 드물면 흰색으로 돌아온다. 이는 기질견백(氣質堅白)의 교추(交推, 오고 감)인 것이다.

그러므로 색질견실(色質堅實)한 것은 바탕(相)이 있어서 밝히기에 足하고, 허백기공(虛白氣空)한 것은 이름은 없으나 조짐(兆朕)이 있다. 情은 바탕이 있는 데서 나와, 금석수토(金石水土)와 비잠동식(飛潛動植)의 形象이 밝혀진다. 道는 無名에서 나와 은현생멸(隱現生滅)과 소장성쇠(消長盛衰)의 세력(勢力)이 조짐(兆朕)을 나타내니, 宇宙 萬象이 곧 이루어진다. 道는 하나의 궤도(軌道)로 크게 뭉치고 形은 천태(千態, 천가지)로 서로 다르니(道者는 一軌大同하고 形者는 千態相殊하니, 원심력(형)-구심력(도)->만왕만래용변부동본), 이에 聖人이 일으키어 온 누리에 통공(通空)하는 관음(管音, 피리)을 조음(調音, 음을 고르다)하여 그 大同의 情을 살피고, 허실(虛實)의 척도(尺度)에 따라 그 서로 다른 세력(勢力)을 조사하니, 이는 眞實로 事物을 성찰(省察)하여 증리(證理)하는 진법(眞法)과 신라가 금척(金尺)과 옥적(玉笛)을 쓴 그 유서가 상고지세(上古之世)에 연유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 대저 소밀(疏密)은 一體요. 기질(氣質)도 一體요. 공색(空色)도 一體요. 견백(堅白)도 一體이며, 각기 양쪽에 있는 것은 장차 교추상자(交推相資)하여 성물성사(成物成事)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天下 萬物이 반드시 빈 구멍(虛竅, 허규)에서 이름을 이루어 위치가 堅固하게 되고, 天下 萬事가 반드시 實이 교차(交叉)하는 데서 바탕을 보여 흔적이 하얗게 되니, 이는 太古 불역(不易, 바뀌지 않는)의 진전(眞詮, 참뜻)이다. 그러므로 허실견백(虛實堅白)에 대한 古今의 논쟁(論及)은 모두 上世에서 기원(基源)하였으나 그 바른 것(하나 되는 것)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가 제상공(堤上公)의 근심과 한탄을 깊고 통절하게 한 까닭이다.(징심록을 지으신 까닭을 말하는 구절)


징심록추기 3_박제상의 생애와 징심록 유래


제7장

제7장 1절

《징심록》에 덧붙인 별책 <金尺誌>도 역시 제상공(堤上公)이 쓴 것인가. 혹 뒷사람의 기록인가. 글의 뜻은 《징심록》과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별책으로 덧붙인 것은 무슨 까닭인가. 만약 堤上公이 지은 것이 아니면 반드시 百結 先生이 추가하여 보충한 것일 것이다.

공의 가문의 전설이 金尺과 많이 관계하고 있으며, 내가 일찍이 들은 오대산 노석자(老釋者)의 이야기가 사승야전(史乘野傳)과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지금 그 개요를 아래에 적는다.


제7장 2절

신라 내물왕(신라 제17대 왕. 재위 356-402년. 미추와의 조카이며 사위)때 朴 堤上公이 지마왕(祗摩王, 신라 제6대왕. 재위 112-134년)의 高孫으로 보문전(寶文殿) 大夫를 지내고, 鄕里인 삽량주( 良州=지금의 양산)의 干이 되어 澄心軒(양산 징강 언덕에 있음)을 짓고 상세하게 이치(理致)를 변증하여 시원전래(始原傳來)의 역사를 저술한 것을《징심록》이라 하였다. 때에 내물왕이 죽으니, 세 왕자는 나이가 어렸다. 차가(次家)의 동생 실성왕(實聖王, 신라 제18대 왕. 재위 402-417년. 미추왕의 동생인 각간 대서지의 아들)이 위협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내물왕의 장자 눌지(신라 제19대 왕. 내물왕의 아들)는 변란이 올 것을 미리 살피고, 거짓으로 말을 더듬으며 미친 짓을 하고 거리를 방랑하였다. 實聖王이 도외(度外)로 치고, 그 둘째 동생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인질로 추방하고, 말사흔은 인질로 왜국(倭國)에 보내 그들을 없애고 뒷날의 염려를 끊어버렸다.

