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핑크와 살몬 핑크가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
중년여자가 자리에 앉자 전철 안이 환해졌다. 여자의 패딩 점퍼도 바지도, 운동화도 모두 핑크였다. 핑크빛 임산부용 좌석과 여자가 하나로 뭉뚱그려져 커다란 핑크 덩어리로 떠올랐다. 사람들의 시선이 여자에게로 일제히 쏠렸다. 그러나 여자는 개의치 않고 잠을 청하려는 듯 눈을 감았다. 옆자리에 있던 아들을 쿡 찌르며 속삭였다. “야 저 아줌마 진짜 대박이지? 핑크로 도배를… 완전 솜사탕이다 솜사탕” 그러나 아들은 “자기가 좋아하면 입는 거지 뭔 상관인데요?” 시크하게 한마디 던지고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씨~ 미적분 너무 어려워.”
“미적분 같은 건 수학전공자들한테나 필요한 거 아냐?”
“우린 이제 영혼 없이 문제만 빡세게 풀어대야 되는 거임?”
회색교복을 입은 아들이 똑같은 교복을 입은 친구와 입시학원 자료를 보며 두런댔다. 초록땡땡이가 박힌 회색 넥타이와 진회색 조끼, 밝은 회색 자켓과 바지, 비슷한 헤어스타일이 마치 쌍둥이처럼 닮아있었다. 아들은 인 서울 대학에서(절대 S대학교는 아니란다)컴퓨터를 전공한 후 로봇 관련 사업을 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래퍼가 되는 게 꿈이었던 아들의 친구는 인 서울 의대에 합격하면 오피스텔로 독립시켜주겠다는 부모님의 설득(?)에 의대로 진로를 수정했다고 했다. 문제는 둘 다 수학실력이 3등급정도 밖에 안 된다는 거였다.
아들은 내신점수 따기 유리하다는 이유로 특성화고 입학설명회 자료들을 열심히 날라대기 시작했다. 처음엔 잠깐 저러다 말겠지 했다. 그러나 학교에 직접 찾아 가 입학원서를 받아왔다는 담임선생님의 전화에 아차 싶었다. 아들이 평범한 궤도를 이탈할 것만 같아 걱정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러던 중 검정고시로 내신을 잡겠다고 입학을 망설였던 아들의 친구가 일반고에 가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아들도 흔들리는 것 같았다. 이때다 싶어 학교 분위기상 일반학교보다 수십 배는 더 열심히 해야 된다더라. 공부랑 담쌓은 애들도 많이 간다더라 등 온갖 안 좋은 예들만 뽑아 세뇌시키듯 겁을 줬다. 결국 아들은 원하던 특성화고등학교 대신 일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아들이 일반 고등학교 학생이 되자 안전한 울타리 속으로 들어간 듯 안도감이 느껴졌다. 이제 불안감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한편으론 <성적이라는 등급>속으로 밀어 넣어 버린 건 아닌지 마음이 짠했다. 이론상으로는 아이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울타리역할을 해주고 싶었다. 딱딱한 제도의 틀에서 벗어나 어디로든 뻗어나갈 수 있는 상상의 세계를 제공해주고 싶었다. 남들과는 좀 다르게 ‘아이만의 색깔’로 자라도록 맘껏 밀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교를 가는 모습으로. 군대를 가고 취업이나 사업을 하는 모습으로, 30대엔 결혼을 해서 아이를 키우는 모습으로…. 출생, 대학 입학, 취업, 결혼, 자녀양육 등등으로 그래프 화 된 생애주기표처럼 단계별로 착착 커나가길 바라고 있었다. 아이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장사를 하거나,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거나, 알바를 전전하며 산다고 할 때 “그래 너만 행복하면 되니까 맘대로 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저 <남들처럼>순탄하게 자라나길 바라고 있었던 거였다.
전철이 서자 여자가 가방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핑크덩어리가 각각 따로 분리되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의자의 핑크와 점퍼의 핑크, 바지의 핑크, 운동화의 핑크가 서로 각기 달랐다. 운동화는 진한 핑크였고, 임산부용 좌석은 하얀색 사람모양무늬가 규칙적으로 찍혀있는 밝은 빨강 느낌의 핑크였다. 점퍼는 진 핑크였고, 바지는 아주 연한 살몬 핑크였다. 채도와 농도에 따라 나누어진 칼라 북을 보는 듯 핑크와 살몬 핑크가 뚜렷하게 구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