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치는 한가한데 인생은 늙어가니 - <금오신화>

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204번.

by 이태연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입니다. 그러나 '최초'라는 수식어는 문학사적인 단편적 서술에 의거했기에, 실제 이 책의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는 독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 작품의 창작시기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는데요. 김시습이 경주 금오산에서 칠년을 머물렀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이 시기에 작품을 썼고 금오산의 이름을 따서 <금오신화>라 했을 거라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다섯 편의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칫 '귀신과의 사랑을 다룬 허무맹랑한 옛날이야기'로 치부되어질 수 있지만, 비현실 세계를 다루고 있음에도 당대 소외된 지식인의 고뇌를 현실적으로 담아냅니다.


1435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시습은 신동으로 이름을 떨쳐 세종대왕에게까지 소개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과거를 준비하던 중, 세조가 왕권을 찬탈했다는 소식에, 세상을 탄식하며 책을 불사르고 승려의 행색으로 세상을 떠돌게 됩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재능과 포부를 펼칠 기회를 놓쳐 버린 자신을, '방외인(方外人)' 이라 칭하며 기이한 행적을 일삼았다고 하네요.




20181015_113201.jpg 애달파라, 세월은 빨라 - <금오신화>





【 만복사에서 저포놀이를 하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 - 남원의 노총각 양생이 만복사 부처님과 윷으로 내기를 하여, 그 절에 은거(隱居)하는 죽은 처녀를 배필로 얻게 됩니다. 이후 결혼도 하지 않고 속세를 떠나버립니다.


* 만복사는 이미 퇴락하여 (···) 행랑채만이 쓸쓸히 남아 있을 뿐이었고, 행랑이 끝나는 곳에는 아주 협소한 마루방이 있었다. 양생이 여인을 유혹하여 그리로 데리고 가자 여인도 주저하는 빛 없이 따라갔다.


* 양생은 그곳에서 사흘을 머물렀다. 그곳에서 누린 즐거움은 인간 세상의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 아무래도 인간 세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얼핏 스쳐 갔다. 하지만 양생은 여인과 정이 깊이 들어 더 이상 생각하거나 염려하지 않았다.


* 애달파라, 세월은 빨라 / 마음속엔 번민만 가득 / 등불은 사위어 가고 은 병풍은 나지막한데 / 홀로 눈물 훔친들 누가 위로해 줄까.

20231116_151442.jpg <금오신화> 주석






【 이생이 담 너머를 엿보다.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 - 개성에 사는 이생과 그의 아내 최랑이 홍건적의 난으로 헤어졌다가, 난이 평정된 뒤 다시 만나 살게 되지만 최랑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 복사꽃 나뭇가지 한 줄기가 담장 너머로 휘어져 나와 눈앞에서 한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생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그넷줄에 대나무가 매달린 채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이생은 그 줄을 타고 담을 넘었다. 마침 달이 동산 위에 떠올라 꽃 그림자가 땅 위에 가득하니 맑은 향기가 사랑스러웠다. 이생은 자기가 신선 세계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 나쁜 인연이 바로 좋은 인연이었던가 / 맹세의 말이 마침내 이루어졌네 / 임과 함께 작은 수레 끌고 갈 날이 어느 때일까 / 부축받고 일어나 꽃비녀를 추스르려네.

20231116_151933.jpg <금오신화> 주석



* 창과 방패가 눈에 가득한 싸움터 / 옥이 부서지고 꽃도 흩날리고 원앙도 짝을 잃네 / 여기저기 흩어진 해골을 그 누가 묻어 주랴 / 피에 젖어 떠도는 영혼 하소연할 곳 없어라.

20231116_154141.jpg <금오신화> 주석





【 부벽정에서 취하여 놀다.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 - 개성의 상인 홍생이 대동강 부벽루에서 고국의 흥망을 탄식하는 시를 지어 읊던 중, 천상의 선녀가 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선녀를 못잊어 병이 들게 되고, 어느날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꾼 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 임금님 계시던 궁궐에는 가을 풀만 쓸쓸하고 / 돌아드는 돌층계에 구름 덮여 길마저 희미해라

/ 청루 옛터에는 냉이 풀 우거졌는데 / 담장에 잔월 걸린 밤 까마귀만 우는구나 / 풍류 즐기던 옛일은 티끌이 되었고 / 적막한 빈 성엔 납가새 풀만 가득하네 / 오로지 강 물결만 옛날처럼 울며 울며 / 도도히 흘러 서쪽 바다로 향하누나.


20231116_150340.jpg <금오신화> 주석


* 좋은 술 한 동이로 취해 본들 어떠리 / 풍진 세상의 일일랑 마음에 두지 말자 / 만고의 영웅들도 티끌이 되었으니 / 세상에 남은 것은 죽은 뒤의 이름뿐이라네.

20231116_150719.jpg <금오신화> 주석





【 남염부주에 가다.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 - 부처를 믿지 않는 박생이 염주부에 다녀오는 꿈을 꾼 후, 인간사의 공간과 시간 등 세상의 모든 것에 달관한다는 내용입니다.


* 박생은 일찍이 <일리론一利論> 이라는 글을 지어서 자신을 경계했는데 이는 이단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대략은 이러하였다. ' 나는 일찍이 천하의 이치(理致)는 하나일 뿐이라고 들었다. 한 가지란 무엇인가? 두 이치가 아니란 뜻이다. 이치란 무엇인가? 천성(天性)을 말한다. 천성이란 무엇인가? 하늘이 명한 바다. (···) 이 이치를 따르면 어디를 가든지 불안하지 않지만, 이 이치를 거슬러서 천성을 어기면 재앙이 미치게 된다. (···) 천하에 어찌 두 가지 이치가 있겠는가? 저 이단의 설을 나는 믿지 않는다.


* 임금이 대답하였다. " ··· 조상께 흠향하는 것은 근본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고, 육신(六神)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재앙을 면하기 위해서요. 모두 사람들로 하여금 공경을 다하게 하려는 것이지 귀신들에게 형체가 있어서 함부로 인간에게 화와 복을 주는 것이 아니오. 다만 사람들이 향을 사르고 슬퍼하면서 마치 귀신이 옆에 있는 것처럼 할 뿐이오. 공자가 '귀신을 공경하면서도 멀리 하라.' 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오."


* 박생이 눈을 떠 보니 책은 책상 위에 내던져 있고, 등잔불은 가물거리고 있었다. (···) 박생이 죽던 날 밤 이웃 사람들의 꿈에 어떤 신인이 나타나서 이렇게 알려 주었다. "네 이웃집 아무개가 장차 염라대왕이 될 것이다."




20181015_121533.jpg 천하의 이치(理致)는 하나일 뿐 - <금오신화>






【 용궁 잔치에 초대받다.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 - 고려시대의 한생이 초대를 받아 용궁으로 들어가서 문재(文才)를 발휘하고 용왕의 융숭한 대접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꿈에서 깬 뒤 세상의 온갖 이익들을 포기하고 자취를 감추어버립니다.


* 소리는 파도에 부딪치고 / 곡조는 청풍명월에 나부끼네 / 경치는 한가한데 인생은 늙어가니 / 살같이 빠른 세월이 서글프구나 / 풍류는 꿈결 같아 / 기쁨이 다하니 번뇌가 일어나네

20231116_145659.jpg?type=w773 <금오신화> 주석



* 세월이 흘러가도 사람들은 모르나니 / 고금의 세상사가 너무 바삐 지나누나.

20231116_145434.jpg?type=w773 <금오신화> 주석














<페이지 생략><주인장 사진입니다>

32466684279.20230711115238.jpg?type=w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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