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추적추적, 비는, 반쯤 닫혀있는 블라인드 뒤, 창문 너머,
홀로 외롭게 서있는 가로등 아래로 내리고,
옷을 모두 벗어버려 이젠 황량한 나무 가지들 사이에도 내린다.
가로등이 뿜어내는 희뿌연 불빛,
깊어가는 어둠을 잡아끌며 아침이 오는 걸 방해하고 있다.
비가 오면,
잊었던 기억들은 다시 생명을 얻고,
뒤늦게 찾아오는 슬픔의 기운, 깊은 고독의 바다.
생각을 버리고 물처럼 흐르듯 살아야지.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낳고,
그 다른 생각의 생각은 또 다시 생각의 생각의 생각을 낳으니.
모든 생각의 낙엽들,
마음속 의식에서 떨어내어 가을 낙엽처럼 쓸어 모으고,
성량에 불을 붙여 하나도 남김없이 태워 버리자.
태어난 존재의 피할 수 없는 운명적 고독,
그냥 견뎌내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사랑에 서투른 자는 감당해야 하는 것이 더 많을까.
아픈 기억은,
그 위에 새로운 기억들을 쌓아 올리면 더 이상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할까.
무의식의 바다에 존재하는 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지도 모르지만.
다시는 과거의 기억이 기억을 기억하지 못하게 할 것.
비 내리는 밤, 밤은 깊어가고 또 하루가 지나가고 세월 따라 모두가 흘러간다.
사랑에 항상 서투른 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