이에 이르러 제상공(堤上公)이 先世의 전통으로써 곧 實聖王의 부당한 처사를 거론하니, 이에 世論이 쏟아져 나와 신자천(申自天) 배중량(裵仲良)등 六臣이 사퇴하였다. 實聖王이 마침내 눌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것은 전후 십여 년간의 책모였으며 순조롭게 반정이 성공하니, 申自天公이 堤上은 용감하고 지략이 깊고 말 잘하고 理致에 밝다고 하였다. 이 말은 역시 이에서 연유한 것이다.


제7장 3절

눌지왕이 임금이 되어서는 언제나 두 동생의 일로 상심(傷心)하여 政事에 힘쓰기가 어려웠다. 이에 堤上公이 개연히 청하여 고구려에 가서 符都의 일로써 왕에게 말하기를, "한 뿌리의 후예로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하였다. 이 한 마디 말로 복호(卜好, 후손이 김시습 선생)를 돌아오게 하였다. 귀국하여서는 그의 집 문 안에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곧바로 倭國으로 출국하였다. 부인 김씨가 듣고 쫓아가니 공이 이미 배를 타고 손을 흔들어 작별하므로 부인이 또한 그것을 권하고 장려하였다. 公이 이미 倭國에 입국하여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임금을 배반하고 귀화하였다고 하였다. 계속하여 2년 남짓 머물러 있으면서 뱃놀이를 즐기다가 하루는 말사흔에게 몰래 귀국할 것을 권하였다. 말사흔이 공과 함께 돌아가자고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공자께서 귀국하시면 일은 성공한 것입니다. 어찌 두 사람이 모두 온전하기를 바라다가 일을 위태롭게 만들겠습니까?" 하였다. 마침내 울면서 작별하고 뱃놀이를 계속하여 왜인들이 의심하지 아니하게 하고, 말사흔이 멀리 갔을 때를 맞춰 혼자서 관사로 돌아가니, 왜의 임금이 비로소 속은 것을 알고 노하였다. 공이 곧 符都의 일을 말하고 옛날의 정의를 수호할 것을 권하니, 왜의 임금이 완강하여 스스로 東海의 주인이라 말하고, 공을 협박하여 신하라 칭하라고 하였다. 공이 웃으면서 "나는 귀화자가 아니요, 鷄林의 臣下라" 하니, 왜의 임금이 더욱 노하여 곧 음형(淫刑, 고문)을 설하고 협박하였다. 공이 끝내 굽히지 아니하고 말할 때마다 반드시 '鷄林의 臣下'라고 하니, 왜의 임금이 마침내 목도(木島)에서 태워 죽였다. 공이 죽음을 보기를 마치 눈이 녹는 것과 같이 하고, 재가 되어버린 몸이 正氣로 변하여 千秋에 節義를 세웠다.


제7장 4절

눌지왕 형제가 公의 죽음을 듣고 슬픔이 지극(至極)하여 公을 영해군(寧海君)에 封하였다. 公의 부인 김씨는 公의 죽음을 듣고 세 딸을 거느리고 치술령에 올라, 스스로 치술령가를 짓고 東海를 바라보며 울다가 자진하였다. 長女 아기와 三女 아경 역시 父母를 따라 죽으니, 母女의 몸이 변하여 三體身母石像이 되었다.

