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에서 말가죽에 싸여 돌아온다
"모든 이야기는 끝가지 계속 가면 죽음으로 끝난다. 그 사실을 숨기려 하는 자는 진정한 스토리텔러가 아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전통 호피장막도(虎皮帳幕圖)의 도상 위에 조선시대 장군의 투구를 배치하여, 피와 영광이 교차하는 '전쟁'이라는 무대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그림 앞에 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호피무늬 장막입니다. 바람에 살짝 들린 듯 양옆으로 펄럭이는 그 장막이 묘하게 무대의 막처럼 느껴졌습니다. 영광과 비극이 번갈아 오르는 무대. 그리고 장막이 내려오면 모든 것은 사라지겠죠.
그 무대의 중앙에는 붉고 화려한 투구가 놓여 있습니다. 금빛 용 문양의 투구 장식과 선홍색 장식 술이 흘러내리는 이 투구는, 한눈에 보아도 무소불위의 지위와 권위를 온몸으로 발산합니다. 하지만 투구의 주인은 여기 없습니다. 투구만이 고요히 탁자 위에 놓여, 한때 그것을 쓰고 전장을 누볐을 누군가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그 부재(不在)가 오히려 더 큰 존재감을 만들어냅니다.
투구 뒤로 녹슨 한 자루의 검이 있습니다. 승리를 향해 휘둘렸을 칼날들이지만, 지금은 무기라기보다 묘비 앞에 꽂힌 표식처럼 보입니다. 전쟁터에서 세운 공훈은 결국 이렇게 박제된 유물로 남는 것일까요.
興盡悲來(흥진비래)
흥이 다하면 슬픔이 옵니다. 탁자 왼편에는 백자 주전자와 술잔이 놓여 있습니다. 전쟁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수단이자, 전투가 끝난 밤의 쓸쓸한 위안. 그 옆에는 담뱃대와 작은 담배 그릇이 놓여 있습니다. 술과 담배 — 이 덧없는 쾌락들이 삶의 유한함을 외면하는 모든 시대의 오래된 방식이었습니다.
오른편에는 화려한 청화백자 접시에 탐스러운 복숭아들이 담겨 있습니다. 민화에서 복숭아는 장수(長壽)와 풍요의 상징이죠. 삼천 년에 한 번 열리는 서왕모의 복숭아를 먹으면 불로불사한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복숭아는 어쩐지 머지않아 물러질 것만 같습니다. 영원할 것 같던 것들도 시간 앞에서는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 복을 기원하던 전통 도상을 조용히 전복시키는 장치입니다.
탁자 맨 오른쪽 등잔은 이미 불이 꺼져 있습니다. 심지까지 다 타버린 그 모습이 담담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합니다. 한 존재의 생명이 다했음을. 우리가 그토록 좇는 명예의 불꽃도 언젠가는 꺼질 것임을. 그리고 탁자 왼쪽 끝에는 말을 탄 작은 무사 꼭두가 서 있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투구의 주인을 호위하며 마지막 여행을 묵묵히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그림의 배경은 깊고 짙은 어둠입니다. 화려한 바깥세상과 어두운 내부의 대비. 영광의 무대는 늘 그 이면에 이런 어둠을 품고 있는 것이겠죠.
馬革裹屍(마혁과시)
전장에서 말가죽에 싸여 돌아온다는 뜻으로,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하는 무인의 결의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결의와 충성도 탁자 위에 홀로 남은 투구 앞에서는 한없이 쓸쓸해집니다. 승리를 찬양하는 대신 모든 존재가 결국 직면할 죽음이라는 보편적 운명을 향하는 그림. 그것이 이 투구와 장막이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호피무늬 장막은 그 모든 귀한 것들을 어둠 속으로 조용히 거두어들이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