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도 로또를 사 본적이 있을까?
토요일 오후였다. 대형 상가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대로변은 오가는 사람들로 활력이 넘쳤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사람들이 어딘가를 향해 계속 줄을 서고 있었다. 타래실처럼 몇 겹으로 이어진 줄의 최종 목적지는 로또판매점이었다. 인도와 차도 사이에 있는 작은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한 남자가 로또복권을 팔고 있었다. 판매대 앞쪽으로 <로또 1등 16번, 2등 70번 당첨>이란 빨강색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마침 비상금으로 챙겨 온 현금 만원이 있었다. 일등이 많이 나온 곳이라니 왠지 기대가 되어 줄 끝으로 가서 섰다. 내 뒤로도 긴 줄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줄을 선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대로변에서 복권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상황이 살짝 무안하기도 할 터였다. 나도 <줄 서 있음>이 쑥스러워 빨리 내 순서가 되길 바라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이때 가로대 앞 길바닥에 앉아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연두색 점퍼를 입은 남자가 종이박스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챙 넓은 초록색 모자에 달린 검정 망사가 남자의 얼굴을 살짝 가려주고 있었다. 남자의 오른쪽 팔은 힘없이 축 처져있었다. 남자 앞에는 하얀색 플라스틱 통이 놓여있었다. 남자는 꼼짝도 않고 앉아 바닥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복권판매점 앞에서 구걸을 할 생각을 하다니! 대단한 발상인 것 같았다. 많은 행인들이 오가는 대로변이니 돈을 주는 사람들이 제법 많을 것 같았다. 행운을 사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과, 그들에게서 돈을 얻고 싶은 남자의 모습은 묘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평소에 타 지역으로 여행을 갔을 때 로또를 사곤 하지만, 그 금액이 5천원을 넘는 경우는 없었다. 이번에도 로또는 5천원어치만 사고, 나머지는 남자의 돈 통에 넣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1등 16번>이라는 글귀가 자꾸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왠지 만원어치를 다 사야 될 것만 같았다. ‘5천원을 저 남자의 간절함이 담겨진 통 안에 넣을까? 그냥 만원어치 다 사버릴까? 나 아니어도 다른 사람들이 돈 넣고 가겠지? 이렇게나 사람들이 많은데?’ 갈등이 시작되었다.
구걸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현금이 있을 때면 빠뜨리지 않고 꼭 돈을 주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돈들은 브로커들이 다 가져가고, 정작 구걸을 했던 사람은 밥만 겨우 먹여준다더라, 돈 통에 푼돈만 있어야 더 많은 사람들이 돈을 주기 때문에, 누군가 고액권을 주면 잽싸게 감춘다더라.” 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 후로 가끔 돈 통을 앞에 두고 엎드려있는 사람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지만 모른 채 지나치곤 해 왔었다.
순서를 기다리는 중에도 자꾸 남자에게로 눈길이 갔다. 남자는 여전히 바구니보다는 좀 더 먼 길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줄을 서서 기다리는 5분여 동안 남자의 돈 통에 돈을 넣어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다들 구입한 복권을 챙겨 넣으며 그곳을 떠나기 바빴다. 자신의 행운을 사기에 바빠, 연두 빛 조끼를 입은 남자에게 돈을 건넬 겨를이 없는 것 같았다. 길을 오가는 사람들도 시선을 피하거나, 동정어린 눈빛만 보내며 스쳐지나 갈 뿐이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갈등은 끝나 있었다. 로또복권은 5천원어치만 샀다. 이제 거스름돈을 돈 통에 넣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것만 같아 괜히 쑥스러웠다. 돈을 주고 싶어도 쑥스러움 때문에 포기한 사람들도 꽤 많았겠구나 싶었다. 용기를 내어 눈을 내리깔고 돈 통 앞으로 다가갔다. 통 안에는 천 원짜리 2개와 백 원짜리 동전 몇 개뿐이었다. 잽싸게 5천 원짜리 지폐를 넣었다. 이때 남자가 1초정도쯤 나를 올려다본 후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굴빛이 파리한 것으로 보아 많이 아픈 사람임이 분명했다. 뒷덜미로 마구 쏟아져오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후다닥 그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후 돌아보니 남자의 모습은 줄을 선 사람들에게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남자는 수많은 행운들 속에 파묻혀 있는 셈이었다. 문득 궁금했다. 그 남자도 로또를 사 본적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