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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크뚱 Sep 14. 2023

도시락을 싸는 마음

나를 위하는 시간_두부양배추덮밥

어둠을 더듬으며 스위치를 찾았다. 갑자기 덮치 듯 확 들어온 형광등 불빛에 절로 눈을 찌푸렸다. 불빛은 일순간 어둠을 집어삼키며 밝음을 뱉어냈다. 아무도 깨어 있지 않은 새벽. 밤사이 내려앉은 어둠의 냄새가 퀴퀴하게 코끝으로 느껴졌다. 밖과 안의 경계를 명확히 했던 커튼을 걷고 꼭꼭 닫아둔 창문의 빗장도 벗기자 제법 가을이 묻어 있는 선한 공기가 빠르게 밤의 냄새를 걷어냈다.


내 몸 모든 관절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해 삐거덕대고 어기적거리며 냉장고로 향해 문을 열었다. 밤사이 차가운 냉기도 깊은 잠에 빠졌다 갑자기 들이닥친 침입자를 경계하며 내 얼굴로 냉기를 가득 뿜어냈다. 나에게 남은 마지막 잠까지 내쫓기에 충분한 차가움이다.


간밤 잠들기 전 나는 도시락 메뉴를 생각했다. 무얼 싸 갈까 고민하는 시간은 행복했고 다디단 잠도 선물했다. 정한 도시락 메뉴를 만들기 위해 차갑고 밝은 냉장고 안을 훑었다. 재료 하나하나를 챙길 때마다 간밤의 행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 기분이 좋아졌다.


메뉴는 두부양배추덮밥이다. 이틀 전 아들이 좋아해 가득 만들어 놓은 두부조림이 생각났고, 아침으로 샐러드와 저녁엔 두부양배추김밥으로 만들어 먹고 남은 양배추가 아직 사등분한 것 중 한 덩이가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매불망 내 손길을 기다리던 두부조림은 스테인리스 보관용기로 차갑게 식은 자신의 존재를 알려왔다. 양배추는 며칠째 찾지 않아 거뭇하고 시들해져 삐쳐 있다. 여기에 벌써 만들어 둔 고추다대기까지 꺼내 들었다.

모든 재료를 꺼내 손질해 싱크대 위에 올리고 프라이팬을 찾아 가스불에 올려 예열했다. 적당량의 기름을 두르고 다진 마늘과 다진 파를 넣어 노릇노릇하게 볶았다. 여기에 먹기 알맞게 썰어 준비한 한입 크기의 양배추를 넣고 파와 마늘 기름으로 달큼하고 고소함을 입혀 살짝 숨을 죽였다. 여기다 두부조림과 고추다대기를 넣어 한 번 더 볶다 굴소스와 간장으로 간하고 들깻가루로 풍미를 더 했다.

큼지막한 도시락에 갓 지은 솥밥으로 반을 나머지 절반은 두부양배추볶음으로 채웠다. 도시락안에 가득 들어찬 밥과 두부양배추볶음을 보자 절로 침이 먼저 입속을 가득 채우며 마중을 나왔다. 하지만 점심 도시락이니 마중 나온 침을 꼴깍 다시 삼키며 나는 고민했다. 누구도 밟지 않은 하얀 눈밭에 첫 발자국 같은 깨를 뿌릴까? 달무리 진 것 같은 계란 프라이를 올릴까? 한참 동안 행복한 고민을 하다 후자를 선택해 올렸다. 완성된 도시락은 내 마음으로 뿌듯함과 편안함도 데려왔다.

아프기 전 나는 솔직히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먹었다. 몸은 고단하지 않고 입은 즐거운 음식들로 내 속을 채우는 시간을 보냈다. 처음 병을 진단받았을 때 나는 슬펐고 화가 났다. 돌아가신 엄마가 오래 앓았고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고통과 싸우는 모습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엄마를 닮고 싶지 않았으나 뼛속까지 닮아 있어 더 슬프고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 제법 긴 시간 엄마를 원망했다. 그렇다고 이미 내 몸을 침범했점령하려 호시탐탐 하는 병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엄마의 굴레에서 허우적일 수만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나로 살아야 했다. 누구도 아닌 내가 내 몸을 챙기고 돌봐야 할 시간이 왔다.


우선 채소와 과일식을 시작했다. 뒤이어 건강한 도시락도 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 안에 쌓여 있던 엄마에 대한 원망이 조금씩 옅어지며 연민으로 변하는 걸 느꼈다. 그러자 한결 정신은 맑아졌 몸은 가벼워져 잃어버린 건강에 매몰되지 않는다.


지금, 현재의 나는 나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뜻하지 않게 진정한 내가 되는 시간을 선물 받았다. 이 시간을 앞으로도 더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며 살아갈 것이다. 나에게만 닥친 나쁜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나를 돌아보는 귀하고 소중한 시간이 됐다.


*채소 식탁, 김경민 저(래디시) 요리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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