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입니다. 멋쩍은 웃음이 났습니다. 아직 달콤하고 은은하며 쌉싸름한 냄새가 남아 기분은 좋습니다.조금 전저는염색을 끝냈습니다. 일명 커피 염색이랄까요.
요 며칠 삐죽삐죽 올라오는 흰 머리카락을 한 거울 속제가말을 걸어왔습니다.
염색할 거야? 언제 할 거야?
질문에 답을 찾기라도하듯 곰곰이 거울 속 제 모습을 쳐다봤습니다.다정한 눈빛을 보내서일까요. 이번에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흰 머리카락은 왠지 덜 미워보였습니다. 그러니 염색에 대한 생각도조금은옅어졌습니다. 예전 저는 염색된 머리카락을 힘차게 밀어 올리며싹을 틔우듯올라오는흰색에짜증이 났습니다. 마치 열심히 완성해 가던 그림에하얀색이 훼방 놓는 것같은 느낌이라보기 싫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은 달랐습니다.
근래에 생각지도 못한 크고 작은 사고와 복용 중인 약 때문에 종일 흐리멍덩한 저의상태에두려움이생겼습니다. 앞으로 사는 동안 어디에 넣어 보관하는지잊어버린 정신을 찾기 위해 매일매일을허비할 것 같은무섬증까지느껴졌습니다. 이런 현재의 제몸과 정신에변화가필요하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파릇파릇한 새순이 온몸을 덮을 새봄을 위해 앙상하고 헐벗은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추운 겨울의 나뭇가지들. 가지치기는 땅이 품고 있는 기운을 나눠가져도 실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선고처럼 고르고 골라 솎아내는과정이 필요합니다. 제 삶에도 가지치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찌 보면 지금 저의 바스러져 사그라질 것 같은 몸과 정신에 온전한 영양이 갈 수 있도록 조치가 필요하다는 판단 같은 거랄까요.
우선 육아와 결혼생활에 조금씩 지쳐가며 활기를 잃기 시작한 저를 구원해 줄 수 있다는힘을 강하게 믿으며 물보다 더 신봉했던 커피를 거부하기로 했습니다. 달콤하기도 짭조름하기도 매콤하기도 한 여러 가지 모습으로만날 때마다 옳은 선택임을 확인시켜 주며 좀처럼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주전부리와도 거리 두기를 시작했습니다. 간단하고 빠르게 배고픔의 늪에 빠지지 않게 제 배를 채우며 기쁨을 선물하던인스턴트와도 멀리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밥상머리에 항상 올라와 푸릇하고 허여멀겋던 얼굴로먹으라 강요하던 채소가 저는 너무 싫었습니다. 협박같이 느껴져 절교했으나 지금은화해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찾기를 게을리해 제대로 삐친 채소들이라 쉽게 친해지지 않지만 노력 중입니다. 또, 저를 위한 과일 구입도 시작했습니다. 과일을 싫어해 간단 씨와 아무거나 군이 먹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저의 입맛은 비싼 가격 앞에 주춤주춤 하기를 반복하다 발길 돌리기 일쑤였습니다. 이제는 그러지 않기로 했습니다. 텃밭에서 열심히 자라고 있는 토마토와 오이도 온전히 제 몫이 됐습니다. 지금 저는 저를 위한 채소. 과일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빠르게 줄넘기하듯 2주를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몸에 조금씩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흰 머리카락이 덜 도드라져 보인다는 겁니다. 오직 저의 착각일 수 있으나 스스로 믿기로 했습니다. 아니 일단 믿어보며 시간을 두고 관찰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렇다고 흰머리카락이 없는 건 아니니 염색이 필요하긴 했습니다. 그러다 오래전 유튜브로 시청한 커피 염색이 떠올라 시도했다 보기 좋게 실패했습니다.역시커피는 머리카락에 양보하면 안 되는 거였습니다.
채소. 과일식을 하고 처음 알았습니다. 양배추가 씹을수록 고소하다는 걸 말입니다. 토마토는 달콤하기도 살짝 짭조름하기도 해 간이 딱 좋았습니다. 아침의 사과는 장을 튼튼하게 해 줬습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채소. 과일을 먹으니 성격도 온수해지는 느낌입니다. 앞으로 꾸준히 섭취하며 몸과 정신의 변화를 기록해 보겠습니다. 어제보다 건강한 오늘을 꿈꿉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믿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