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음식을 대하는 자세

무수분 수육을 만들며...

by 핑크뚱

방금 꺼낸 뜨거운 고깃덩이 하나를 도마 위로 올렸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얼굴을 간지럽히고 콧속으로는 고소하고 기름진 냄새가 훅 들어와 나를 기분 좋게 했다. 칼은 부드럽게 고깃덩이 안으로 들어가 가볍게 덩이를 해체했다.

냉장고를 뒤적거리며 당장 저녁에 해 먹을만한 재료가 있는지 확인했다. 채소 칸에 틀니 빠진 할머니 입술처럼 쪼그라든 사과 하나랑 알 배추가 있다. 사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으니 당장 저녁에 사용하라며 나를 협박이라도 하듯 울그락불그락했다. 머쓱해진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고기의 연육 작용에 탁월하다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그렇게 저녁 메뉴는 물러설 곳 없어 보쌈으로 정했다.

저녁 메뉴만 정했을 뿐인데 깨끗하게 씻은 알 배추 위로 적당한 크기의 잘 익은 고기 한 점이 포개졌다. 간단 씨가 좋아해 냉장고에서 떨어지지 않고 꽤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각종 장아찌 중 명이와 시원한 백김치까지. 여기다 직접 만든 고소한 쌈장을 마지막으로 올려 딱 한입 크기의 쌈을 만들었다. 최대한 입은 크게 벌리고 그 속으로 쌈을 밀어 넣는 상상이 절로 됐다. 그냥 생각일 뿐인데도 입안에 고기의 육즙이 팡팡 터지며 고소함이 앞장섰고 백김치의 시원함과 명이의 향긋하고 짭조름함이 어우렁더우렁 보태져 온몸으로 맛이 전해 지는 기분에 자연스럽게 군침이 돌았다.

메뉴가 정해졌으니 필요한 재료를 장만하기 위해 후다닥 장을 보러 갔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을 생각만으로도 한 달 넘게 진득하게 눌어붙은 잠이 일순 사라졌다. 그동안 고장 난 배터리처럼 채워도 채워지지 않던 몸속 에너지가 가득가득 차고 넘쳐흐르는 기분이다. 음식이란 이렇게 마법 같은 존재인가 보다.


보쌈에서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건 고기다. 간단 씨와 아무거나 군은 텁텁한 걸 싫어하니 나는 항상 삼겹살을 선호한다. 적당히 지방이 붙은 실한 놈으로 구매해 월계수 잎도 서비스로 받았다. 간단 씨는 쌈은 크게 크게 싸 먹는 걸 좋아하니 쌉싸름한 맛이 입맛을 돋우는 싱싱한 미나리도 한 단 카트에 실었다. 보쌈에 빠지면 섭섭한 무말랭이는 질기다며 싫어해 대신 항상 무생채를 준비한다. 그러니 무도 뿌리 쪽이 통통하고 초록색 부분이 넓은 것으로 하나 추가했다. 그 외 필요한 재료들을 카트에 포개 실고 실어 계산을 끝냈다. 장바구니 가득 담긴 재료들의 무게에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듯했으나 저녁상에 각각 재료의 매력을 최대한 끌어낼 생각을 하니 기대감이 고조되어 룰루랄라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우선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쪼글쪼글한 사과를 깨끗하게 씻었다. 요즘은 ‘햇’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감자, 양파, 마늘 등 계절 채소들이 많아 장을 볼 때 기분이 좋다. 그중 햇양파를 저렴하게 듬뿍 구매해 와 껍질을 벗겨 동글동글하고 조금 두툼하게 썰어 냄비 제일 밑바닥에 깔았다. 그 위로 얇게 저며 썬 사과 반쪽과 서비스로 얻은 월계수 잎도 올렸다. 삼겹살은 깨끗이 씻어 세 등분으로 나눠 그다음으로 올려줬다. 마지막으로 반쪽 남은 사과를 이불 덮듯 덮어 주면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는 여유롭게 고기가 익어가길 기다리며 시간을 즐기면 된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보쌈은 물에 삶는 방식을 버리고 무 수분 방식으로 만들고 있다. 과거의 나는 정이 넘치면 넘칠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줄 수 있는 한 푸짐하게 양껏 퍼주는 스타일이었다. 그것이 상대를 부담스럽게 할 거란 생각도 내가 상대에게 질척거릴 거란 생각도 애초에 없었다. 일방적인 퍼주기식 정 나누기는 끝내는 나 스스로 녹다운돼 나가떨어졌다. 아닌 척했지만 자꾸 기대하게 되고 안 주면 섭섭해하고 우울해하는 내 모습에 스스로 오만정이 다 떨어진 거다. 그때부터 음식도 과하지 않게 될 수 있는 한 깔끔한 방식을 선호한다. 그중 하나가 무 수분 방식의 보쌈이다. 물에 삶은 고기는 수분이 많아 질퍽해 썰 때 으스러지거나 기름기를 그대로 가지고 있어 느끼함도 더했다. 그에 반해 무수분 방식은 질척이지 않는다. 기름기는 쫙 빼고 육즙은 고기 안에 고이 간직해서 제법 단단해 썰기도 부드럽고 고소하고 담백하다.


이렇듯 음식도 점점 나와 닮아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좋을 때도 슬플 때도 우울할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아냈듯 음식도 여러 시도를 통해 적절한 방법을 찾는 과정이 필요하다. 융통성 없는 성격은 스스로 지쳐 세상과 담을 쌓을 수 있다. 음식도 한 가지 방식만 고집하는 것은 더 맛있는 맛의 세계를 경험하는 기회를 스스로 잃는 것과 같다.


나에게 음식은 새로운 세계에 당당히 함께하는 힘 있는 친구다. 도전을 통해 나에게 맞는 환경과 사람을 찾아가는 길에 지칠 때 새로운 음식의 맛이 에너지와 활력을 잃지 않게 도와준다. 음식은 이렇듯 내 인생을 무엇보다 값지고 즐겁게 해주는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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