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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크뚱 Oct 12. 2023

작은방

하지만 어느 곳보다 나를 따뜻하고 넓게 보듬는다.

바짝 마른 낙엽이 골목길을 배회하다 갑자기 들어선 나와 맞닥뜨리자 멈췄다. 담벼락 밑에 낀 이끼와 손이 닿으면 바스러질 듯한 낙엽이 함께 있는 곳은 왠지 더 낡고 쓸쓸해 보였다. 골목에 들어서 첫 번째 집을 지나 곧 나오는 두 번째 집도 지나치면 떼다 만 광고지가 대문에 그득그득 붙은 녹슨 철문이 아주 낡고 볼품없다. 마치 모습은 링 위에 올라선 권투 선수가 상대방으로부터 잽, 훅, 어퍼컷을 무진장 맞아 퉁퉁 부어 원래 얼굴을 잃어버린 듯한 모습과 다.    

 

그런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낡고 오래된 겉과 다른 안의 세상이 펼쳐진다. 햇볕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나는 듯한 백 자갈이 깔린 마당에 둥글고 큰 디딤돌이 딱 한 발짝의 간격만큼 S자로 놓여 있다. 그 옆은 담벼락을 따라 화단이 자리 잡았고 디딤돌을 성큼성큼 밟고 지나면 짙은 갈색의 데크가 깔린 제법 널찍한 안마당이 나온다. 오십 년을 훌쩍 넘어 희끗희끗 빛바랜 나이 든 주택이 반짝반짝한 눈망울을 가진 어린아이와 동거를 시작하기로 했으니 나름 깨끗하고, 단정하게 손질이 필요한 듯해 이사 오기 전 수리를 끝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흰색으로 통일된 신발장과 중문이 있다. 신발을 벗고 중문을 열고 들어서면 양옆으로 두 개의 방이 있고 정면으로는 짙은 회색의 싱크대가 놓인 일자 부엌이 보인다. 솔직히 주부인 내가 가장 좋아해야 할 곳이지만 대놓고 노출된 주방이라 내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싱크대 옆에 있던 방의 벽을 허물어 6인용 큰 식탁을 놓았더니, 마치 원래부터 같은 주방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차지 않았던 마음이 다소 채워지는 다.

     

이사 전 아파트에선 아들과 한 공간에서 함께 생활했다.  당시 초등학생이 된 아들의 잠자리 독립을 위해 방 두 곳을 우리 부부와 아들의 방으로 사이좋게 나눴다. 뭐든 버리지 못하고 모든 게 추억이라는 아들이 팔여 년을 모은 온갖 잡동사니가 한 가득히 있어 두 곳 중 상대적으로 큰 방을 아들의 방으로 정했다. 하지만 잠자리 독립은 좀체 무서움을 극복하지 못해 실패로 끝났, 여전히 아들과 우리는 한방에서 복작복작하게 모여 잠을 자고 있다.


자연스럽게 한 비게 됐고, 궂은날 잘 마르지 않은 빨래를 건조하거나 마치 간이역처럼 잠깐 거쳐 가는 짐들이 쌓이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나는 그동안 이미지만 기억하는 읽기를 했던지라 읽기 패턴의 변화를 시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오롯이 나만의 책 읽기 공간이 필요했고 작은방이 생각났다.


마루 느낌이 있는 장판과 밝은 회색 벽지를 발라 하얀 걸레받이로 어색하지 않게 연결한 두 평 남짓한 작은 방. 좁은 공간에 전 주인이 두고 간 옷장과 이불장이 한 면을 차지하고 있고 재봉틀 2대가 차지한 책상이 ㄱ자로 자리 잡고 있던 곳.      


재봉틀은 육아로 심신이 지쳤을 때 모두를 재워 놓고 깜깜한 밤에 홀로 깨어 영아인 아들 옷을 만들었고, 웃풍이 많던 오래된 아파트 방방마다 커튼도 만들어 달았다. 재봉틀을 돌리는 순간만큼은 온전히 나라는 존재를 느낄 수 있게 해 준 소중한 물건이라 고장 난 지 꽤 오래됐지만 여전히 자리를 톡톡히 차지하고 있다. 이곳을 서재로 만들기로 결정했으니 정리가 필요했다.


꽤 오래 방치돼 재봉틀 위에는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다. 미리 옷장 속을 정리해 해지고 낡은 옷을 버리고 비워낸 자리에 고장 나지 않은 한 대를 넣었고, 고장 난 것은 서비스를 맡기기 위해 상자에 넣어 포장해 뒀다. 재봉틀을 이사시키고 나니 제법 넓고 튼튼한 책상이 생겼다.


작은방에서 가장 햇볕 잘 드는 창문 앞에 자리를 책상에게 내어주고 식탁 의자 하나를 끌어와 놓으니 그럴싸한 서재가 됐다. 며칠 전 발이 많이 커진 아들의 새 신발을 넣어온 상자를 책꽂이로 만들어 좋아하는 책 몇 권을 꽂았다.     


옷장과 이불장을 배경으로 놓고 햇볕 잘 드는 곳에 자리 잡은 나만의 서재. 이미 좁은 방에 새 들어 살고 있는 물건들이 꽉꽉 들어찬 곳이라 갑갑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오히려 작고 좁은 공간이 외로운 나를 더 따뜻하게 했다. 햇볕의 나른함도 독서하기 좋은 나의 서재에서는 따뜻함으로 변신했다. 이제 나는 좋아하는 책들과 다정하게 연애하듯 읽는 시간을 보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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