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아무거나 군이 하교 후 친구랑 놀고 싶다고 했다. 이제 친구들 대부분이 학원을 다니니 놀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더 내 허락이 필요하다기보다 통보에 가깝다. 그러니 나도 애써 못 이기는 척 허락하는 듯한 느낌을 팍팍 줬다. 허락과 동시에 어디서 놀 건지 아무거나 군과 친구는 잠깐의 고민을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놀이 장소는 친구의 집이 됐다. 친구의 집 근처 편의점에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걸 하나씩 샀고 보호자인 엄마들도 따뜻하고 달콤한 커피 한 잔씩을 손에 들고 집에 도착했다. 신발을 허공에 날리듯 벗어던진 아이들은 곧바로 방으로 가 레고 놀이를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엄마들도 부엌 식탁에 앉기 전부터 수다 엔진에 시동이 걸렸다.
서로 마음이 맞는 좋은 사람과의 시간은 재미있고 활시위를 떠난 활처럼 쏜살같다. 특히 이날은 벌써란 말이 너무도 간절하고 아쉽게 느껴졌다. 근처 회의가 있던 간단 씨를 태워 돌아가야 하니 아쉬운 내 마음은 뒤로하고 일어섰다. 이런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아무거나 군도 약속했던 놀이 시간을 훌쩍 넘어 헤어지는데도 입술이 부루퉁해 댓 발 나왔다. 그 모습을 보니 내 어린 시절 밖에서 친구랑 놀다 해가 산을 넘어가며데려다 놓은 어스름한 어둠이 너무도 싫어 해를 미워했던 마음이 생각났다. 아무거나 군과 나의 시대가 다르나 서로의 마음은 가늘고 긴 선에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미 아무거나 군의 친구 집에서 스스로 큰 그림을 그렸다. 평소보다 우리 가족의 늦은 귀가는 나 홀로 저녁을 준비하는 시간과 간단 씨, 아무거나 군이 저녁을 기다리는 시간은 모두에게 고통이라고. 그러니 저녁은 밖에서 해결하고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을 만들어냈다. 간단 씨가 기다리는 곳으로 차를 운전하며 먼저 아무거나 군에게 내 마음을 넌지시 내비쳤다. 아무거나 군은 곧바로 기분 좋게 호응했다. 그럼 다음은 간단 씨다. 나보다는 귀엽고 어린 아무거나 군이 외식을 허락받을 수 있게 넘겼다. 간단 씨가 차에 채 오르기도 전에 아무거나 군은 외식이야기를 했다. 간단 씨도 웬일인지 한 번에 좋다고 했다. 그렇게 저녁은 우리가 선택한 식당에서 맛있고 푸짐하게 해결했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순조롭게 식사를 해결해서인지 한결 기분이 좋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간단 씨가 마트에 들러 떨어진 맥주를 사자는 말에도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마트 주차장에 도착했다. 저녁 시간이어서인지 주차장은 빈자리가 꽤 많고 한산했다. 여유롭게 주차를 한 후 마트로 내려갔다. 카트를 하나 빼서 입구로 들어서자 달콤한 냄새가 진하게 콧속 깊이 들어와 기분이 좋아졌다. 그 뒤에야 하얀 스티로폼이 층층이 쌓여 올려진 빨간 딸기들이 눈으로 들어왔다. 끝물 딸기는서서히 잊힐 존재의 아쉬움이 짙어서인지 향이 더 진하고 달콤했다. 그러니 냄새에 끌려 힐끔 곁눈 질를 하게 했다. 그렇게 엿본딸기 가격표는 제법 저렴했지만 딱히 좋아하는 사람이없어 그냥 지나쳐 필요한 물건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카트를 밀고 있는 간단 씨옆에 바짝 붙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걷고 있다. 그때 마트 방송으로 우렁차게 딸기 타임 세일을 알려왔다. 1kg 2,900원이라고 했다. 내가 힐끗 지나쳐 본 가격이 5,980원이었는데 2,900원이라니 주부의 속성은 화끈한 세일에 곧바로반응했다. 그때까지도 생각에 없던 딸기잼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요즘 물가는 주부인 나를 자주 슬프게 했다. 평소 아무거나 군이 좋아하는 빵집의 딸기잼 380g이 7,000원이 훌쩍 넘으니 말 다했다. 예전에도 오천 원 지폐 한 장에 동전 몇 개를 보탤 때도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만 원을 내고도 손에 쥐는 거스름돈이 얼마 없다. 그러니 살 때마다 부담이 상당했다. 딸기 2kg만 사도 8,000원에 가까운 잼을 몇 병은 만들 수 있겠다는 머릿속 계산기가 빠르게 왔던 길을 되돌아 걷게 했고 다시 뛰게 했다. 그렇게 우르르 모여있는 사람들 틈에 내 손길은 빠르고 정확하게 두 개를 집어 계산해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아무거나 군은 벌써 기대가 컸다. 어릴 때 종종 깍두기랑 딸기잼을 나와 만들었는데 그게 그렇게 좋았다고 했다. 특히 딸기잼을 만들기 위해 조물조물 손으로 으깨는 작업은 물컹한 촉감이 재미있고 신기했다면서 말이다. 무엇이든 기대감이 클 때 휘리릭 해치워야 한다. 그럼 기쁨은 두 배 세 배가 될 수 있다. 그만큼 나의 몸놀림도 숨 가쁘게 이루어져야 한다. 장 봐온 것을 냉장고에 정리해 넣고 곧바로 딸기를 개수대에 쏟아부어 꼭지를 땄다.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고 마지막 헹구기 전 식초 물에 담가 둔다. 너무 오래 담가두면 딸기의 달콤함도 물속으로 사라지고, 물러지니 잠깐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깨끗한 물로 헹궈 채반에 받쳐 물기를 빼 큰 볼에 담아 준비했다.
빨간 딸기가 가득 담긴 큰 볼을 앞에 두고 자신 손보다 큰 비닐장갑을 낀 아무거나 군이 있다. 제법 크고 투박해진 두 손이 볼 아래위로 분주히 움직였다. 손길이 빨라질수록 사방으로 빨간 딸기 물이 튀겼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방바닥에 묻은 빨간색을 물티슈로 닦아 냈다. 이제 딸기의 형체는 빨간 즙 속에 사라졌다. 덩어리가 있는 잼을 싫어하는 아무거나 군이니 도깨비방망이로 한 번 더 휘리릭 갈아준다. 큰 냄비에 곱게 간 딸기즙을 넣고 미리 준비한 설탕을 넣어 제법 긴 시간 끓여 졸여준다. 잼을 만드는 동안은 한눈팔기 금지. 옆에서 보글보글 끓는 하얀 거품도 걷어내고 눌어붙지 않게 계속해 저어줘야 한다. 한 시간 반가량 딸기즙을 졸였다. 주걱으로 잼을 떨어뜨려 보니 걸쭉하니 딱 좋다. 이제 만든 잼은 식혀 미리 소독한 유리병에 옮겨 담아 냉장고에 넣으면 시중에 판매하는 잼보다 훨씬 덜 달고 새콤하기까지 한 맛있는 잼이 완성 됐다.
주부는 시간과 손이 몇 배는 가는 일이지만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려 손익계산을 하게 된다. 특히 고물가 시대에는 더 빠릿빠릿해진다. 그 덕에 새콤달콤한 딸기잼을 듬뿍 빵에 발라 먹을 수 있다. 이날 아침 우리 모자는 잼 부잣집에서 달콤하고 배부른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