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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운 Oct 21. 2021

[나를 찾아줘] 실종된 자아를 위하여

나는 나를 죽여 <나를 찾았다>






“무엇을 하려면 완벽하게 해야 한다.”


 에이미가 주인공인 어메이징 에이미의 펀치라인이자, 진짜 에이미가 살아온 삶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한 문장이다. 나를 찾아줘는 자아를 잃어버린 한 여성이 살아가는 삶에 대한 영화로, 이 대사 한 줄은 에이미 엘리엇이 자아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가장 커다란 이유이자 영화에서 펼쳐지는 모든 비극의 시작이다.


 에이미가 자라온 불안정하고, 경쟁을 통해서만 관심이나 애정을 받을 수 있었던 삶은 에이미의 자아 상실에 영향을 큰 미쳤고, 이는 부모의 태도가 그 상당수를 차지한다. 부모는 진짜 에이미가 아니라 돈이 되는 어메이징 에이미를 더 위하는 것 같아 보이고, 언제나 진짜 에이미가 실패한 것을 성공해 내고 마는 사랑스러운 어메이징 에이미의 결혼파티에 에이미를 불러 기자들에게 고통받게 한다. 에이미는 부모의 욕망이 투시된 판타지 속의 어메이징 에이미보다 성공하고 행복해야만 한다는 강박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성공한 에이미이자 부모의 욕망과 자신의 자아를 만들고 분리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에이미는 스스로 존재하거나 욕망해본 적이 없는 여성이다. 어릴 적 자신이 무언가 하나를 실패할 때 마다 어메이징 에이미는 성공해냈고, 에이미는 부모의 욕망에 충족되지 못하는, 모자란 아이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에이미는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진 나, 그래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모습”을 연기하게 되는데 이는 에이미가 사랑받고 관심받을 수 있었을 때는 오직 타인의 욕망에 끼워맞춰졌을 때 뿐이기 때문이다.


 에이미가 닉 던을 만나 그가 원하는 완벽한 여성의 연기를 하고 인정받으려는 모습을 보면 에이미의 존재가 얼마나 텅 빈 존재인지를 알 수 있었는데 에이미는 닉 던과 살 때는 닉의 욕망 따라 “쿨 걸”을 연기하며 그가 바라는 여성의 모습을 취한다. 원할 때 섹스해주고, 재미도 없는 스포츠를 같이 봐주며 환호하고, 같이 냉동 피자에 맥주를 먹어주면서 마른 몸을 유지하고, 남자의 기를 세워주는 여자 말이다. 그런 에이미는 데지 콜링스와 함께 살 때는 콜링스의 욕망대로 외모를 가꾸고 고상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으로 탈피한다.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 타인의 욕망이 투시된 존재일 뿐, 진짜 에이미로서의 존재는 찾아볼 수 없다. 사실 진짜 에이미는 마음껏 담배를 피우고, 음식을 먹고 그다지 외모에 신경쓰지 않는 여자지만, 남성과 세상은 항상 다른 것들을 원해왔기에 에이미는 타인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오기만 했다. 한번도 자유로운 에이미 스스로인 채로 인정받지 못했으므로.


 때문에 <나를 찾아줘>에서 보여주는 에이미가 가진 이슈는 바로 요즘 여성들의 이슈기도 하다. 여자들이 에이미처럼 싸이코패스라는 것이 아니라 에이미와 같이 스스로 욕망하지 못하는 존재로 살아가도록 강요된다는 뜻과 같다. 에이미는 마치 짜여진 연극처럼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고 남자들의 기준에 맞추어 외모를 가꾸며, 옷을 갈아입듯 성격을 바꾼다. 그리고 사회에서 말하는 성공한 여성, 남편에게 사랑받고 드라마같은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고자 한다. 이는 정말 단순히 에이미가 싸이코패스이기 때문일까? 사실 그녀의 문제는 현대 여성 모두가 겪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중성이 아닌가. 속으로는 나 그 자체로, 원하는대로 존재하고 싶지만, 사랑받기 위해서는 이래야 한다고 말하는 기준에 나를 끼워맞추게 된다.


 예쁜 얼굴과 마른 몸매, 사근사근하고 순종적인 여자친구이자 아내. 남편의 말에 불평하거나 화내지 않으며 항상 인내와 사랑으로 그를 교화시켜야만 하는 착한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강요는 모든 현대 여성이 느끼는 부담이자 이중적인 감정이다. 그런 사람들이 지옥같이 싫으면서도 “여자”로 인정받기 위해선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래서 에이미가 가지는 성격적 결함은 단순히 에이미 그 자체가 이상하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그녀가 가진 문제의 대다수는 이 사회의 문제다. 그녀 스스로 존재하거나 무언가를 욕망하지 못하고, 타자, 대표적으로 남성으로 상정되는 욕망에 맞추어가며 그것이 나의 욕망이라고 믿는 것. 자아가 사라진 채로, 스스로를 존재 자체로 긍정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는 것.


 그래서 나는 에이미를 바라볼 때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슬프게 느껴진다. 스스로 존재해본 적도, 사랑해본 적도 없는 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극단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얼마나 많은 가면을 끌어안고 살아왔는가. 빌어먹을 44사이즈를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며 6년을 넘는 시간을 살았었고, 화장을 안하면 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남자들”이 좋아한다는 돌핀 팬츠와 테니스 스커트, 강아지 상의만한 크롭탑 따위의 불편하고 기능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옷을 사 입고는 했다. 나는 아니라고, 화장도 옷도 내 취향이라고 주장했지만 이제는 안다. 나는 그게 “사회적으로 사랑받는 여자” 의 조건이었기에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만일 사회에서 77사이즈 여자를 사랑스럽게 여기고, 추리닝을 입고 맨 얼굴을 조명하며 찬양했다면 과연 하루에 한끼만 먹는 자기 고문과 고행을 하고 살았을까? 아니다. 나도 닉에게서 벗어난 에이미처럼 매일같이 햄버거와 냉동식품을 먹고 편한 옷을 입으며 귀찮게 뿌리염색 따위도 하지 않았을거다. 내가 해온 모든 행위가 결국 나의 취향과 나의 욕망이 아님을 발견했을 때, 나는 슬픔과동시에 미약한 해방감을 느꼈다. 더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다짐과, 내가 드디어 타인의 시선과 욕망이라는 지옥에서 벗어난다는 쾌감.


 에이미 또한 자살 대신 자신을 택한다. 원래의 에이미는 자기 자신, 즉 자아가 없었기 때문에 죽는 것도 두렵거나 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온전히 존재하지 않으면 살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고, 자신을 파괴하는 일에도 거리낌 없었다. 그러나 에이미는 닉 던에게서 원하는 삶에 대한 희망을 보았고, 그에게 돌아가길 택하며 “나를 찾았다.” 싸이코같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행동하고, 닉에게 맞추어 살 필요가 없는 에이미가 되어 한 번도 가지지 못했던 자아를 찾아낸다. 그건 사회가 말하는 올바른 여성상도, 남자들이 사랑하는 여성도 아니다. 에이미는 오히려 그 극단에 서있다. 남자를 죽이고, 조종하고, 비난하고, 이용한다. 어떤 모습이든 간에 그게 진짜 에이미다. 남자의 욕망에 짜맞추어진게 아닌 진짜 원초적인 인간. 그렇게 에이미는 실종되었던 자신을 찾는다.


그래서 <나를 찾아줘> 한 여성이 사회로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는 여행기에 가깝다. 그리고 닉은 발견된 진짜 에이미를 호명하고,




그녀가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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