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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크뚱 May 13. 2023

너의 진심은 어디 신상이야?

너에게 진심은 냄새일까? 색깔일까? 맛일까? 너무 궁금해.

5월의 날씨가 아주 변화무쌍합니다. 내 마음에도 5월이 찾았든 건지 시시각각 변해 적응이 힘드네요.

뚝, 축. 뚝, 축 앞선 음과 뒤따르는 음이 경쾌하고 얕게 깔린 추루룩 배경음은 운치를 돋웁니다. 어제까지 쨍한 햇볕에 살갗이 따가웠는데, 밤사이 잠든 해는 끝내 이 아침을 밝히지 않고 대신 비를 보냈나 봅니다. 또다시 비가 내리는 주말입니다.


엄마, 오늘 자리 바꿨어요. 이번에는 세로줄이 아니고 모둠을 만들었어요. 동그라미랑도 같은 모둠이에요.

동그라미 양과 같은 모둠이라는 말에 나의 내면 한 귀퉁이에 겨우 빈자리를 만들어 천천히 가라앉히고 있던 그러나, 미처 가라앉지 못한 감정이 빠르게 다시 떠오릅니다. 이럴 때 시간차가 얼마나 중요한지 또 한 번 느낍니다.

'뭐야! 선생님이 아무거나 군과 동그라미를 같은 모둠으로 만들었다고!'

아들, 이번 모둠은 어떻게 정했어? 선생님이 자리를 정해 주신 거야?
아니요. 친구들끼리 선택해 모둠을 정했어요. 저랑 동그라미가 갈 곳 없어 헤매고 있으니 세모가 구제해 줬어요.

휴~ 선생님께 섭섭할 뻔했는데 사실을 알고 나니 내 안을 부유하던 불편함이 잠잠해졌습니다. 얼마 전 아무거나 군의 담임 선생님께서 전화를 하셨더라고요. 아무거나 군이 학교 상담실에 상담을 신청했다는데 저는 알고 있는지? 알고 있으면 무슨 일인지? 담임으로서 대강 상황을 파악해야 할 것 같아 전화를 했다고 했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습니다. 끝내 엄마의 위로로는 아무거나 군의 아프고 외로운 마음을 녹이지 못했나 봅니다. 상담을 신청했다는 말에 며칠 전 일이 떠올랐습니다.


5월의 태양이라고 믿기 힘든 뭐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이글거림을 피해 그늘을 찾고 찾아 비집고 섰습니다. 해는 쨍해 눈부시게 밝은데 그에 반해 멀리서부터 보이는 아무거나 군의 얼굴에는 짙은 어둠이 느껴진 날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교문 앞에 선 저에게 아무거나 군보다 먼저 온갖 걱정이 품으로 파고들었습니다.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나? 친구한테 싫은 소리 들었나? 선생님께 꾸중이라도 들은 건가?'

이쯤 되면 사서 걱정이라는 말이 저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말이 아닐까 확신을 가져봅니다.

뒤늦게 저를 발견한 아무거나 군이 한달음에 뛰어와 품에 안겼습니다.

무슨 일 있었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슬퍼 보일까?

저는 최대한 걱정스러움은 숨기고 다정하고 부드럽게 물었습니다. 옛날 초콜릿 광고에서 처럼 아무거나 군은 웬만한 남성 못잖은 너른 제 품에 얼굴을 숨기고 있다 살짝 고개를 들어 올립니다. 역시나 눈 속에는 슬픔이 넘실대며 곧 큰 파도가 칠 듯합니다.

기분이 안 좋아요. 동그라미가 저한테 했던 말이 계속 생각나서 슬퍼요.


앞서 계속 등장하는 동그라미 양은 아무거나 군과 같은 반 여자 친구입니다. 올해 11살이 된 아무거나 군의 짧은 인생에 1/3 가량을 제법 가깝게 지내는 인연이기도 합니다. 둘의 관계는 상큼한 핑크빛이 꽁냥꽁냥한 남녀 사이가 아닌 앙숙 같기도 절친 같기도 애매함이 너풀거리는 모양새입니다.

 

아무거나 군이 1학년일 때 겨울에 즐겨 입었던 빨간 패딩이 둘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동그라미 양은 빨간 패딩을 입은 아무거나 군이 마치 빨간 사과 같았나 봅니다. '사과'란 별명을 짓고 불렀습니다. 나중에는 그 사과는 '썩은 사과'가 되어 다른 친구들도 쉽게 장난처럼 놀릴 때 부르기 시작했죠. 그때 아무거나 군이 많이 속상해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2학년은 다른 반이 되어 괜찮아지나 했으나 같은 방과 후 수업을 듣게 되면서 별명이 불리는 횟수만 줄었지 마음에 상처는 계속 얹어지고 있었나 봅니다. 요즘 아이들이 구사하는 언어가 제법 과격합니다. 동그라미 양도 그냥 보통의 어린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별생각 없이 아무거나 군에게 내뱉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뜨발놈, 새끼야' 등. 거친 언어는 여린 마음을 가진 아무거나 군을 쉽게 상처 입혔고 힘들게 했습니다.