次女 아영은 가문의 일을 위하여 굳세게 살면서 다섯 살 된 남동생을 기르니, 이가 백결선생(百結先生) 문랑공(文良公)이다. 눌지왕이 듣고 심히 슬퍼하여 말사흔에게 아영을 아내로 삼게 하여 위로하였다. 百結 先生이 장성하여 잠시 지비왕(慈悲王, 신라 제20대 왕 재위 458-478년 눌지왕의 장남) 朝에 벼슬하다가 곧 사직하고 돌아가 세상일을 버리고, 거문고를 타서 수증(修證)하며 스스로 先世의도를 행하다가 종적을 감추고 나타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제7장 5절

堤上公이 어렸을 때, 한 道人이 公을 보고 이르기를, "이 사람은 견우성(牽牛星)의 化身이니 반드시 제도(濟渡)하는 功이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堤上'이라고 하였다. 자라자 도인이 또 알리기를, "東村 金公의 집에 17살 난 처녀가 있으니 곧 직녀성(織女星)의 化身이므로 公과 더불어 좋은 인연이라" 하였다. 그로 인하여 혼인이 이루어졌다. 도인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두 사람은 별의 정기로 이루어진 하늘이 내린 인연이라. 그러므로 빛이 오래도록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비록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나 어찌 한이 있으리오."라고 말하였다 하니, 이는 참으로 奇異한 일이다.


제7장 6절

百結 先生이 일찍이 자비왕(慈悲王)을 위하여 식재(息災), 치원(治源), 여인(與人), 지인(知人), 양인(養人) 등의 설(說) 약간을 진술하였다. 평생의 품은 회포를 반드시 거문고를 펴서 태허(太虛)에 울리니, 世上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중 樂天樂과 대악(碓樂, 방아타령)이 전해졌다.

집이 가난하므로 옷이 해어져 수없이 꿰매 입으니, 세상사람들이 百結 先生이라고 불렀다. 선생이 그로 인하여 스스로 호를 百結이라 하고, 또 개명하여 누랑(婁琅)이라 하였다.

선생이 이미 시골마을로 물러나 여러 번 불러도 나가지 아니하므로, 왕이 그 마을에는 모든 법과 규제가 없애니, 곧 충효곡(忠孝谷)이요, 세칭 물금리(勿禁里)다. 고려말에 신운월재(申雲月齋) 先生과 문헌공 최충 先生등이 그 원고를 수집하여 세상에 드러내고, "크도다! 百結 先生의 道는 마땅히 해야 할 人君 만세의 사법(師法)이요, 그 출처가 정명무애(正明無碍) 하니 가히 지인(至人)이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징심록추기 4_왕건과 세종대왕, 박제상 후손을 우대하다


제7장 7절

신라 무열왕(신라 제29대 왕 김춘추. 제위 604-661년)이 미천하였을 때, 김유신 등과 함께 선도산 아래 百結 先生의 증손 마령간 선생에게 취업(就業, 공부) 하니, 선생이 언제나 백결 선생의 도로 그들을 가르치고, 항상 부도통일론을 설하며 외래의 법을 극력 배척하였다. 후에 무열왕이 등위 하여 유신 및 선생의 아들 용문 등과 함께 모의하여 三國統一의 일을 이룩하였다고 하였다. 후세에 최치원, 곽여 등 여러 현인이 이 집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제7장 8절

신라말경에 국사가 다난하므로 堤上公 집안의 증손 문현(曾孫 文鉉) 선생이 先世立言의 전통을 계승하여 여러 차례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하고, 야인으로 있으면서 강직하여 時事를 통론(痛論, 비판)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때에 효공왕(孝恭王, 신라 제52대왕. 재위 897-912년. 현강왕의 서자로 진성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았다.) 왕위 계승의 분쟁이 있으므로, 선생이 백 세의 고령으로 國中에 발연하여 世論을 환기하여 말하기를, 

