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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크뚱 Dec 03. 2023

뜨거움 보다는 따뜻함으로

짝사랑

어둠이 짙은 새벽. 방문과 방문 사이를 힘겹게 비집고 나와 들린 아들의 목소리를 찾아 어둠을 더듬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있어 살포시 걷어내자 갇혀 있던 습기와 열기가 빠르게 새어 나왔다. 본능적으로 나의 손이 이마를 찾아 짚었다. 뜨겁고 축축했다.

아들, 아파서 엄마 부른 거야.


내 말에 뒤척여 눕는 몸짓이 둔하고 크다. 그때서야 어둠에 적응된 눈이 남편이란 걸 알아챘다.

여보, 어디 아파요?


입은 묻고 있지만 머리로는 제주도 여행 후 줄곳 몸이 좋지 않다고 했던 남편의 말이 생각났다. 하지만 내 안에 먼저 자리 잡은 서운함이 쉽게 남편의 말에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귓등으로 듣고 걷어차 버렸다.


일어나 체온계를 찾아 열을 재어보니 38.6도다. 결혼 후 열 오른 적이 없던 남편이라 놀랍고 낯설었다. 식은땀을 흘려 축축해진 몸이지만 입술은 바짝바짝 타는 듯 괜찮다고 힘겹게 입을 다. 상태를 보니 출근보다 병원으로 가야 할 듯해 내 마음을 이야기했지만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며 안 된다는 말을 내놓았다.


어릴 적 엄마는 내가 열나거나 입맛 없어하면 죽을 끓여 주셨다. 그 생각에 서둘러 방을 나와 부엌의 냉장고를 열었다. 주말을 지나와 냉장고 속은 허전했지만 일단 있는 채소로 죽을 끓이기로 결정했다.


우선 제철 맞은 무와 다시마, 북어포를 넣어 푹 끓여 육수를 우려냈다. 육수를 끓일 때 밑간을 먼저 하는 게 감칠맛이 좋으니 국간장도 함께 넣어 끓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구수함 뒤로 쿰쿰한 메주향이 콧속으로 파고들었고 뒤이어 짭조름함까지 들러붙으며 따라왔다.


채소는 단출하게 애호박과 양파 그리고 감자뿐이다. 먼저 이들을 껍질을 벗기고 깨끗이 씻어 잘게 썰어 준비했다. 냄비에 고소한 기름을 두르고 채소를 넣어 볶다 전날 씻어 불려둔 쌀과 참치캔도 하나 따서 기름을 제거해 함께 넣어 볶았다. 적당히 볶아진 재료에 끓인 육수를 넉넉히 넣어 눌지 않게 계속 저어가며 끓였다. 맛을 보니 삼삼하니 간도 적당하고 쌀과 채소가 어우러져 목구멍을 부드럽게 타고 넘어갔다.


큰 그릇에 죽을 퍼 담아 김가루로 고명으로 올려 상을 차렸다. 방으로 들어가 남편을 깨워 나왔다. 식탁 위에 올려진 죽그릇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힐긋 눈길 한번 주고 만다.

입맛 없어. 안 먹을래.


남편은 자신의 성격처럼 무미건조한 말 한마디를 남기고 서둘러 욕실로 들어가 씻는다. 갱년기에 진입해 하루에도 열두 번씩 온탕과 냉탕을 들락날락하는 요즘의 나다. 그 순간 남편을 향해 작게나마 타오르던 짝사랑의 불씨는 마치 식탁 위에서 식어가고 있는 죽 그릇처럼 차갑게 식어 사그라들 기세다.


새벽의 분주함에 요리의 열기까지 보태져 무더운 여름 이마와 코끝에 맺힌 땀방울 마냥 꼭꼭 닫아 둔 창문에 송골송골 성에가 맺혔다. 서둘러 뜨거운 열기를 밖으로 쫓기 위해 창문을 열자 겨울의 매서운 찬 공기가 먼저 내 안으로 스며들며 복잡한 머릿속의 생각들을 걷어냈다.


결혼 후 남편을 향한 내 사랑은 항상 뜨거웠고 활활 타올랐다. 하지만 권태기와 갱년기라는 복병을 만난 지금은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다.


하지만 여전히 나를 믿는다. 내 안에 남아있는 남편에 대한 외사랑의 불씨는 금세 작은 불쏘시개로도 따뜻하게 내 안을 다시 데울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확실히 존재한다. 그동안 너무 뜨거워 가까이 오기 힘들었을 남편이 따뜻한 온기에는 다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니 내 안의 뜨겁던 열기를 사그라트리는 시간이 지금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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