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곧바로 손이 빠르게 핸드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했습니다. 시각은 오전 5시 3분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늦잠입니다.
저는 어두운 새벽을 깨우고 분주히 아침을 맞이하는 시골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요즘 말로 아침형 인간이 득실득실한 곳에서 살았단 거죠. 아주 어릴 때부터 이른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몸에 밴 습관입니다. 초등학교부터 스스로 일찍 일어나 아침을 맞이했던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제게 늦잠은 낯선 현상입니다.
어제 정기 진료를 위해 찾은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에게 제가 했던 말입니다.
"이번 한 달은 제 생애 가장 힘든 달입니다. 하루종일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 떨어지질 않습니다. 자고 일어나는 게 이렇게 힘든 줄 처음 경험했어요."
정말이지 이번 달은 제가 태어난 이래 가장 버겁고 힘든 몸상태입니다. 이러니 머리맡에서 빽빽 시끄럽게 울었을 알람 소리도 듣지 못했던 것이었죠.
그나마 다행입니다. 오늘은 아무거나 군의 학생 건강검진이 있는 날입니다. 며칠 전 받아 온 가정통신문에 따르면 아주 간단한 건강검진입니다. 우선 가정통신문에 함께 딸려 온 건강 조사를 위한 문진표를 미리 집에서 체크해 보냈습니다. 한창 성장기에 있는 학생들이니 신체 발달 사항을 계측하고 근. 골격 및 척추, 눈, 귀, 콧병, 피부, 구강 등 다양한 신체에 대한 건강검진을 실시한다고 했습니다. 단, 주의사항이 따라붙었습니다. <4학년 학생 중 비만이 예상되는 학생은 반드시 전날 저녁 9시 이후 금식>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아무거나 군은 비만이 예상되어 아침 공복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니 아침상을 따로 차리지 않아도 되니 저의 늦잠은 아무거나 군의 공복으로 상쇄가 되는 겁니다.
솔직히 설마 설마 했습니다. 코로나로 확찐자가 됐지만 비만까지는 아닐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걸려온 전화에 설마가 확신이 되었습니다. 아무거나 군의 조동(조리원 동기) A군의 엄마였습니다.
"후니는 건강검진 했어? 우리 애는 비만 판정받아 피 검사 했어. 식이조절 및 운동을 시키라는데 너도 알다시피 우리 애가 운동을 얼마나 많이 하냐? 그리고 군것질도 안 하지. 어떻게 더 체중조절을 위해 노력하라는 말이냐. 진짜!"
A군과 아무거나 군은 어릴 때 상당히 비슷한 부분이 많은 아이들이었습니다. 음식에 욕심이 없었고, 활동적이지도 않고 발육상태도 비슷했습니다. 다른 점을 찾자면 극도로 예민한 아무거나 군에 비해 상당히 온순한 A 었습니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잘 따라 했고 그걸 스스로 즐기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키 성장을 위해 많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태권도, 수영, 농구, 음악 줄넘기. 아무거나 군이 아마 이 모든 것을 소화했다면 말라깽이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암튼, 운동도 많이 하고 음식도 편식 없이 골고루 잘 먹는 최고 모범 어린이입니다. 그런 A인데 어디를 어떻게 더 신경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이었습니다. 여기서 아무거나 군과 A군은 현재도 키와 몸무게가 매우 유사합니다. 오히려 A군이 아무거나 군보다 몇 센티 더 커다고 했습니다. 이러니 아무거나 군도 비만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확신을 가지고 아무거나 군의 공복을 위해 저녁 9시부터 금식을 명령했습니다.
아침 등교하는 차 안에서 힘이 없고 말도 없이 뒷자리에 앉은 아무거나 군에게 배가 고프지는 않은지 물었습니다. 아무거나 군 왈 "그건 모르겠고 일단 피부터 뽑고 싶어요." 살짝 힘없고 겁먹은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습니다. 저녁에 무얼 먹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맛있는 저녁을 먹이고 싶었거든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짜장면이랍니다.
'그래 몸 안의 피를 뽑을 테니 새로운 피의 탄생을 위해 짜장면 정도는 먹어줘야지.'
저녁으로 짜장면을 약속하고 학교로 보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기 전 콜렉터 콜로 기분 좋은 목소리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엄마, 나 피 안 뽑아도 된데요. 비만 아닌가 봐요."
'뭐지. A군과 비슷한 키와 몸무게인데 아무거나 군은 비만이 아니라고'
내 마음에 비만인데 아니라니 뭐지? 하는 의심이 들었고, 비만이 아니라니 반갑기도 하고 기분도 좋았습니다.
하교하는 아무거나 군의 얼굴은 어느 날보다 더 밝고 환해 보였습니다.
"엄마, 짜장면 먹으러 가요."
'그래 피검사를 했던 안 했던 저녁으로 짜장면을 약속했으니 먹어야지'
"엄마도 아들이 피검사 안 해 기분 정말 좋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우리는 아무거나 군이 유일하게 좋아하는 중식당으로 갔습니다.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들어가니 아직 사람이 없어 붐비지도 않고 좋았습니다.
저는 가게를 들어가며 곧바로 짜장면과 짬뽕을 주문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저와 아무거나 군은 각자 책을 펼쳐 읽으며 '우리에게 매일이 기념일이다.' 생각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일 년 중 어린이날이면 마을 이장님이 경운기에 동네 아이들을 태우고 면소재지로 가 사주셨던 아주 특별한 음식이 짜장면이었습니다, 이런 음식을 아무거나 군과 저만의 성찬으로 즐길 수 있으니 이 또한 행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