[신라 立國의 根本은 符都를 復建하는 데 있다. 위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이 일에 힘쓸 것이요, 감히 사사로이 영화를 도모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는 입국 당시의 약속이기 때문에 천 년이 지났다고 하더라도 어제처럼 살아 있는 것이다. 어찌 그 본의를 잊는 것을 참을 수 있겠는가. 옛날의 조선은 곧 四海의 公都요 한 지역의 封國이 아니며, 檀氏의 후예(後裔)는 즉 모든 종족들의 심부름꾼이요, 한 임금의 사사로운 백성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동해로 피난 와서 방비를 설하고 나라를 세운 것은 어쩔 수 없는 데서 나온 것이요, 결코 본의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의 근본이 다른 나라와는 현저하게 다른 것이다. 우리들은 마땅히 이에 각성하여 일체의 분쟁을 불태워버리고 마음을 돌이켜 반성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이때에 국론이 크게 바로잡히고 조정(朝廷)이 숙연(肅然)하여, 王位를 신라 시조 赫居世王의 제1 증손의 후예에게 반환하니, 이가 神德王(신라 제 53대왕. 재위 912-917년)이었다. 3세 景哀王(신라 제 55대왕. 재위 924-927년)이 마침내 근본을 잃고 빙자하게 놀다가 몸은 망하고 나라는 패하여 다시 김씨에게 전하고 신라가 마침내 망하니 이가 敬順王(신라 제56대 왕. 재위 927-935년)이었다.


제7장 9절

때에 왕자 궁예가 처음으로 입국의 근본을 듣고 원통해하고 슬퍼하였다. 강토회복의 뜻을 품고 군사를 이끌고 삭북(朔北, 북방)으로 곧장 향하다가 철원에 이르러 주둔하고, 부장 왕건으로 하여금 고구려 유민들을 설득하게 하니, 저들이 고국의 재건을 원하므로 궁예가 그를 허락하고 곧 後高句麗라 칭하였다.

10년 사이에 궁예가 마침내 교만하여져서 태봉국이라 개칭하고 본뜻을 잃었다. 인심이 왕건에게 돌아가므로, 왕건이 마침내 왕이 되어 고려라 칭하고, 송악으로 도읍지를 옮겨 강토를 회복하는 일을 선포하였다. 이때에 신라는 이미 쇠하고 또 강토 회복의 대의를 막을 수가 없으므로, 敬順王이 마침내 나라를 내놓았다. 왕건 태조가 堤上公 宗家에 사신을 파견하여 符都의 일을 상세하게 묻고 그 次家의 후예 수헌 先生 父子를 불렀으나 다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고 하였다.


제7장 10절

고려 현종(顯宗) 때에 거란의 화가 계속하여 일어나니, 왕이 강감찬에게 여러 차례 영해(寧海, 박제상이 살던 경북 영덕)를 방문하게 하여 매우 부지런히 조언을 구하고 문중을 두루 구제하며, 차가(次家)의 후예(後裔) 청허(淸虛) 先生을 불러 은혜로 돌보아주기를 심중 하게 하였다. 또 赫居世 왕릉(王陵)을 다시 고치고 탑을 세워 공양하니, 그 탑문(搭文)에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영원한 태평과 온 국민의 평안을 위하여 받들어 이 탑을 건조하고 영원토록 고양할 것입니다.] 운운하였다. 강감찬공이 자신의 딸에게 종사의 수건과 빗을 받들게 하여 차가 후예의 아내가 되게 하였다고 하였다.


제7장 11절

고려 정종(靖宗) 때, 王이 公의 가문의 부흥을 위하여 후예(後裔) 命天公을 다시 寧海君에 封하고, 그 후손을 불러 수대 사이에 君을 封하여 격려하였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몽고의 난이 일어나니, 왕이 영해로 사신을 보내 자연의 이치를 상세하게 묻고, 공의 문중을 두루 구제하며 또 그 마을의 부역을 면하여 주니, 거무역리(居無役里)라 하였다.

