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까지 샛노란 황금옷을 입고 뽐내던 길가의 은행나무가 매서운 겨울바람에 모든 것을 떨어뜨리고 순식간에 헐벗었다. 변화는 계절 앞에 당연한 일이나 예년보다 따뜻한 가을 탓에 멋진 황금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인지 아쉬움이 무척이나 컸다. 특히, 이날은 가까운 이가 세상과 이별했다는 부고 소식을 들은 날이라 잿빛 도시를 가리고 있던 황금옷이 순식간에 벗겨지며 앙상한 가지사이로 모습을 드러내 유난히 더 쓸쓸하고 덧없다 느껴졌다.
고인은 병을 진단받고 불과 한 달여의 시간만에 급작스럽게 세상과 작별했다. 살아생전 참으로 따뜻했던 고인을 장례식장에서 환한 웃음의 영정사진으로 조우하니 마음은 더 아팠다. 분향을 하고 상주들과 떠난 고인의 이야기를 하는 잠깐 동안 내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지만 작은 나의 슬픔을 상주들 앞에서 보이는 것이 죄송스러워 눈물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 내 옆에 꼭 붙어 선 아들은 낯선 죽음에 대한 슬픔보다 엄마의 눈물이 더 마음 아팠나 보다.
엄마, 많이 슬퍼요.
상주들 앞에서 나를 꼭 끌어안으며 동그란 눈이 그렁그렁해 계속 물었고 앙증맞은 손으로 내 눈물을 연신 닦아냈다. 비통한 마음이 클 상주분들 앞에서 기껏 엄마의 작은 슬픔에 크게 반응하는 아들의 행동이 민망하고 부끄러워지려는 순간이 있었지만 이내 떨쳤다. 아들 얼굴에서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마음과 불안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아들을 낳아 키우는 육아의 시간은 세상을 흑백 TV로 보고 있던 편협한 시각을 알록달록 다채로운 세상으로 볼 수 있게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다. 특히 감정에도 다양한 색깔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했다. 그 순간도 아들은 타인의 슬픔보다 먼저 자신이 사랑하는 엄마의 슬프이 더 크고 아프게 느껴졌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나와 아들은 확실히 달랐다. 나는 항상 모든 행동에 타인의 시선을 우선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나의 기분이나 감정 따위는 타인 앞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구겨진 휴지통 쓰레기 같은 존재로 만들며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항상 억울한 감정이 기본값으로 마음의 밑바탕에 깔려 있어 손해 보는 듯한 억울한 감정에 지배당하며 살았고 그 마음은 수시로 흘러넘쳤다. 빈 그릇에서 시작해도 다양한 감정을 담기에는 버거운데 이미 반이상 채워진 상태에서 시작했으니 힘든 건 당연했는지 모르겠다.
내 눈물을 연신 닦던 아들은 끝내 나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엄마의 슬픔이 조금씩 잦아들자 뒤늦게 고인을 떠나보내는 순간이 어린 자신에게도 벅찬 슬픔으로 다가왔나 보다. 고인을 떠나보내는 슬픔을 마주하기 전에 먼저 엄마의 눈물과 맞닥뜨린 아들. 조금씩 감정이 누그러든 엄마의 단단한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 멈춰있던 자신의 슬픔이 밀어닥쳐 소리 내어 운다. 그 순간 우리는 서로를 따뜻하고 단단하게 안으며 함께 슬퍼했다. 타인의 시선 보다 우리들의 슬픈 마음에 충실히 반응했다. 아들 덕분에 마음껏 슬퍼했고 고인을 애도했다. 그래서 고인을 떠나보내는 시간이 조금은 덜 힘들었는지 모르겠다.
다음날 아침,
엄마, 너무 행복해요.
보름달 같은 웃음을 하고 입안 가득 아침밥을 먹으며 맛있어 행복하다는 아이. 이렇듯 아주 작은 것에도 행복해하고 감사할 줄 아는 아들처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모습이 좋다.
타인의 눈치를 보며 자신 감정을 몰라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가 가장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는 내가 되길, 아들이 되길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