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는 돈 있어서 살았냐, 속아서 살았지 -<돼지꿈>

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125번.

by 이태연

















베트남전에 파병되었던 황석영은 전쟁터에서 생긴 트라우마를 글쓰기로 극복해냅니다. 공장 견습공, 공사장 일용 노동자, 문화운동가 등의 삶을 산 작가는 그 체험들을 고스란히 작품에 녹여냅니다. 작가는 암울한 현실과 이상, 그 사이의 간극을 조화시키려는 극복 의지를 보여줍니다.



【 탑 】 -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입니다. '나'는 베트남 전쟁 중 명령에 의해 목숨을 걸고 작은 돌탑을 지켜냅니다. 그러나 아침에 도착한 미군들은 돌탑을 불도저로 밀어버립니다.


* 월남군의 호송 행렬이 모두 지나가자 황혼 무렵의 국도는 병원 복도처럼 텅 비어버렸고, 드높게 떠올랐던 연막 같은 먼지는 밀림 쪽으로 불려 날아가 버렸다. (···)그가 고개를 돌리며 분해된 총대로 도로 건너편을 가리켰다. "가서 봐라. 그리구 생각해 봐. 정신이 온전한 놈들의 짓인가를 말이지. (···)탑이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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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저 탑을 적이 옮겨가지 못하도록 무사히 보존했다가 정부군에게 물려주는 거지. 저따위를 지켜야 된다구 생각해 낸 자들이 바보야. 전략적 가치와 정치적 가치가 어떻다느니 하지만, 이놈의 전쟁은 시작부터가 전략적이라 그 말이지." 장난감과 같은 작은 탑을 지켜야 하는 일이란 걸 알았을 때, 나는 지프에 실려 이곳으로 오면서 느꼈던 공포감마저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실로, 그것은 탑이라는 거창한 말을 붙이기엔 너무나도 초라한 물건이었다. 초소와 숲 사이의 마당에 사람 두 키 정도의 높이로 세워져 있는 보잘것없는 돌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도 포연과 총성이 없었을 때, 빛나는 햇빛 아래 나무 그림자의 옷을 입은 사원에서 종이 울려 퍼지고, 지나는 농부와 아이들과 가축들은 탑을 향하여 경건하게 무릎을 꿇었으리라.


* 강과 교량이나 유리한 지형처럼 탑은 누가 보기에도 전략적 가치가 있었으며, 그것을 차지하는 쪽은 주민들의 신뢰와 석가여래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을 것이었다. 그러한 양편의 관심으로 해서 탑은 이 전쟁의 한 상징적인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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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의 사격을 막자는 셈인가." "탑의 방패막이죠." 인질은 탑에 묶였고, 우리가 시킨 대로 얌전히 앉아서 먼 숲 속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부대의 폐허 너머 컴컴해진 밀림 위에 적도의 태양이 잘 익은 망고처럼 떠 있었다.


* 먼 하늘에서 번쩍이는 섬광이 지나갔고, 뇌성이 뒤를 이었다. (···)쌍방이 쏘아대는 소총 소리와, 자동소총의 탄환 튀는 소리가 파문처럼 그곳에 번져나갔다. (···)"못 쏠 거요. 우리가 지키는 게 바루 우릴 방어해 주고 있거든." "탑이······ 아니면 인질이냐?" "둘 다죠. 인심을 얻으려면 탑을 파괴할 수는 없을 테니까."


* 말쑥한 정글복 차림의 미군 중위가 승차 책임자석에서 뛰어내렸다. (···)"우리는 작전 명령에 따라서 저 탑을 지켰습니다." 나는 초라하게 서 있는 작은 석탑을 가리켰다. 중위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깨끗이 속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골치 아픈 것은 없애버려야지. 미합중국 군대는 언제 어디서나 변화시키고 새롭게 할 수가 있네. 세계의 도처에서 말이지." 나는 우리가 탑과 맺게 된 더럽고 끈끈한 관계에 대해서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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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돼지꿈 】 - 폐품 수집상 강씨는 죽은 개 한마리를 얻어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처녀의 몸으로 임신한 의붓딸이 집에 와 있고, 의붓아들은 공장에서 일하다 손을 다쳐 옵니다.