次家의 후손(後孫) 세통공(世通公)의 祖孫 3代를 불러 계속 侍中에 임명하여 나라의 편안(便安)하고 太平함을 도모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제7장 12절

고려말에 유(儒, 신진사대부). 불(佛). 무(武, 무신) 세파가 권력을 쟁탈하므로 국세가 장차 위험하게 되었으나 거의 立國의 根本을 잊어버렸다. 세상사람들이 영해(寧海)를 보니 복서선술(卜筮仙術, 점성가)의 집이었다. 때에 李太祖가 명을 받들어 장마를 무릅쓰고 이미 대군을 동원하였으므로 선비 김생이 심히 걱정하고 곧 寧海에 조언을 구하였다. 김씨가 조언을 얻어 태조의 진중으로 곧바로 달려가서 회군할 것을 몰래 의논하니, 太祖가 전날 밤 꿈에 金尺을 얻었다는 등의 말을 하였다. 일설에는 중이 동해에서 달려와서 회군할 것을 아뢰었다고도 하니, 이 중이 혹 無學의 무리가 아닐까. 동해에서 달려왔다면 寧海와 관련이 있는 것 같기도 하여 無學이 본래 佛道가 아니요, 즉 仙流며 언제나 한 사람을 데리고 다녔다고도 하였다. 金生의 일은 史錄에 보이니 太祖 회군의 일은 두 사람이 여쭌 것인가?


제7장 13절

本朝(조선조), 세종대왕이 왕이 되어서는 은근히 寧海를 생각하여 公의 門中을 두루 구제하였다. 또 赫居世王 능묘를 세우고, 곧 公의 宗家와 次家 두 집에 명하여 서울 성균관 옆으로 옮겨 살게 하고, 장로로 편전에 들어 왕에게 알현하도록 명하여 은혜로 보살펴 주기를 심중(甚重)하게 하였다. 次家의 후예(後裔) 창령공(昌齡公) 父子를 불러 登用하였다. 때에 나는 이웃에 있어 宗家의 후손의 가문에서 수업하였다.


제7장 14절

노산조(魯山朝, 端宗-단종)(1441-1457. 조선조 6대 왕. 재위 1452-1`455년. 12세에 문종이 돌아가자 왕위에 올랐다.) 乙亥(1455년), 손위(遜位)의 날(6월)을 당하여 박씨 大小家가 마침내 서울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지니, 次家의 사람들이 金化로(=강화도 북부에 위치. 원래의 김화군과 금성군이 합쳐진 것이다.) 들어갔다. 이때에 운와(雲窩) 효손공(孝遜公)이 宗家가 어찌할 겨를 없이 매우 급한 중에 《징심록》을 받아 가지고 김화(金化)로 들어가 숨어버리니, 때에 나도 같이 따라갔기에 비로소 읽어보게 되었다. 뒤에 다시 次家 포신공의 집에 전해지니, 公의 아들 훈씨(薰氏)가 가지고 문천(文川, 함경도) 운림산(雲林山)으로 숨어버렸다.


징심록추기 5, 제8~14장(마침) 금척지를 읽고 금척에 대한 소회를 밝힘_훈민정음 28자를 징심록에서 취하다


제8장

위에 기록한 모든 일은 가히 《징심록》의 유래가 추측하여 알 수 있게 한다. 소위 입언(立言, 어떤 뜻을 말함)이나 구언(求言, 조언을 구함)이란 것은 반드시 금척(金尺)의 수리(數理, 수의이치)에 있으나, 지금 공의 집 종가의 후손이 이미 세상을 달리하였고 집안사람들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풀어볼 수 없게 된 지가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지금 아는 사람이 없으니 애석할 따름이다.

내가 일찍이《金尺誌》을 읽으니 그 수사(數辭)가 매우 어려워서 알 수가 없었다. 대저 그 根本은 곧 天符의 法이다. 그것을 金으로 만든 것은 변(變) 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요, 자로 제작(製作) 한 것은 다 같이 오류(誤謬)가 없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變하지 않고 오류(誤謬)가 없으면 天地의 이치(理致)가 다하는 것이다. 《金尺誌》 중의 소위 日月星辰과 金土氣水의 根本이 한 가지로, 不變의 道에 있다. 나는 새와 헤엄치는 물고기와 동물과 식물의 낳고 죽고 盛하고 쇠(衰)하는 理致가 다 오류(誤謬)가 없는 法에 매달려 잇는 것이 이것이다.


