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가 직업 입니다

첫번째 취미를 캠핑샵 오픈으로

by 이가을


꼬박 30살 차이인데도 성향이 비슷한 우리는 잘 맞았다.

집보다는 밖으로 싸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는데 자연을 바라볼 때 설레는 것도 닮은 우리였다.

우리는 오래 무엇을 끈덕지게 하는 것보다 이것저것 새로이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할 줄 아는 것은 많았지만 잘하지는 못했다. 낚시를 좋아했지만, 물고기를 잘 잡지 못했고, 하는 일을 좋아했지만, 돈은 많이 벌지 못했다. 그래도 서로를 응원해 주었고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헤어졌다. 내 나이 스물일곱 그의 나이 쉰여덜일 때였다.

TV에 나오는 근육질의 중년은 아니었지만 크게 아픈 곳은 없던 터였다. 의사는 심근 경색이라고 했다. 그렇게 아빠가 돌아가셨다. 나는 어른이었지만 아빠를 잃기에는 어린 나이였고, 아빠도 자기 삶을 끝 마치기에는 분명 이른 나이였다. 그날은 동생과 함께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우리에게 밥을 차려주고 방에 들어간 엄마는 아빠를 발견했고, 내이름부터 불렀다. '00아 너희 아빠 죽었다.' 엄마의 목소리는 고함과 비명에 중간쯤이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20년이 지난 지금도 바로 옆에서 소리치는 것처럼 생생하다.

사실 옛날 사람인 엄마는 무엇이든 딸보다 아들이 먼저인데 그날만큼은 내 이름을 먼저 불렀다. 하필 “아빠 죽었다 앞에...” 요즘도 엄마는 집안 경조사비를 내야 하는 경우, 겉봉에 동생 이름을 적는다(분명 돈은 내가 드렸는데….). 그래도 그때 내 이름을 먼저 부른 걸 생각하면, 엄마에게 의지가 되는 큰 딸이지 싶어 전혀 서운하지 않다.

아빠를 발견하고 119를 불러 병원에 갔는데 내리 장례까지 치르게 되어 사흘 만에 집에 돌아왔다. 식탁 위에는 먹다 만 반찬들이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집안의 시간은 삼일전에 멈춰 있었다.

​나 또한 내일이라는 삶이 없이 멈춰 있었다. 아니 한 시간 후의 삶도 의미가 없었다.

당시에 만나던 친구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하고 고맙다. 친구들은 깨진 그릇같은 나를 위해 자꾸 밖으로 불러 내주었는데, 만났을 때마다 나는 “이따 집에 가다 죽을 수도 있는 게 인생이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모든 게 허무하게 느껴졌다. 내 몸과 마음은 그날 식탁 위에 반찬같이 비쩍 말라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울증이었다. 친구들은 다시 없을 20대후반. 여름 햇살 같은 찬란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나는 길고 지독한 겨울 속에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기도 만나기도 싫은 사람이 분명했을 텐데 주변은 나를 기다려 주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에 웨딩 관련된 일을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집중해야 할 것이 필요했으므로 일에 몰입하다 보니 남들보다 잘했다.

잘한다고 해서인지, 철이 든 이후라서 그런지 열심히 했고 꼬박 15년을 했다. 웨딩은 변화가 빠르고 유행에 민감한 업종이다. 많은 하객을 불러서 하는 화려한 웨딩이 유행하더니 지금은 프라이빗한 소규모 웨딩이 선호된다. 드레스, 메이크업도 모두 한 해가 멀다고 인기 있는 스타일이 바뀐다. 주요 소비층이 감각적이고 트랜디한 2~30대 보니 당연한 결과인데, 마흔이 넘고 나니 이런 일을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지 스스로 의심이 되었다. 적당히 말고 늘 남보다 잘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기도 했다(지금 생각하면 ‘이젠 지겹다’는 말을 다른 식으로 표현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새로운 일을 하려고 하니 막막했다. 마흔이 넘은 나이 아닌가?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는 두렵고, 그렇다고 시작도 하지못할 늙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서점에 마흔이 들어간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봐도 다들 고민이 되는 때인가보다).

꽤 오랜 시간 이런 생각들이 무거운 안개처럼 머리속에 앉아 있었다. 아빠의 기일을 챙기고 돌아오는 날 아빠의 마흔은 어땠을지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아빠는 50대 후반에 자기 삶이 끝날 줄 알았을까?

나는 그날 차 안에서 내일을 달리기 위해 오늘을 연료로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내일과 미래를 위해 말고 온전한 오늘을 살기 위해 더는 미루지 않기로 했다.