* 누구든지 동네로 들어오는 강씨의 거동을 보면 대개 그날의 일진에 관해서 알아맞힐 수가 있었다. 그의 걸음걸이가 당당하고 고개를 치켜들었다든가, 또는 리어카가 가뿐하게 굴러 들어온다든지, 모자가 비뚜름하다든가,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하루 재수를 먼저 묻는다든가 하는 짓들이 나오면 틀림없이 최상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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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케 구하셨어. 복철에 개 보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 (···)개가 차에 깔린 모양인데 쉽게 죽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뒷다리가 모두 부러져서 병신이 될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래서 주인은 개가 편안히 죽을 수 있도록 주사를 놓아주기를 부탁했고, 개는 잠깐 동안에 사지를 뻗고 죽어버렸다. (···)아주머니는 숫제 사정조로 개를 강씨가 가져다가 꼭 묻어주기를 부탁하는 한편, 따님을 달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 강씨가 못 이기는 체하고 개를 리어카에 싣는데, 아주머니가 수고비라며 삼백 원 돈이나 얹어주었다. 호박이 덩쿨뿌리째 굴러 떨어진 것이다. (···)그들이 안 보이는 곳이 이르자, 강씨는 개의 크기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느라고 리어카 속을 들여다보았다. "요새 기름길 못 먹어서 버짐꽃이 핀단 말일세. 아침마다 쌀가루가 싸라기 모양 쏟아진다구. 그렇잖아도 가출한 똥개라두 한 마리 때려잡아 보신하려는 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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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는 돈 있어서 살았냐, 속아서 살았지." (···) 강씨댁이 돈을 허리춤에 찔러 넣으며 말했다. "못할 거 뭐 있냐. 그 사람이 달란 말두 먼저 꺼냈으니까, 내친김에 속히 치를란다. 원한다면 요 삼 일 상간에라두 괜찮지." "소문나겠수. 애 밴 처녀 팔아 치운다구."


* 미순이를 설득하고 있는 왕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생이 뭐 중뿔날 거 있겠어요? 아까 돌아오셨단 말 듣고, 첨엔 야속하기도 하구 화두 납디다만······ 결심했습니다. 사랑해선 안 될 사랑이지만, 아기야 아무 사람의 애면 어떻습니까? 내가 애비 노릇하며 같이 키우지요."


* "오늘 우리 동네 경사 만났구먼." 반장이 앞으로 나섰다. "경사다뿐인가. 우리가 철거 안 된 게 누구 덕인가. 다 수완 좋아 요로에 진정하고 다닌 내 덕이지." "개고기 먹고, 술 먹고, 푸짐하게 놀았고······" "미순인 시집가구 거긴 노총각 면했구려." 빈터에는 묘한 활기가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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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포 가는 길 】 - 노동자 영달은 떠돌이 생활을 접고 고향을 찾아가기로 합니다. 그 길에서 10년 만에 고향인 삼포로 가는 전과자 정씨와, 도망친 술집 작부 백화를 만나 함께 길을 떠납니다.


* 오래 머물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는 진작부터 예상했던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현장 사무소는 사흘 전에 문을 닫았고, 영달이는 밥집에서 달아날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 "감옥뿐 아니라, 세상이란 게 따지면 고해 아닌가······." 정씨는 벗어서 불가에다 쬐고 있던 잠바를 입으면서 중얼거렸다. "어둡기 전에 어서 가야지."


* "몇 년 만에 가는 거요?" "십 년." 노인이 그렇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두 말우. 거긴 지금 육지야. 바다에 방둑을 쌓아놓구. 추럭이 수십 대씩 돌을 실어 나른다구. (···)허허, 사람이 많아지니 변고지. 사람이 많아지면 하늘을 잊는 법이거든." 작정하고 벼르다가 찾아가는 고향이었으나, (···)정씨는 발걸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는 마음의 정처를 방금 잃어버렸던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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