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263번.
한 여성의 분열된 자아를 형상화해 낸 이체롭고 신비로운 작품입니다. 바흐만은 등장인물인 '나'와 말리나의 관계에 대한 해석을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습니다. 뉴욕 타임스는 이 작품에 대해 "버지니아 울프와 사뮈엘 베케트의 최고 작품에 비견할 만하다."고 극찬합니다.
<< 작가의 시선 >> - 작가인 '나'의 모든 것은 이반과의 사랑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반은 이 사랑을 부담스러워하며 '나'와 '나'의 글쓰기를 무시합니다. 말리나는 아버지의 악몽에 시달리고, 이반에 대한 사랑으로 힘들어하는 '나'를 곁에서 보살피고 비판도 해주는 인물입니다. 이반과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자, '나'는 더 이상 '나'를 통한 감성적 글쓰기가 불가능해짐을 깨닫게 됩니다.
*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고 난 뒤에야 겨우 '오늘'이라고 설정할 수 있었다. '오늘'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에게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매일같이 '오늘'이라는 말을 쓴다. (···)'오늘'과 나의 관계는 정말 절망적이다.
* 이반을 위해 아름다운 책을 쓰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심한다. (···)말들이 내 머릿속에서 웅웅거리기 시작하더니 한 줄기 빛이 비친다. 몇몇 음절들은 벌써 반짝거리고, 문장들이 들어 있는 작은 상자들로부터 형형색색의 쉼표들이 나와 날아다니며, 한때는 검정색이었던 마침표들이 풍선처럼 부풀어 내 머리 위에 둥둥 떠다닌다.
* "왜 통곡의 벽만 있을까? 지금까지 왜 아무도 환희의 벽은 짓지 않았을까?"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 이반이 원한다면, (···)환희의 벽을 지어야지. 나로 인해 빈의 흉물스런 구역을 둘러싸고 행복의 벽이 생길 것이다.
*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건 단 한 마디의 말뿐이다. 이 세상에 나를 위한 보험이란 없다.
* 표현은 광기입니다. (···)종이를 넘기는 행위도 광기와 관계가 있습니다. 한 장에서 다음 장으로 쫓아다니고, 도망다니고, 미친 듯이 분출되는 그런 것과 공범 관계에 있지요.
* 읽는 행위는 악습입니다. 그건 다른 모든 악습들을 대체할 수 있는 악습이지요. 이따금 다른 악습들을 대신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삶을 계속할 수 있도록 더욱 집중적으로 도와주기도 합니다.
* 문장이란 독자에게 자기 자신을 '내놓아야' 만 하는 거예요. 저라면 책을 '독파'하는 일 같은 건 못할 것 같아요. 어쩌면 바로 그런 게 몰두를 하느냐 마느냐의 경계가 되겠지요. 그런 사람들도 있어요. 그러니까 읽기의 영역에서 아주 특별한,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경험하는 사람들이요.
* 내 마음을 다잡을 수 없을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말리나는 나에게 도움이 된다. 그는 흔들림 없이 침착하게, 늘 나를 위해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암흑의 시간 속에서도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말리나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바로 나 자신이 사라지게 되리라는 것을.
* 나는 말리나도 '너'라고 부르고, 이반도 '너'라고 부른다. (···)말리나에게 쓰는 '너'라는 말은 우리들의 대화와 논쟁에 꼭 들어맞는다. 이반에게 쓰는 '너'라는 말은 딱히 뭐라고 잘라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변색될 수도 있고, 흐려질 수도 있고, 선명해질 수도 있고, 주줍음을 탈 수도 있고, 온순해질 수도 있고, 소심해질 수도 있다. 이 말이 표현해 내는 색조는 무한하다.
* 나는 내 삶을 증오하지 않는다. (···)그럴 수는 없다.
* 인간이든 사물이든 상관없이, 말리나가 모든 것을 아무런 열정 없이 대한다는 점, 바로 그것이 그의 성격을 가장 잘 말해 준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친구도 없고 적도 없는 그런 보기 드문 인간형에 속한다.
* 인간이란 파고들지 않을 때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어떤 요구도 받지 않을 때만 파악되는 거라고, 가만 있으면 모든 것이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지닌 이런 균형감과 냉정함은 나를 더 깊은 절망으로 몰아넣는 것만 같다. 왜냐하면 나라는 인간은 그 어떤 상황에 처해도 반응을 감추지 못하고,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모조리 다 겪으며, 말리나라면 거리를 두고 인식하기만 할 것을 직접 끼어들어 손해를 보고 괴로워하기 때문이다.
* 말리나는 인간을 바라본다. (···)그의 시선으로부터 인간은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커지고, 더 엄청난 존재가 된다.
* 난 완전히 위조되었어. (···)그걸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너밖에 없을 거야.
* 나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어. 그저 가끔 아주 짧은 순간을 제외하고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어. 그래도 난 결국 아름다움을 보았지. 그게 뭘 채워 줄 수 있냐고 묻겠지? 그건 그 자체로 이미 족해. (···)정신은 그 어떤 영혼도 일깨우지 못해. 같은 정신을 지닌 영혼만이 그럴 수 있을 뿐이지.
* 말리나의 발소리. 점점 낮아지다 거의 들리지 않는 발소리. 마침내 정적. 경보도, 사이렌도 울리지 않는다.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는다. 구급차도, 경찰도 오지 않는다. 이건 아주 오래된, 아주 두꺼운 벽이다. 그 누구도 이 벽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고, 그 누구도 이 벽을 부숴 열 수 없으며, 이 벽으로부터는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소리도 새어 나갈 수 없다. 그건 살인이었다.
<< 말리나의 말 >> - 감정적인 한 여성인 '나'에게서 분열된, 이성적인 남성 자아의 형상입니다.
* 넌 그렇게 네 마음을 아무 데나 다 달아 놓아서는 안 돼.
* 단 하나의 맹세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사는 게 더 힘든 법이야. 여러 가지 맹세를 했다면 분명히 그중에 이기는 것도 있겠지만 단 하나의 맹세는 그럴 수가 없잖아.
* 언젠가 한번은 너도 반드시 주변을 정리해야 돼. (···)모든 걸 다 시작한 사람이 너니까 그것 역시 네가 시작해야만 해. 그리고 네가 그 모든 걸 다 끝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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