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흐려 구름이 가득한 하늘이었다. 누가 살짝만 톡! 건드려도 와르르 빗물을 쏟아 낼 것 같은 그런 날이었어. 마흔일곱의 나는 둘이 짝을 이룬 22년에 들어오면서 시작한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있어.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 도서관으로 향했어. 도착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기어이 차창으로 ‘토도독’ 빗 방물을 묻히기 시작하더라. 이 날따라 소리 없는 빗방울이 노래라도 부르는 듯한 착각에 빠져 기분 좋게 운전했어.
두 갈래로 길게 땋은 빨간 머리, 주근깨 투성이 얼굴, 바다를 품은 듯 푸른 눈을 가진 앤. 시월 모임의 선정 도서가 열넷의 내가 너무도 사랑했던 <빨간 머리 앤>이라 그랬나 봐. 그 시절 나는 스스로 엉뚱하고 귀여운 앤을 닮았다는 착각에 빠져있었잖아. 주근깨 많은 얼굴이며 다소 마른 몸이 그랬어. 지금 생각해도 절로 미소 지어지는 행복한 시절을 지나 온 것 같아 기분 좋아지네. 열네 살의 나는 떨어진 나뭇잎이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모습만 봐도 까르륵 웃음 터트리는 때 덜 묻은 하얀색 도화지 같은 영혼을 가졌던 것 같아. 마흔이 훌쩍 넘은 지금의 나는 하고 싶은 것보다, 하기 싫은 게 많아진 살짝 무기력해진 것 같아 씁쓸하네.
어린 그 시절 나는 키다리 아저씨, 들장미 소녀 캔디, 열네 살 영심이 등 다양한 만화와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사랑에 풍덩 빠져있었지. 그 많은 만화 중 유일하게 아는 주제곡이 <빨간 머리 앤>이잖아.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그 시절 자주 흥얼거리며 콧노래 부르던 노랫소리가 지금의 내 귀가에도 경쾌하게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독서 모임의 회원은 대부분 육십 대 중반이야. 그들은 세상에 근심, 걱정의 거센 파도를 용기 있게 헤치고 지나와 나보다는 조금 더 많이 편안해 보여 함께하는 시간이 좋아. 열네 살의 내가 중년의 나를 생각할 때도 같은 마음이었지 않았을까? 그런데 호기심이 철철 넘치고, 각양각색의 감정을 엉뚱한 듯 표현하는 사랑스러운 앤을 함께 이야기한다는 게 솔직히 걱정됐어. 우리만의 소녀답고, ‘앙’ 깨물면 과즙이 줄줄 흐르는 새콤달콤함을 알지 못할 거란 걱정이 앞섰거든. 그런데 정말 나 혼자만의 착각 같은 오지랖이었어.
이날 사회자는 자연스럽게 <빨간 머리 앤> 책 이야기로 진행을 이끌었어. 모두 같은 책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참으로 신기해 집중하며 들었어. 앤은 육십 대의 그들이나 사십 대의 나에게 주근깨투성이에 빼빼 말랐지만 한결같이 예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었어. 이야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열네 살의 순수하고 엉뚱한 내가 자꾸 소환되더라. 마흔 중반의 내 이야기는 열넷의 내가 하는 이야기 같은 착각에 자연스럽게 빠졌어. 그만큼 앤은 30년이 넘는 우리의 시공간을 바짝 당겨와 같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오는 힘이 느껴졌어.
생각나니? 앤의 라이벌 길버트가 빨간 머리를 홍당무 같다며 놀리자 몰래 산 염색약으로 자연스러운 갈색 머리칼을 상상하며 염색했는데 초록색으로 물들었던 장면 말이야. 나 역시 친구들이 못난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게 싫어 엄마가 일하러 간 틈에 군데군데 벗겨져 초라한 엄마의 화장대에서 가짓수 몇 안 되는 화장품으로 덕지덕지 발라 얼굴의 부끄러움을 숨기려 했잖아. 이뻐지는 마지막 보루인 듯 쨍한 빨간색으로 입술을 색칠하기까지 했었지. 그때 거울에 비친 낯선 내 모습에 초록색 머리카락으로 염색된 앤 만큼이나 당혹스럽고 두려웠잖아. 지금 생각해도 황당하고 웃프네.
시간을 훌쩍 건너와 지금의 내가 열넷의 나를 보니 무척이나 사랑스럽고 대견하다. 그때의 나는 전혀 몰랐지. 그러니 힘들고 지친 삶에 실망하지 말고, 무게에 주저앉지 않았으면 좋겠어.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사랑받아 마땅한 열넷의 나이니깐. 그리고 빨간 머리 앤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사랑해줬어 너무나 고마워. 그 덕에 중년의 내 마음이 아직도 간질간질하고 설레는 사랑이 존재하니 말이야. 힘내고,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