제9장

그러므로 金尺의 由來가 그 根源이 매우 멀고 그 이치(理致)가 매우 깊어, 그 形象은 삼태성(三台星)이 늘어 선 것 같으니 머리에는 불 구슬을 물고 네 마디로 된 다섯 치이다. 그 허실(虛實)의 數가 9가 되어 10을 이루니, 이는 天符의 數다. 그러므로 能히 天地造化의 根本을 재고, 能히 이세소장(理勢消長)의 根本을 알고, 人間萬事에 이르기까지 재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숨구멍, 마음, 목숨을 재면 기사회생(起死回生)한다고 하니, 眞實로 신비(神秘)한 物件이라고 할 것이다.


제10장

역사 기록에 의하면, 赫居世王이 미천할 때에 神人이 金尺을 주면서 이 金尺을 가지고 금구(金甌, 금사발)를 바로 잡으라고 말했다 하고, 일설에는 金尺과 玉피리가 칠보산(七寶山)에서 나와 赫居世王에게 전해졌다고도 한다. 七寶山은 寧海의 名山이요, 백두산 아래 명천부(明天府)에 또 七寶山이 있으니, 어느 산인지 알 수가 없다. 만약 後者라면 이는 반드시 옛날의 일이리라. 신라 창시의 根本이 이미 符都에 있었으니, 金尺의 法이 또한 단군의 세상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赫居世王이 선도산(仙桃山) 단묘(壇廟)의 성모(聖母) 파사소(婆娑蘇)에게서 출생하여 13세의 어린 나이로 능히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은 것은, 그 血統의 계열이 반드시 유서가 깊었기 때문이며, 金尺이 오래된 전래물(傳來物) 임을 또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法이 世上에 傳해지지 않고 堤上公의 집에만 홀로 전한 것은, 이것이 반드시 파사왕가(婆娑王家)에 傳하였기 때문이요, 또 公의 門中의 후예(後裔)가 엄중하게 비밀(秘密)에 부쳐 그것을 감춰 두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本文 《징심록》을 世上에 보이지 않았음에랴.


제11장

金尺의 소재는 (金尺誌)에서 밝히지 않았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赫居世王이 땅 속에 묻고 30개의 언덕을 만들어 그것을 감춰버렸다고 하였다. 신라 武烈王 대에 唐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공으로 당나라 황제의 명령을 빙자하여 이 물건을 찾아내기 위하여 金尺院 지역을 파내므로, 때에 崔氏라는 사람이 몰래 감추어서 바다를 건너가 땅 속에 묻었다가 몇 년 뒤에 다시 가지고 돌아와서 그 스승에게 반환하므로, 그 스승이 금강산 바위굴 속에 깊이 감추어 버렸다고 하였다. 일설에 崔氏라는 사람은 귀단(鬼團)의 두목으로, 도둑과 마귀를 높은 산과 바다 가운데 있는 섬으로 몰아내고, (金尺을) 金剛山으로 몰래 가지고 들어가서 깊이 감추어버렸다고도 하였으니, 이 또한 기설(奇說)인 것이다. 옥피리는 이미 땅 속에서 나왔으니 金尺도 역시 다시 나타날 때가 있을 것인가.


제12장

신라가 백제를 평정한 후에 당나라 황제가 신라를 침범하고자 출병하였으나, 국경의 해역에 당도할 때마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번번이 스스로 패하였으니, 이는 기후가 괴상하여 군졸들이 병이 들어 군사력이 스스로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당나라 황제가 이 일을 괴상하게 여기고 사신을 보내 신라에 이상한 물건이 있는지 살펴보게 하였다. 사신이 와서 그 일을 시험하니 이상한 기운이 항상 신라 서울의 산천에 떠 있으므로 마침내 군사를 돌렸다고 하니, 이것은 金尺에 관계된 설이 아닌가. 기타 신라 때의 허다한 이설이 천부금척(天符金尺)에 관계된 것이 많으나 승려의 무리가 自家에 억지로 끌어다 붙여 설교의 도구로 제공하고 흐리게 하였으니(뒤섞었으니), 그것을 가려낼 여유가 없는 것이 애석할 따름이다. 


