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부가 시를 훔치고 다닌다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104번.

by 이태연





영화 <일 포스티노>의 원작입니다. 젊은 우편배달부가 칠레의 유명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시를 통해 우정을 쌓고, 시를 통해서 의식을 갖추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재치 넘치는 대화, 해학적인 성 묘사 등이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다음은 작가의 말입니다. "나는 이 세계에서 자기 자신만의 시적 언어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어디선가 살해되고 박해당할지라도, 나는 이 책을 통해서 그 잔혹한 괴물과 맞서 싸우고 싶었다."



<< 마리오 히메네스의 시선 >> - 주인공으로 우체부입니다. 네루다에게 우편물을 배달하던 중, 우연히 그의 시를 읽게 되면서, 시를 이용해 베아트리스와 결혼에 성공하게 됩니다. 네루다와 우정을 쌓아가며 그의 시집을 읽게 되고, 집회에서 네루다의 시를 낭송하며 시와 민초를 잇는 역할을 하며 자신도 시인으로 변신합니다. 그러나 네루다가 죽게 된 후 연행되어 실종됩니다.


* 마리오는 (···) 언젠가는 용기를 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일상 송가>를 들고 다녔다. 그렇게 한없이 책을 끼고 다니며 만지작거렸다. 또 자신에게 콧방귀도 뀌지 않는 소녀들에게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려고 광장 가로등 아래에서 걸핏하면 책을 바지 위에 놓았다. 그러는 사이 아뿔싸! 책을 그만, 그만, 그만······ 몽땅 읽어버리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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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마리오는 네루다의 시를 꽤 많이 외우게 되었다. 그러나 시를 이용해 베아트리스를 꾀어보려 했을 때, 칠레에서 가장 두려운 기관과 맞닥뜨렸다. 바로 딸 가진 어머니였다.


* 비틀즈의 <우체부> 멜로디가 응접실에 퍼졌다. 그러자 뱃머리 장식들이 움찔움찔, 병 속의 돛단배들이 출렁출렁, 아프리카 가면들이 이빨을 으드득으드득, 응접실 돌들이 들썩들썩, 나무에 홈이 쩌억쩌억, 의자의 은 세공이 너울너울, (···) 푸른 말이 다그닥다그닥. 휘트먼 시의 고색창연한 기관차가 기적을 울렸다.


* "글이란 음미해야 하는 거예요. 입 안에서 스르르 녹게 해야죠."


* 꼭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어쩜 이리도 삶이 요지경일까 하는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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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정오 국영 방송국이 스톡홀름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에 감사하는 네루다의 모습을 저녁에 방영한다고 예고했을 때, 마리오는 온 동네가 두고두고 기억할 뜨르르한 잔치를 벌이기 위해 돈을 빌려야 했다.


* 우유 장수의 당나귀 방울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닭도 울지 않았고, 하나뿐인 가로등불도 아직 켜져 있었다. 하지만 마리오는 이미 네루다 집 앞을 지키고 있었다. (···) 발가락이 시리다 못해 아팠다. 그러나 시인의 두툼한 눈꺼풀이 창가에 나타나 수많은 날 동안 꿈에 그리던, 보일 듯 말 듯한 그 미소를 선사하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 마리오는 <파블로 네프탈리 히메네스 곤잘레스의 연필 초상>이라는 시로 일등상에 도전하겠다는 지고한 결정을 내렸다. 마리오는 응모 요령을 철저히 따랐다. 별도의 봉투에 조금은 창피해하며 보잘것없는 약력을 적고 마지막에 '시 낭송 다수'라고 썼다. 단지 약력을 포장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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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체국 문 앞에는 군인 한 명이 추위로 몸을 웅크리고 담배를 피우다가, 마리오가 열쇠를 딸그랑거리며 옆으로 오자 경계 태세를 취했다. (···) 마리오는 분류함의 우편물을 뒤적여 네루다에게 온 다섯 통의 편지를 끄집어냈다.


* 오늘 선생님께 스무 통도 넘는 전보가 왔어요. 가져오려 했지만 집이 포위되어 있어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죠. 제가 한 짓을 용서해 주셔야 해요.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 전보를 다 읽고 외웠어요. 구두로 전해드리려고요. (···) 첫 번째 전보를 외웠다. "아옌데 대통령 죽음에 공분과 애도. 정부와 국민은 시인 파블로 네루다 씨에게 망명지 제공, 스웨덴."


* 1973년 9월 23일 네루다는 산타마리아 병원에서 최후를 맞았다. 사경을 헤매는 동안 산크리스토발 언덕 기슭에 있는 네루다의 산티아고 집은 약탈당하고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죄다 박살이 나고, 수도꼭지를 틀어놓아 집이 잠겼다. 조문객들은 그 난장판 속에 네루다의 시신을 안치해 놓고 밤을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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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사 부인의 말 >> - 주점을 운영하는 베아트리스의 엄마입니다. 지극히 현실적으로 마리오의 접근을 차단하려 애쓰지만, 결국 사위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 번드르한 말처럼 사악한 마약은 없어.


* 다른 사람 말을 몰래 베끼는 걸 뭘라고 부르는지 아니? 바로 표절이야! 너의 마리오는 네게 갖가지 메타포를 나불거리고 다니다 감옥에 갈 수도 있어. 내 직접 시인에게 전화해서 우체부가 시를 훔치고 다닌다고 말해 주지.


* 침대에서는 대통령이든 신부든 공산당 시인이든 똑같아.


* 닭대가리 같으니! 지금은 네 미소가 한 마리 나비겠지. 하지만 네 젖통이 어루만지고 싶은 두 마리 비둘기가 될 거고, 네 젖꼭지는 물오른 머루 두 알, 혀는 신들의 포근한 양탄자, 엉덩짝은 범선 돛, 그리고 지금 네 사타구니 사이에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는 고것은 사내들의 그 잘난 쇠몽둥이를 달구는 흑옥 화로가 될걸! 퍼질러 잠이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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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루다의 말 >> - 인기 없는 시인이지만, 시와 정치를 양립시키고자 노력합니다. 우체부인 마리오와 우정을 이어나가던 중 노벨 문학상까지 받게 됩니다. 그러나 쿠데타가 일어난 날 새벽,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자신의 편지를 챙겨 온 마리오와 재회한 후 병으로 죽게 됩니다. 실제 네루다는 죽기 직전, "사람들을 쏴 죽이고 있어. 쏴 죽이고 있다고." 라며 처절하게 절규했다고 합니다.


* 자네 논리대로라면 셰익스피어를 햄릿 아버지 살인범으로 체포해야겠군. 가련한 셰익스피어가 그 비극을 쓰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햄릿 아버지에게는 아무 일 없었을 테니.


* 저는 (···) 가장 버림 받은 시인이었고, 저의 시는 지방적이고 고통스럽고 비를 머금고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인간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결코 희망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 시는 헛되이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 이봐, 편안히 죽을 수 있게 절묘한 메타포나 하나 읊어 보게.


* 하늘의 품에 휩싸인 바다로 나 돌아가노니

물결 사이사이로 고요가

위태로운 긴장을 자아내는구나

새로운 파도가 이를 깨뜨리고

무한의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질 그때까지

어허! 삶은 스러지고

피는 침잠하려니.

















<페이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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