처음의 저는 나름 여린 아무거나 군을 위해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감정 변화에 주의를 기울였고 그 마음을 공감했으며 충분한 대화도 나눴습니다. 그러나 부족했나 봅니다. 아무거나 군이 받은 마음의 상처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찾은 방법이 교내 상담실에서 상담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꽤나 힘들어했던 아무거나 군은 제가 걱정했던 것보다 수월하게 동그라미 양의 사과를 받아들였습니다. 정말 그렇게 해결이 된 듯했습니다. 그 후로는 동그라미 양이 사이좋게 지내자며 손을 내밀었고 친구가 되었습니다. 아무거나 군은 친구 사귀기는 힘들어해도 친구 되기는 정말 쉽습니다. 상대가 먼저 "나랑 친구 하자!"는 한마디면 됩니다. 어제까지 그 아이로 인해 힘들었던 건 쉽게 숨기고 친구가 되는 거죠. 동그라미 양은 아무거나 군을 제대로 파악했던 걸까요. 암튼, 그렇게 쉽게 친구가 됐고, 학교 생활의 대부분이 동그라미 양과 연결되어 갔습니다.


아무거나 군이 3학년일 때 첫 상담에서 선생님은 먼저 동그라미 양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선생님이 유독 눈이 많이 가는 아이들이라면서요. 수업시간과 쉬는 시간 대부분을 집요하게 아무거나 군과 함께 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그때 선생님의 걱정에 관심을 가졌어야 했다는 후회가 되지만요. 그래서는 안 됐습니다. 조금 거리를 두게 했어야 했습니다.

아무거나 군의 4학년 반 발표가 나고 동그라미 양과 같은 반이 되었다며 끝내 제 품에서 펑펑 눈물을 흘렸습니다. 순간 너무 당황했습니다. 주변에서는 미리 반 배정에서 둘을 분리시켜 달라고 엄마가 요구했어야 한다며 그러지 못한 저를 나무랐습니다. 정말 엄마로서 내 아이에 대한 마음을 세심하게 챙기지 못한 것 같아 미안했습니다. 그렇게까지 힘들어하는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나름 잘 지낸다고 생각했을 뿐이었죠.


아무거나 군은 선생님의 말씀은 절대 반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아이입니다.

엄마, 오늘 난 누구누구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 친구가 그럴 줄 몰랐거든요.
무엇 때문에 놀랐어?
아니, 선생님이 말씀하시는데 "왜요. 하기 싫은데요."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이 말을 듣는데 아, 이래서 고지식하다는 말을 하는구나 싶었어요. 이러니 상당실에서 성급하게 받은 맛이 제대로 들지 않은 풋사과가 점점 불편함이 되어 마음에 곰삭아 불쑥불쑥 올라오니 힘들었을 것 같아요.

아무거나 군의 성격을 좀 안다고 생각한 저는 한동안 이야기했습니다.

불편한 네 마음을 제대로 이야기해라. 어떻게 하면 네 마음이 괜찮아지겠니.

묻고 달래며 다독였습니다.


동그라미 양이 미안하다며 '옜다'하며 던져 주듯 받은 말은 아무거나 군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 수 없었겠죠. 종합장에 빨간 볼펜으로 이름을 굵고 진하게 쓰고 그 위에 낙서하듯 연필로 덧 입힌 다음 미안하다는 쪽지는 더했겠죠. 하지만 어디 Once upon a time 옛날 옛적도 아니고 너무 오래 길게 가지고 가는 아무거나 군의 감정이 버거운 건 사실이었습니다.


대충 이런 전후 사정을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은 알겠다며 될 수 있는 한 둘이 함께 부딪히는 상황을 만들지 않게 노력하겠다고 했습니다. 오래된 일이지만 아무거나 군의 해결되지 않은 마음이 힘들다고 하니 둘 다 마음 다치지 않게 해결하도록 노력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과 전화 통화 후 다음날. 어느 때보다 밝은 아무거나 군이 교문을 통과했습니다. 역시 웃는 얼굴은 상대도 밝게 만듭니다. 저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었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습니다.

네. 동그라미가 사과 편지를 써서 줬어요. 그래서 이제 마음이 괜찮아졌어요.

'뭐지. 뭐가 이렇게 쉽지.'

이번 편지는 진심이 느껴졌어?
네. 진심이 느껴졌어요.

진심이 느껴졌다는 아무거나 군의 말에 그동안 맘 고생하며 다독이고 달랬던 저의 마음은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너에게 진심은 어디 신상이냐? 어떻게 여태 느껴지지 않던 진심이 편지 두장에 너무도 쉽게 느낄 수 있지. 너에게 진심은 냄새일까? 색깔일까? 맛일까? 너무 궁금해지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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