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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크뚱 Nov 26. 2023

사랑이 말라간다.

제발 내 안으로 여유가 들어와 주길

거무스름한 어둠이 낯선 하얀 세상을 데리고 . 텃밭과 데크를 뽀얗게 덮은 눈은 시리게 차가웠고 신기하게도 따뜻했다. 남쪽의 남쪽에서 11월 한복판에 소복이 내려 않은 하얀 눈은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순백의 은 곧 말간 얼굴을 들이밀 해가 쉬이 사라지게 할 세상이라 잠자던 아들을 깨워 온몸과 마음으로 가득가득 담게 했다.


갈색 네모난 상자를 열었다. 자갈과 흙이 담긴 비닐팩 2개와 커피찌꺼기(커피박)로 만든 앙증맞은 작은 화분이 들어있다. 그 안에 아침에 본 하얀 눈을 뭉쳐놓은 듯한 하얀 습자지에 돌돌 말린 별을 품은 듯한 다육이도 함께였다. 커피박 화분 아래는 물길이 될 구멍이 뚫려있다. 이곳으로 흙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거름망을 덮고 마사토를 1/3 가량 채웠다. 다시 그 위로 흙을 반쯤 덮고 하얀 습자지 이불에 폭 감싸인 다육이도 꺼내 흙 위로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조금씩  화분을 돌려가며 다육이 주변으로 흙을 골고루 덮어주고 마지막으로 마사토를 살짝 올려 마무리했다.     


아들과 함께 다육이 커피박화분 만들기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데려온 다육이는 햇볕 잘 드는 주방의 창가 자리에 올려놓았다. 먼저 그곳에 자리 잡은 먼지 먹는 틸란드시아 이오난사와 그 옆으로 개운죽. 알록달록한 색깔 모래로 꾸민 유리 화분의 다육이까지 모두 아들이 학교에서 데려온 아이들이다.


식물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적당한 일조량과 충분한 수분, 여기에 살랑살랑 바깥세상의 소식을 전해주는 바람까지 삼박자가 찰떡궁합을 이루어야 한다.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되는 장소로 부엌의 창가라 생각해 옹기종기 모아 놓았다. 그러나 생각만큼 무럭무럭 자라지 못하고 있어 고민이 다.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 데려온 이오난사는 크기가 미세하게 자랐을 뿐이고 개운죽은 잎이 조금씩 누렇게 변하고 있다. 예쁜 모래집을 가진 탱글 해야 할 다육이도 쪼글쪼글해 안쓰럽게 놓여 있다. 이렇듯 다소 부족하게 자라는 식물을 들여다보며 나는 도대체 부족한 게 엇이길래 생각만큼 튼튼하게 자라지 못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지난 주말 남편이 제주도로 2박 3일 여행을 다녀왔다. 불콰해진 낯으로 일요일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온 그의 빈손은 나를 언짢게 했다. 홀로 홀가분하게 떠난 여행에서 돌아온 남편이 온종일 분주한 육아로 지쳤을 나를 조금이라도 위하는 마음이 었다면 절대 빈손일 수 없다는 내 나름의 판단에서였다. 이런 마음에 혼자 서운해하다 울적해지는 찰나 불쑥 부엌 창가의 화분들이 내 눈으로 들어와 나의 심란한 마음을 다독인 날이었다. 


내 안에 사랑이 자라기에 너무 과한 기대를 상대에게 품고 사는 건 아닐까.


결혼 생활 내내  나름 마음의 흙에 거름을 섞어 사랑이라는 씨를 심었다. 햇볕이 잘 드는 곳으로 자리 잡아 충분한 물을 주고 바람이 자주 쉬어 갈 수 있도록 환기도 시켰다. 초록초록한 사랑 싹이 흙을 힘차게 밀어내며 얼굴을 빼꼼 내밀 땐 환희의 박수도 쳤다. 그 후로는 무럭무럭 튼튼하게 자랄 것 같던 사랑은 도통 변화가 없다.  


매일매일 매의 눈으로 싹의 길이를 측정하고 얼마 전에 준 물도 잊고 또 듬뿍 주고야 만다. 살랑살랑 놀러 온 바람도 혹시나 어린싹에 해가 될까 걱정이 앞서 창문을 굳게 닫아건다. 사이 싹이 조금씩 키를 키우며 순조롭게 자라는 듯하다 금세 초록의 얼굴빛을 잃고 잎이 누렇게 뜨거나 목이 타들어가듯 말라간다. 찬찬히 되짚어 보니 나에게 턱없이 부족한 것이 여유다. 충분히 기다려줄 여유가 없어 항상 조급했다. 결혼 농사도 마치 화초 키우기와 닮아 있다. 사랑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 여유롭게 기다려야 했으나 그러질 못했다.


지금의 나는 식물에 치명적인 과습처럼 남편에 대한 과한 기대로 사랑이 충분히 튼튼한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창가에 올망졸망 올려진 화분을 보며 생각했다. 내 안에 과한 기대를 조금씩 내려놓고 그 자리에 여유를 넣어보자. 천천히 여유가 충분히 내 안을 채운다면 사랑은 튼튼한 뿌리를 내리고 힘차게 잎을 위로 위로 올리며 꽃도 피고 열매도 맺을 거라 기대한다. 언젠가 윤기 흐르는 잎에서 알록달록 꽃으로 다시 상큼한 열매까지 맺는 그날을 기대하며 내 안의 기대를 버린 빈자리에 여유가 채워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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