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블리오 Nov 17. 2023

심연의 우울과 덮어놓은 상실감 앞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데뷔작.


책을 읽는 동안에도, 다 읽은 뒤에도 머릿속에 물음표만 남았다.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또 한 번 다시 읽는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읽고 나니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안개처럼 흩뿌려진 묘한 상실감이 책의 기저에 어둡게 깔려있다. 시커멓게 집어삼키는 모양새가 아니라 애매한 잿빛 상태로 칙칙하고 텁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의 나열. 단편적인 글 조각들이 성기게 얽혀있다. 책이 어딘가 비어있고 촘촘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함께 담겨있어야 할 감정이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요동치는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다. 정확히는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너무 담담해서 그가 말하는 모든 것들이 마치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두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두운 꿈만 꾸지, 더욱 어두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꿈조차 꾸지 않는단다." (p.13)
"거대하다는 건 때때로 사물의 본질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려." (p.111)


구차하지 않고, 질척이지 않는 감정들.

침묵. 공허함. 무감각. 내려놓음. 초연함. 건조함. 단조로움. 무관심. 수동적. 무표정 등


가장 음울한 심연의 감정은 격렬하게 요동치지 않는다. 다가오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흘려보낼 뿐이다. 악쓰고 소리치는 격정적인 내면보다 초연해진 내면이 훨씬 닳아있다. 조금만 흔들려도 생채기를 낼 것처럼 날카롭기보단 무뎌져서 뭉툭해진 모양새에 가깝다.




찬찬히 되짚어 읽다 보면 책 속에 가려진 감정들이 보인다.

하루키는 상실의 슬픔을 초월한, 그 너머의 무언가를 담아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사실 아직도 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다. 왜 쓰였는지 모르겠는 조각들이 많다. (조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150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책이 40개의 소챕터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챕터’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지는 않지만. 짧은 건 두 줄짜리도 있었다.)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이지만, 차분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쓴 글처럼 느껴졌다. 빠져들어 읽었지만 누군가에게 읽어보길 권할 것 같지는 않다. 아직 내가 책의 깊이에 가닿지 못했나 보다.


묘하게 심오하고 어두운 책인데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니 모든 사람은 마음 한편에 덮어놓은 상실감을 조금씩 품고 사나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