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이름을 지어주었다. A717!
이름을 지어주었던 A717은 사망하고 말았다.
폭우가 쏟아지던 새벽, 농장이 위치한 ㅇㅇ면 일대가 정전이 되었다. 이로 인해 아기 돼지 2백여 마리가 폐사되었다. 습한 장마철, 5시간 동안 냉풍기도 가동되지 않았으니 더위에 질식사하고 만 것이었다. 다행히 새벽 2시경 숙소에서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던 직원이 더위에 잠을 깨면서 정전을 알아차렸다. 만약 직원들이 돈사 창문과 출입문을 열어 돼지들을 이동시키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면, 4천여 마리나 되는 어린 돼지들이 폐사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분만사에서도 더위를 이겨내지 못한 모돈 들이 발생했다. 이들은 상태가 더 나빠져 폐사되기 전에 급히 도태 돈으로 출하되었다. 211, 316, A717. 판매일지를 훑어보다 A717에서 시선이 고정되었다. A717? A717은 이년 전 내가 직접 이름을 지어준 모돈 이었다. A717의 원래 이름은 717이었다. 그 당시 분만일지에 올라온 717은 전산에서는 이미 보름 전에 분만을 한 상태였다. 이상했다. 15일 전에 분만을 한 돼지가 또 새끼를 낳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돈 카드 사진을 받아보니 전혀 다른 돼지였다. 카드 교체 때 중복으로 기재된 것 같았다. 새로운 이름으로 전산에 등록해야만 했다. 현장에서 수정하기 쉽도록 717앞에 ‘A’자를 붙였다. 그리고 일지에 ‘717→A717로 개명함’이란 메모를 남겼다. 그날 괜히 창조자라도 된 듯 흐믓했다. A717은 인간세계에서나 하는 개명(改名)을 한 셈이었다.
‘화’자로 끝나는 내 이름도 원래는 ‘희’였다고 한다. 초등학생이었던 어느 날 문득 궁금했다. 언니나 오빠 모두 ‘희’인데 왜 나만 ‘화’지? 언니 말처럼 나는 진짜 다리 밑에서 주워온 걸까? 내가 언니 오빠 진짜 동생이 아니면 어떻게 하지?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 궁금증은 금방 해결되었다. 할머니께서 ‘내가 어렸을 때 어느 스님이 막내손녀는 돌림자를 쓰면 오래 못 산다고 했다고, 그래서 할머니는 기독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막내 손녀 이름 끝 자를 ’화‘로 바꿨다’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었다. 고향친구도 개명을 한 명함을 건네며, 백 번만 불러달라고 졸라댄 적이 있었다. 바뀐 이름을 많이 불러줘야 좋은 거라고…. 정말로 ‘훨씬 더 좋아 질 거’라는 희망이 담겨서인지, 개명 후 친구의 형편이 점점 더 나아졌다.
이름이 바뀐 A717도 6개월 주기로 분만을 척척 해냈다. 나도 일지와 전산에서 A717을 만날 때마다 특별히 관심이 더 갔다. 이름을 지어주었고, 전산에 전입등록으로 출생신고까지 해준 격이니 당연한 거였다. 어떻게 생긴 놈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A717의 실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사무실 CCTV에서 우연히 보게 된 것이었다. 화면을 청소하다가 ‘A717’이라고 쓰인 모돈 카드가 달려 있는 펜스를 비추고 있는 영상을 보았을 때, 반가움에 “안녕” 인사까지 하고 말았다. A717의 펜스는 제일 앞쪽에 있어서 화면에 가장 근접해 있었다. 직사각형 펜스 안에서 A717은 여섯 번째 임신으로 배가 불룩한 상태로 사료를 먹고 있었다. 그 후 출근 때마다 A717과 인사를 나눴다. 그러나 분만 후 이유실로 옮겨가면서 더 이상 A717을 화면에서 볼 수 없었다. 그러다 도태돈 판매일지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이제 도태 돈이 되어 출하트럭에 실려 간 A717을 전산에서도 떠나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삭제 버튼이 선뜻 눌러지질 않았다. 전산 기록의 삭제는 A717의 삶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늦추고 싶었다. 삭제 버튼 대신 모돈 정보를 클릭했다. 그러자 A717의 인생이 가족관계증명서처럼 하나의 작은 표로 펼쳐졌다. A717은 여덟 번의 분만을 해 내고 아홉 번의 임신 중 도태 돈이 되었다. 숫자 앞에 붙여진 ‘A’처럼 새끼도 많이 낳았고, 도태 돈으로 팔릴 때도 묵직한 무게로 값을 높여주었다. 이름값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정전이 아니었으면 아홉 번의 분만도 거뜬히 해 냈을 터였다. 그러나 시간이란 놈은, A717을 5시간의 정전(停電)조차도 이겨내지 못하는 노쇠(老衰)돈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현장에 없는 A717을 컴퓨터 안에서 계속 살아있게 둘 수는 없었다. 전입버튼으로 출생을 입력했던 A717에게 사망선고를 내려야만 했다. 잠시 망설이다 커서를 ‘삭제’에 놓고 버튼을 눌렀다. 순간 내가 창조자로서 이름을 지어주었던 A717은 사망하고 말았다. 안녕, A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