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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운 Oct 21. 2021

[버즈 오브 프레이] 원한 것은 토스트 한 입이야

나는 아마 끔찍한 사람인가 봐.



호주에 가서도 영화 보고싶은 욕구를 못이기고, 영자막도 없이   영화. 할리 퀸이다.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정말 최악 중의 최악으로 봤던 터라 별다른 기대없이 영화관의 문턱을 넘었었다. 호주는 영화관 문화가 그렇게 발달하지 않은건지 딱히 볼만한 것도 개봉하지 않았고, 2-3편 있는 것 중에 아는 거 아무거나 골라 잡아서 예매한 것이었는데 예상 밖의 내용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할리 퀸이라는 캐릭터를 온전히 다시 정립한 느낌이었다. <수어사이드 스쿼드> 에선 성적으로만 소비되고, 속옷 수준의 팬츠와 하이힐 신고 “내가 입고 싶으니까 입는 거야!” 하며 흔히 남자들이 말하고는 하는 시선과 입장에서만 말하는 느낌이었다면, <버즈 오브 프레이>에서는 의상부터 스타일링까지 훨씬 재치 있고 발랄해 보인다. 성적으로 대상화되었다는 감상보단 정말 귀여운 할리의 스타일이라는 느낌이었다.


스토리 자체는 평이하다 못해 진부할 정도지만 눈이 시릴만큼 팡팡 터지는 색감이나 알록달록한 색감은 눈을 즐겁게 했고, 피가 터지는걸 단순히 피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폭죽 가루나 페인트로 대신한 부분이 재치 넘쳤다. 잔인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할리 특유의 알록달록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이 가득하다.





더불어 영화에 소품으로 등장하는 치즈 베이컨 토스트가 굉장히 의미 있게 다가왔다. 초반부에서 할리는 치즈 베이컨 토스트 먹기를 실패했다가 엔딩 장면에서 세상을  가진 듯한 당당하고 행복한 얼굴로 치즈 베이컨 토스트를 베어 무는데,  장면이  영화의 백미였다. 그녀가 얻은 모든 해방-조커로부터, 사회로부터, 남성들의 시선으로부터-   입에 녹아들어 있고, 동시에 여성들이 원하는 자유를 그대로 함축하고 있다. 여성들이 원하는 건 세상을 뒤엎고 남자를 가축처럼 지배하고 남자보다 월급을 두배  받고 남자를  안에 가두고 교육하거나 멸시하고 밥이나 차리게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 거다. 걱정 없이  돈으로 맛있는 걸 먹으면서 입고 싶은 옷을 입고 웃으면서 사는 것. 필요할  머리끈을 나눠 쓰고, 남자들의 지배나 보호 아래에 살지 않고도 안전할  있는 일.


 음식담긴 페미니즘적 의미를 심도 있게 파헤치지 않아도 단지 먹는다는 단순한 행위만으로도 그녀가 자유를 얻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양껏 먹는다는  기초적인 행위는 슬프게도  많은 현대 여성들이 원하는 자유 기도 하니까. 맛있는 음식을 행복하게 먹는다는 행위는  나와  주변의 모든 여성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존재였다. 우리는 뭔가를 먹을 때마다 죄책감을 느꼈고, 반성해야 하는 존재가 되도록 교육되어 왔다. 여자니까, 여자는 뚱뚱하면 안 되니까,  말라야만 하니까. <나를 찾아줘> 에이미의 말마따나 “냉동 피자에 맥주를 먹으면서도 44 사이즈를 유지하는 게 남자들이 사랑하는 쿨한 여자니까. 나를 포함한  주변 여성들 중에 맛있는걸 잔뜩 먹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사는 사람을  일이 없다. 이거 먹고 살찔까?  먹었는데 어떡하지? 망했다, 죽고 싶다, 하는 사람은 숱하게 봤어도. 고작 음식에 죄책감 따위를 운운하는 게 웃긴데도 여자들은 그렇게 사고하도록, 그게 너무 당연해서 이상하다고 느끼지도 못할 만큼 오랜 시간 배워 왔다. 그래서 자유를 되찾은 할리가 토스트를 먹는 장면이 내게는 그토록 눈물 나게 자유로워 보였는지 모른다.  , 고작   입이.


세상에는 여성을 구속하는 언어가 너무 많다. 착해야 . 실패해선 안돼. 완벽해야 . 예쁘고 날씬해야 . 순종적이고, 그러면서 자립심이 있고, 하지만 너무 독립적이어서도 안돼. 사회는 당연하다는 듯이 손쉽게 여성을 구속하고 그걸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사실에 반기를 들면 나는 남성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속이 뒤틀린 모자라고 나쁜 여자가  뿐이다.  목소리를 내기 위해선 우선 예쁘고 날씬해야만 한다. 그래서 할리 같은 캐릭터가 행복한 얼굴로 토스트를 베어 무는 엔딩이 깊게 와닿는다. 그녀는 망가졌고, 더 이상 조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엉망이고, 착하지도 않고,  멋대로지만 더 이상 조커나 누군가의 소유가 아니다. 그래서 자유로워진 여자가 하고 싶은 일은 단지 치즈 베이컨 토스트를 먹는 것뿐이다. 그렇게 단순하고 그래서 행복하다. 여성이 페미니즘으로 쟁취하려는 건 평등과 토스트 한입. 그게 전부다.




 할리는 우주를 구하지도 않았고, 외계인 침공을 막지도 않았고, 인류의 절반을 구하지도 않았다. 그냥 나쁜 애들 몇 모여서 손버릇 나쁘고 버릇없는 여자 애 하나를 구하고 겨우겨우 나쁜 놈 하나를 죽였을 뿐이다. 정의감 따위도 아니고 그냥 할리 스스로 그러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했다. 할리는 착하지도 않고 정의감 있지도 않지만 적당히 의리 있고 적당히 나쁘고 적당히 인간적이다. 그런데 그녀의 캐릭터가 너무도 특별하고 사랑스러운 이유는 할리 퀸이야 말로 여성 캐릭터들에게 쉽게 허락되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까닭이다. 그녀의 캐릭터는 여자이기 이전에 인간임이 고려되었으니까. 세상의 어떤 여성 캐릭터가 이렇게 허술하고 모자라고 바보 같고 때로는 나쁘다가도 귀엽고 강하고 연약했는가. 때문에 다채로운 그녀의 인간적인 모습이, 그리고 토스트를 베어 무는 얼굴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영화에서 할리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미안해. 아마 나는 그냥 끔찍한 사람인가 봐.”


그리고, 만약 그렇다고 해도 어때.

할리는 더 이상 착하고 완벽할 필요가 없다.

이 영화는 착한 성녀와 섹시한 악녀에서 해방된 영화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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