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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연 May 25. 2022

눈빛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었다 -


  내가 그 눈빛과 마주친 것은 인왕산 정상쯤에서였다. 혼자 산행 중이었고, 평일이어서 인적이 뜸했다. 바위절벽들 사이 계단참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데 시뻘건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투명한 봄 햇살 아래서 화려하게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한 여자의 빨간색 한복치마였다. 잘못해서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절벽 끝으로 떨어져버릴 듯 여자는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그런데 여자 옆으로 한 남자가 더 있었다. 하얀색 한복차림의 남자는 색색의 깃발을 하늘에 대고 흔드는 중이었다. 묘한 풍경이었다. 호기심에 내 발걸음은 어느덧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때 남자가 고개를 홱 돌려 나를 쏘아보았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식은땀이 흐르며 위압감과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축축하고 습한, 뇌 속을 헤집어 내 생각들을 끄집어 내 온 세상에 까발릴 것만 같은, 뼛속까지 꿰뚫어 버릴 듯 쏘아보는, 어둡고 탁한, 서늘하고 차가우면서 강한 눈빛이었다. 그동안 내가 저질렀던 수많은(?) 죄들이 살을 비집고 나오듯 온몸이 바짝 죄어들었다. 벌떡이며 뛰는 심장과 후들대는 두 다리를 진정시키며 조심스레 뒷걸음질 쳤다.

 

  내려오는 내내 그 눈빛이 계속 뒤 따라 오는 것 같았다. 그동안 사진이나 TV에서 봤던 살인자의 핏기어린 눈빛, 사기꾼의 교활한 눈빛, 술과 마약에 찌들어 풀어져버린 몽롱한 퇴폐적인 눈빛 등이 파노라마처럼 계속 떠올랐다. 으스스했다. 굿을 하는지 어디선가 둥둥둥둥 약하게 치는 북소리까지 들려왔다. 길가 바위 위에 군데군데 놓여있는 붉은 팥 무더기에도 귀신이 붙어있을 것만 같아 식은땀이 났다. 영험한 산이라 전국의 무속인들이 기를 받으러 온다더니 산 전체가 몽롱한 기운에 휩싸여 있었다. 온갖 기분 나쁜 탁한 눈빛들이 내 앞에서 어른거렸다. 한시라도 빨리 산을 벗어나고 싶었다.

 

  음험한 기운이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것 같아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달리는 중이었다. 어디선가 하아~ 하아~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라 보니 다행히 등산객이었다. 군청색 두건을 쓴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스틱을 짚고 힘겹게 올라오고 있었다. 인적 드문 산, 좁은 길에서 맞닥뜨린 낯선 남자와 눈을 맞추기가 왠지 겁이 났다. 남자의 등산화에 시선을 고정한 채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그 남자도 같은 방향으로 비켜섰기에 하마터면 서로 부딪힐 뻔 했다. 경사가 심한 밧줄난간 쪽을 피해 길 옆 바위쪽으로 다시 올라섰다. 이때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리고 남자의 눈빛을 보고 말았다.


  좀 전에 봤던 무속인 처럼 눈빛이 강하지 않아 슬쩍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깊은 구멍이 뻥 뚫린 듯 텅 빈 눈빛에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삶에 지친 멍하고 공허한 눈빛이었다. 남자가 고개인사를 남기고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굽은 등과, 나무젓가락처럼 바짝 마른 다리가 금방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스틱에 온 몸을 지탱해 앓는 소리를 내며, 휘청휘청 산을 오르는 남자의 뒷모습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왠지 큰 병을 이겨내는 중인 듯 보였다. 갑자기 가슴 정중앙으로 바람이 휙 지나갔다. 기분이 잿빛으로 침잠해갔다. 돌덩어리가 매달린 듯 두 다리가 척척 감기며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갈증으로 목이 바짝바짝 타올랐지만 하산을 서둘렀다. 빨리 이 무섭고 무거운 산을 벗어나고만 싶었다.

 

  쫒기듯 산을 내려오자 긴장이 풀려 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뒤를 쫒던 습하고 탁한 눈빛도, 가슴을 아프게 했던 슬픈 눈빛도, 뱅뱅 돌며 정신을 몽롱하게 했던 빨간 치마도, 붉은 빛 팥 무더기도, 둥둥 북소리도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았다. 벤치에 앉아 느긋하게 물을 마시고 거울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닦다가 내 눈을 보게 되었다. 아니 내 눈빛을 보게 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로 얼굴을 보아왔으면서도 눈빛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건 처음이었다.  내 눈빛을 정확히 읽어낼 수가 없었다. 왠지 어색하고 낯설었다. 그동안 누군가를 처음 볼 때 제일 먼저 그 사람의 눈빛부터 봐 왔었다. 눈빛이 맑지 않은 사람은 왠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다. 내 눈빛도 억지로 꾸미지 않은, 세상사 계산들이 섞이지 않은, 탱글탱글 살아있는, 따뜻한 ‘좋은 눈빛이길 바랐었다.

 

  거울을 더 가까이 들어 내 눈빛을 계속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봐야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산에서의 긴장과 우울함 때문인지 겁에 잔뜩 질린 불안한 눈빛처럼 보이기도 했다. 억지로 입 끝을 올려 웃는 표정을 지어보았다. 그러나 마음의 불안함이 다 가시지 않아서인지 웃어도 어색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눈이 점점 시려오다 눈물까지 핑 돌았다. 눈을 감아 보았다. 그리고 노래를 흥얼거려보았다. 제법 따스한 3월의 봄바람이 살랑이며 귓가를 스쳐지나갔다.


  잠시 후 눈을 뜨고 다시 산을 올려다보았다. 흐리지만 연푸른색으로 빛나는 하늘, 봄 햇살에 기지개를 켜는 초록 나뭇잎들, 웅장하게 솟아있는 바위들이 평화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 어디에도 불안함이나 우울함은 없었다. 무속인도, 등산객도 모두 자기만의 삶에서 나온 눈빛을 보여준 거였을 텐데, 내가 괜히 불안해하고 우울해했던 거였다. 내 눈빛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한결 편안해진 듯 보였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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