모든 특별한 일은 ‘어느 날’에 일어난다. 바로 그 어느 날이었다 지인이 하는 카페로 놀러 갔다. 사실 목적이 있어 갔지만 그가 부담스러워할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자연스럽게 놀러 갔다고 하겠다.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는 지인은 사무실 1층에 다소 규모가 큰 카페를 하고 있었다. 인테리어 회사 사장이므로 당연히 카페 느낌은 최고다. 카페 외에 본업이 있어 크게 신경을 안써서인지, 도심에서 떨어져 있어서인지, 카페 매출은 위치만큼이나 한적했다.

자연을 좋아했던 아빠의 기질을 물려받은 나는 남들이 다 호캉스 갈 때, 산으로 들로 배낭을 배고 텐트를 치고 야외 취침을 하러 다녔다. 그렇게 편한 거 보다 고생스럽지만, 자연과 가깝게 지낼 수 있는 캠핑이 나의 취미이다. 당시 캠핑 스타일 주점 같은 것은 있었지만 캠핑용품을 직접 판매하고 캠핑 의자, 소품 등 캠핑 콘셉트로 꾸민 캠핑카페는 없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도심에서 좀 떨어진 한적한 위치가 캠핑 카페를 하기에 최적의 장소로 보였다. 게다가 장사 안되는 지인의 가게 아닌가.

캠핑은 내 취미였으므로 전혀 생소한 분야가 아니었고, 매장을 얻는 부담 없이 시작해 볼 수 있는 좋은 계획 같았다.

​(현재는 지인과 카페와 스토어를 분리 운영하고 있다. 물론 이름은 동일하게 이제 동업자는 아니지만 여전히 친구로 잘 지내고 있다)

한적한 오후! 늘 그렇듯 손님과 매출도 한적했고 나는 지인에게 ‘캠핑카페‘ 동업을 제안했고 나를 전적으로 신뢰했다고 믿고 싶지만, 별다른 선택권이 없어서인지 짧은 고민의 시간을 갖고 제안을 수락했다.

이렇게 나의 새로운 직업이 탄생했다. ‘캠핑카페 사장’ 그리고 나의 첫 번째 ‘취미를 직업으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무모하게 시작된 첫 해, 무모한 도전인 만큼 자리를 잡는데 애를 많이 썼다.

업계에 있던 베테랑 직원을 점장으로 모셔 왔지만, 나는 모든 게 처음이다 보니 모든 게 어려웠다

수십 개의 브랜드와 수백 개의 제품 스펙과 장단점 외워야 할 것이 한두 가지 아니었다.

매일매일 공부를 해도 끝이 없었다. 그나마 고객을 상대하는 응대 서비스는 기존과 다르지 않아 부담이 덜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취미를 직업으로 매장까지 오픈하다 보니 고객을 이해는 깊이가 달랐다 그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고객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았으며, 흔하지 않은 제품으로 셀렉하고, AS등의 처리도 당연히 차이가 있었다. 좋은 소문이 조금씩 나고 있었다.

오픈 두 번째 해에 코로나가 터졌다. 신이 도왔다. 모든 공중파와 케이블 방송할 것 없이 캠핑 관련 콘텐츠를 다루었을 정도로 캠핑이 대유행했다. 전 직장인 웨딩 쪽은 코로나로 소히 박살이 났다. 과거 동료들 중 몇이 다니는 곳이 어디냐고 했다. ‘어디?‘ ’점집!!’ 누구는 자리를 깔라고 했고 로또 번호를 내놓으라고 했다.

코로나가 끝난 지금도 다행히 고객이 꾸준하다.

‘제품보다는 삶의 여유를 팔고 싶습니다.’라는 문구를 인스타그램이나 홈페이지에 올려 두었다.

일일희비 하며 제품을 파는 곳이 아니라, 캠핑 좋아하고 자연을 아끼며 함께 같은 취미를 즐기는 곳임을 이해하는 고객이 여전히 늘고 있다.

운이 좋아인지 또는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 두려움과 맞서서 인지

취미인듯 직업인듯나 는 오늘도 즐거운 밥벌이를 하고 있다.

인생은 유한하다. 모두가 알지만, 누구도 지금은 느끼지 못한다. 더욱이 본인의 삶의 끝을 누구도 알지 못한다.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내일을 위해, 미래를 위해 오늘을 쓰고 싶지 않다. 오늘은 온전한 오늘로 사용하고 싶다.

그런 오늘 하루가 쌓여 나의 인생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여전히 오늘도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내일이 주어진다면, 아빠의 몫까지 더해 내가 진짜 원하는 진한 삶을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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