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그저 상징일 뿐이었다 - <소망 없는 불행>

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65번.

by 이태연

<< 페터 한트케 >> - 201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로 희곡 <관객 모독>으로 명성을 얻었답니다.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자살한 어머니의 죽음을 겪은 후 쓰여진 글입니다. 작가는 어머니의 일생을 페미니즘 요소를 담아 담담하게 표현해냅니다.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객관성을 지켜내며 글을 써내려간 작가 정신이 읽혀지는 작품입니다.



* 경악의 순간들은 언제나 아주 잠깐이고, 그 잠깐이란 시간은 (중략)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다시 모른체해 버릴 순간이다.


*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가능성이란 없었다. 사소한 불장난, 몇 번의 킬킬대는 웃음, 잠깐의 당혹감, 그러고 나서 처음 짓게 되는 낯설고 침착한 표정, 다시금 찌들린 집안 살림이 시작되고 첫아이가 태어난다. (중략) 마을의 여자 아이들이 많이들 하고 노는 말잇기 놀이도 <피곤하고/기진하고/병들고/죽어가고/죽고>라는 식으로 여자의 삶을 나타냈다.


* 소망 없이 사는 게 어떤 식으로든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으며, 소망 없이 사는 걸 모두가 불행하게 생각했다. 다른 삶의 형태와 비교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고 더 이상 욕망도 없었을까?


* 그녀는 성(sex)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고, 일상의 사소함 속에 자신을 묻어버렸다. 그녀는 외롭지는 않았으나 스스로를 기껏해야 반쪽일 뿐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나머지 반쪽을 채워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늘하다



* 집에서 그녀는 <엄마>였다. 남편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보다는 그렇게 부르는 때가 더 많았다. 그녀는 그러도록 놔두었고 그 명칭은 그녀와 남편의 관계를 잘 나타냈다. 그녀에게 그는 결코 사랑스런 남편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 <가난>이라는 단어는 아름답고, 왠지 고귀한 단어 같았다. 그 단어를 보면 마치 옛 교과서에서 풍기는 이미지들, 즉 가난하지만 청결하다는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중략) 궁핍에서 오는 비참함은 구체적인 말로 묘사될 수 있지만 가난은 그저 상징일 뿐이었다.


* 그녀는 평생토록 집안일만 하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삶도 상상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만일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힌트를 주었더라면 그녀는 제대로 그 생각에 도달했을 것이다. 모든 것은 <가졌더라면>, <이었더라면>, <되었더라면>과 같이 가정(suppose)이었다.


* 장점이란 것도 대개의 경우 그저 단점이 없는 것에 불과했다.


* 어느 것에도 끝이 있을 성싶지 않았다. 오늘이 어제였고, 어제의 모든 것이 예전대로였다.



냉랭하고



* 그녀는 모든 책이 자신의 삶을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고 독서를 하면서 생기를 얻었다. 독서를 함으로써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을 감싼 껍데기로부터 벗어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법을 배웠다. 책을 읽을 때마다 그녀는 더욱더 많은 생각을 떠올렸다. (중략) …문학은 그녀에게 자신에 대해 생각하도록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이제 너무 늦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걸려 있는 바지의 후줄그레해진 엉덩이 부분과 구겨져 있는 무릎 부분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혐오감. <나도 한 인간을 우러러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늘 경멸해야만 한다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 그들은 참된 의미에서 함께였던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에 멀어지지도 않았다.


* 단순히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고통스러웠다. (중략) 그녀는 진통제를 몽땅 입안에 털어놓고 거기에다 갖고 있는 신경안정제도 모두 먹어치웠다. 그녀는 생리대까지 끼운 위생 팬티 두 개를 더 껴 입고, 머릿수건으로 턱을 단단히 묶고는 전기 담요도 켜지 않은 채 무릎까지 내려오는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 그녀는 몸을 주욱 뻗고 양손을 가슴 위에 포갰다.


* 공포라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부합하는 것이다. 즉 의식 속에 있는 진공과 같은 공포, 생각은 막 형성되어 가는데 생각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는다. 그러고 나면 그 생각은, 허공 속을 걷고 있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된 만화 영화의 인물처럼 땅 위로 추락해 버린다.



냉랭하다



<< 엄마의 편지 >> - 사랑하지 않은 남편의 폭력과 가난 속에서도 여자로서의 소임을 다하며 가정을 이끌어나갑니다. 그러나 소망 없는 불행한 삶을 살아내다 결국 정신과 치료까지 받게 되고 51세의 나이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맙니다.



* 기분 좋은 생각을 할 때마다 문이 저절로 닫히는 느낌이다. 그러면 나는 다시 혼자서 마비된 생각 속에 빠지지. 난 정말 기분 좋은 일을 쓰고 싶지만 그럴 만한 일이 없구나. (중략) 난 이제 시간이 있어도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외로움이 뼛속까지 사무쳐도 난 누구와도 말하고 싶지 않단다.


* 난 내 자신과 얘길 한다. 그건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지. 때론 내가 기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난 어딘가로 떠나고 싶지만 어두워지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할까 봐 겁이 나.


* 12월 1일이면 네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온다. 매주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와 어떻게 같이 살 수 있을지 상상이 안 된다. 각자 다른 구석을 볼 테니 외로움은 그만큼 더 커질 거다.


* 드디어 평화롭게 잠들게 되어 아주 편안하고 행복하다.







<페이지 생략><주인장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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