제13장

金尺의 所在와 尺度의 측법(測法)을 지금 비록 알 수 없으나, 《金尺誌》만이 라도 남아 있는 것은 多幸한 일이다. 만약에 後人이 있어 硏究하여 그것을 아는 자가 있게 된다면, 어찌 金尺을 복제(復製)할 길이 없을 것인가. 만약 復製하지 못하더라도 그 法理를 알면 足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法이 역대 우리나라에 功이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특히 本朝(조선조) 太祖의 회군에는 그 功이 현저(顯著)하였다. 太祖가 꿈에 金尺을 얻은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그러므로 영묘(英廟, 세종대왕)가 公家의 후예(後裔)에게 은근히 대한 것은 당연한 바가 있으니, 하물며 訓民正音 28字의 根本을 《澄心錄》에서 取했음에야.


제14장

슬프다! 바꿀 수 없는 眞理의 法이 안개에 싸여 人間世上 風波 中에 배태되어 있으면서 숨어버린 듯 징조(徵兆)가 있고, 百姓이 태어난 始原의 歷史가 누누이 世代가 잇달아 끊이지 않는 사이에 비밀(秘密)스럽게 전해져서 쓸쓸하게도 들을 수 없으니, 허구한 歲月 속에서 堤上公 후예 일가는 眞實로 千古 世外의 族이며, 世世로 숨어 흔적을 감춘 사람을 많이 낸 것은 참으로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것으로 가히 백결(百結) 先生의 도풍가법(道風家法)을 볼 수 있으며, 또한 上古에 있었던 道가 이어 내려온 世上 일부분의 모습을 엿보기에 족하니, 읍루씨(邑婁氏)가 산에 들어 나오지 않으며 혼탁(混濁)한 世上에 이름을 끊어버린 것이 역시 까닭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청한(淸寒, 김시습) 씀


박금선생의 後 記

이는 淸寒 김시습 先生의 징심록(澄心錄) 추기(追記)이다. 先生은 어려서부터 거의 우리 집에서 지내셨다. 다시 歲寒의 맹세를 맺고 함께 雲林으로 들어갔다. 이는 당시의 사세(事勢)에 연유한 것이었다. 어느 날 符都를 復建할 大業에 뜻을 세우고 동분서주(東奔西走) 남정북래(南征北來)하며 사람을 찾아 왕성하게 도모하고 일생의 정력을 기울여 쏟더니, 이징옥과 이시애의 두 차례에 걸친 실패에 당하고는 마침내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이는 무여(無餘)의 道를 몸소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선생이 우리 가문 先代의 일을 익히 알아, 행장(行狀)을 쓰거나 족보(族譜)를 만드는 일이 거의 先生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先生은 우리 家族이나 다름없었다. 이번에 本文을 어수선하고 시끄러우며 이산중(離散中, 6.25 피난 중)에 기억하여 쓰니, 혹 군더더기를 붙이고 뼈를 없애는 한탄이 없을 수 없겠으나, 先生의 本文이 이산중(離散中)에 完成되었으니 時代의 추세가 우연히 들어맞고 사세가 일치(一致)하였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시는 先生의 영혼(靈魂)이 반드시 불쌍하게 여겨 이를 용서(容恕)하고, 장차 저승에서 이 世上에 天符의 이치(理致)를 드러내어 밝히는 것(闡明, 천명)을 도울 것이다.


금당(琴堂, 박금) 삼가씀


자료출처 


징심록 추기 1_김시습, 박제상공의 경지를 찬탄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XHpCjyd8OGo

https://www.youtube.com/watch?v=hfHBVHWDuHc

https://www.youtube.com/watch?v=Y202RIdoH7g

https://www.youtube.com/watch?v=gRdrTA0FWCs

https://www.youtube.com/watch?v=I6wG44NJhd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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