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한번이라도 좋으니 와줘요 - <설국>

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61번.

by 이태연




일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으로, 일본적인 세밀함과 서정성이 담겨있는 작품입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눈에 파묻힌 산골 마을 '설국'이라는 상징적 세계를 배경으로 삶의 허무함과, 덧없는 사랑이 얼마나 강렬하게 다가오는지를 그려냅니다. 명문장으로 손꼽히는 이 소설의 서두는 일본어의 독특한 운율과, 독자들도 주인공과 함께 터널을 빠져나와 새하얀 눈의 세계로 나온 듯한 느낌이 고스란히 전달되어집니다. 다음은 퇴고 전의 서두입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넘어서자, 그곳은 설국이었다."

<< 작가의 시선 >> - 서양무용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이 전부인 한가한 여행자이며 주인공인 시마무라는, 한적한 눈의 마을에서 야성적인 고마코와 청순한 요코, 두 여자의 매력에 빠져들게 됩니다.

*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건너편 자리에서 처녀가 다가와 시마무라 앞의 유리창을 열어젖혔다. 차가운 눈 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 철도의 관사인 듯한 가건물이 산기슭에 을씨년스럽게 흩어져 있을 뿐, 하얀 눈 빛은 거기까지 채 닿기도 전에 어둠에 삼켜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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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방의 눈 얼어붙는 소리가 땅속 깊숙이 울릴 듯한 매서운 밤 풍경이었다. 달은 없었다. 거짓말처럼 많은 별은, 올려다보노라니 허무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고 생각될만큼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별무리가 바로 눈앞에 가득 차면서 하늘은 마침내 머언 밤의 색깔로 깊어졌다. 서로 중첩된 국경의 산들은 이제 거의 분간할 수가 없게 되고, 대신 저마다의 두께를 잿빛으로 그리며 별 가득한 하늘 한 자락에 무게를 드리우고 있었다.

* "당신이 처음 이곳에 온 지도 벌써 3년째예요." 그 3년이 채 안 되는 동안 세 번 왔고, 그때마다 고마코의 처지가 바뀌어 있었던 것을 시마무라는 생각했다.

* "사람은 참 허약한 존재예요. 머리부터 뼈까지 완전히 와싹 뭉개져 있었대요. 곰은 훨씬 더 높은 벼랑에서 떨어져도 몸에 전혀 상처가 나지 않는다는데." 하고 오늘 아침 고마코가 했던 말을 시마무라는 떠올렸다. 암벽에서 또 조난 사고가 있었다는 그 산을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곰처럼 단단하고 두꺼운 털가죽이라면 인간의 관능은 틀림없이 아주 다르게 변했을 것이다. 인간은 얇고 매끄러운 피부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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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감은 공예품 가운데 수명이 짧은 편이긴 해도, 소중하게만 다루면 50년 이상 된 지지미도 색이 바래지 않은 상태로 입을 수 있지만, 인간의 육체적 친밀감은 지지미만한 수명도 못 되는 게 아닌가 하고 멍하니 생각하고 있으려니,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고마코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시마무라는 움찔하여 주변을 돌아보았다. 피곤한 탓인가 싶었다.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잊은 듯, 오래 머물렀다. 떠날 수 없어서도, 헤어지기 싫어서도 아닌데, 빈번히 만나러 오는 고마코를 기다리는 것이 어느새 버릇이 되고 말았다. (···) 눈 내리는 계절을 재촉하는 화로에 기대어 있자니, 시마무라는 이번에 돌아가면 이제 결코 이 온천에 다시 올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 여관 주인이 특별히 꺼내준 교토 산 옛 쇠주전자에서 부드러운 솔바람 소리가 났다. 꽃이며 새가 은으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솔바람 소리는 두 가지가 겹쳐, 가깝고 먼 것을 구별해 낼 수 있었다. 또한 멀리서 들리는 솔바람 소리 저편에서는 작은 방울 소리가 아련히 울려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시마무라는 쇠주전자에 귀를 가까이 대고 방울 소리를 들었다.

* 고마코가 시마무라의 손을 잡았다. 시마무라는 돌아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줄곧 불을 지켜보는 고마코의 약간 상기된 진지한 얼굴에 불길의 호흡이 일렁거렸다. 시마무라의 가슴에 격한 감정이 복받쳐왔다. (···) 시마무라의 손도 따스했으나 고마코의 손은 더 뜨거웠다. 왠지 시마무라는 이별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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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마코의 말 >> - 눈의 고장 설국 한적한 온천장에서 살고 있는 게이샤입니다. 잠시 머물렀다가 떠날 게 분명한 여행자인 시마무라를 열정적으로 사랑합니다.

* ···당신이군요. 1년 만이에요. 1년에 한번 오는 사람인가요?

* 사랑받았다는 게 뭔가요?

* 부인이 읽어도 되는 그런 편지 따윈 쓰지 않아요. 구차스러워요. 눈치 봐가며 거짓말할 필요 없잖아요.

* 1년에 한번이라도 좋으니 와줘요. 제가 여기 있는 동안은 1년에 한번, 꼭 와주세요.

* 당신은 절 좋은 여자라고 하셨죠? 떠날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하신 거예요? (···) 헤어지는 게 무서워요. 하지만 어서 가버려요.
















<페이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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