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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 <인간 실격>

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103번.

by 이태연



다섯 번의 자살 시도 끝에 39살에 세상을 떠난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이 작품은 남다른 고독감에 시달리는 한 남자가 사회에 융화되고자 끊임없이 애쓰다가, 차츰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작가는 소름끼치도록 치밀하게 인간의 모습을 꿰뚫어보며, '인간이란 무엇일까?' 질문을 해옵니다.



<< '나'의 말 >> - 소설의 화자입니다. 주인공 요조의 모습이 담긴 세 장의 사진과, 그가 쓴 세 개의 수기로 이 작품을 구성해나갑니다.


* 아이는 전혀 웃고 있지 않다. 그 증거로 아이는 양손을 꽉 쥐고 서 있다. 사람이란 주먹을 꽉 쥔 채 웃을 수는 없는 법이다. (···)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괴상한 표정의 소년을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 소위 '죽을 상' 이라는 것에도 뭔가 좀 더 표정이라든가 인상이라든가 그런 것이 있을 텐데. (···)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기묘한 얼굴의 남자를 역시 본 적이 한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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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조의 말 >> - 주인공입니다. 태어날때부터 다른 '인간들'을 이해할 수 없어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지만, '익살꾼'을 자처하며 인간들에게 다가가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번번이 좌절되어 버리고, 술과 담배, 여자로 피폐한 삶을 살아가던 중, 한 여자와 동반자살을 결행하고 혼자 살아남게 됩니다. 이후 순수한 여인 요시코와 결혼을 하게 되지만, 아내가 겁탈당하는 장면을 보게 되고, 자살미수와 알코올 중독, 마약중독으로 정신병원에까지 가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외딴 시골집에서 쓸쓸히 죽음을 기다리는 '인간 실격자'가 되고 맙니다.


* 인간은 먹기 위해 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돈 때문에 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


*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천 번에 한 번밖에 안 되는 기회를 잡아야 하는 위기일발의 진땀 나는 서비스였습니다.


* 사람과 접할 때면 끔찍한 침묵이 그 자리에 나타날 것을 경계하느라 원래는 입이 무거운 제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익살을 떨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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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지의 사람'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비참한 패자, 또는 악덕한 자를 지칭하는 말 같습니다만, 저는 태어날 때부터 음지의 존재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 세상에서 떳떳하지 못한 놈으로 손가락질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다정한 마음이 되곤 했습니다.


* 저는 자진해서라도 죽으려고 진심으로 결심했습니다. 그날 밤 저희는 가마쿠라의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 여자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 아무하고도 교제가 없다. 아무 데도 찾아갈 곳이 없다.


* 내가 얼마나 모두를 무서워하는지. 무서워하면 할수록 남들은 나를 좋아해 주고, 남들이 나를 좋아해 주면 좋아해 줄수록 나는 두려워지고 모두한테서 멀어져야만 하는···.


*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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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 필요에 따라 얼마간은 뻔뻔하게 행동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 끔찍해져야 할 '세상'은 저한테 아무런 해도 가하지 않았고, 또 저도 '세상'에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 저는 점차 세상을 조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상이라는 곳이 그렇게 무서운 곳이 아니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호리키는 내심 저를 제대로 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단지 나를 죽어야 할 때를 놓친 쓸모없고 몰염치한 바보의 화신, 말하자면 '살아 있는 시체' 로밖에는 생각하지 않았고, 내가 호리키의 쾌락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것만을 이용하면 그뿐인 '교우'였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저라도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습니다.


*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언뜻 그 생각이 머리 한쪽 구석을 스치자 흠칫했습니다. 만일 저 도스토 씨가 죄와 벌을 유의어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반의어로 병렬한 것이었다면? 죄와 벌. 절대 서로 통할 수 없는 것. 얼음과 숯처럼 융화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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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신뢰는 죄인가요? 상대방 남자는 저한테 만화를 그리게 하고는 몇 푼 안되는 돈을 거드름을 피우며 놓고 가는, 삼십 세 전후의 무지하고 몸집이 작은 상인이었습니다. (···) 저는 어째서인지 그 상인에 대한 증오보다도 처음 발견했을 때 큰 기침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저한테 알리러 다시 옥상으로 돌아온 호리키에 대한 증오와 노여움이 잠 못 드는 밤이면 부글부글 끓어올라 괴로워했습니다. 용서할 것도, 용서 받을 것도 없었습니다. (···) 요시코가 더럽혀졌다는 사실보다도 요시코의 신뢰가 더럽혀졌다는 사실이 그 뒤에도 오래오래, 저한테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큰 고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 요시코만큼 비참하게 능욕당한 여자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 그 때문에 내 정수리는 정통으로 얻어맞아 빠개졌고, 목소리는 쉬어버렸고, 머리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새치가 나기 시작했고, 요시코는 평생 절절매며 제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 제 얼굴은 극도로 천박해졌고, 저는 아침부터 소주를 마셨고, 이빨은 흐물흐물 빠지기 시작했고, (···) 언제나 저한테서 시선을 돌리고 절절매고 있는 요시코를 보면, 이 녀석은 전혀 경계라는 것을 모르는 여자니까 그 장사꾼하고 한 번만 그랬던 게 아니지 않을까. 또 호리키는? 아니 혹 내가 모르는 사람하고도? 하며 의심이 의심을 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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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행. 이 세상에는 갖가지 불행한 사람이, 아니 불행한 사람만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그러나 그 사람들의 불행은 소위 세상이라는 것에 당당하게 항의할 수 있는 것이고, 또 '세상'도 그 사람들의 항의를 쉽게 이해하고 동정해 줍니다. 그러나 제 불행은 모두 제 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항의할 수 없었고, (···) 끝도없이 점점 더 불행해지기만 할 뿐 막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없었던 것입니다.


*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저는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으로 봅니다.












<페이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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