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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연 Jul 08. 2022

돼지 숫자 세기

돼지 숫자 세기는 당분간 계속 될 것 같다.

   모돈(母豚)두수 오차가 20두나 되었다. 현장보다 전산에 더 많은 돼지가 존재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자돈(仔豚)은 단체로 방 이름이 부여되고, 출하 될 때도 전체 숫자로 표기된다. 직원들이 두수 파악을 하므로, 전산에서는 폐사, 출하만 입력해 현장일지와 맞추면 되었다. 반면, 이름을 갖고 있는 모돈은 교배와 분만, 이유, 출하, 폐사 때마다, 하나하나 번호들을 입력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분만을 했다는데 전산에는 없고, 전산에는 기록이 있는데 현장에는 존재하지 않는 돼지들이 종종 나타났다. 이동과정에서 모돈 카드가 바뀌거나, 매직으로 쓴 숫자의 일부분이 지워지는 게 원인이었다. 하나의 모돈이 돈사마다 다른 번호로 인식되어, 새로운 돼지로 전산에 입력되면서 오차가 발생하게 된 것이었다.   

   

  현장실사(實査)가 필요했다. 그동안 사무실과 멀리 떨어져 있어도 바람결에 솔솔 풍겨 오는 분뇨냄새에 선뜻 돈사에 들어갈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그러나 바쁘다는 핑계로 계속 미룰 수만은 없었다. 드디어 화창한 초가을 어느 날, 현장으로 가기위해 만반의 준비를 시작했다. 하얀 방역 복을 입고, 장화를 챙겨 신고, 마스크를 2개나 쓰며 중무장을 했다. 볼펜과 형광펜, 1에서 1000번까지 번호가 인쇄된 용지들을 챙겨들고 씩씩하게 현장으로 출발했다. 돈사에 가까워질수록 특유의 돼지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마스크를 두 겹으로 썼어도 소용없었다. 후~후~ 큰 숨을 몰아쉰 후 비장하게 분만사 철문을 열었다.      


  초가을이어도 밀폐된 공간의 열기가 훅 덮쳐왔다. 환풍기와 냉풍기들이 돌아가고 있어도 숨이 턱 막히고 목까지 따끔해져 왔다. 직사각형 팬스 안에 임신한 모돈 들이 산더미 같은 배를 안고 서있거나 누워있었다. 팬스 위쪽으로 숫자가 적혀있는 모돈 카드들이 줄지어 매달려 있었다. 내가 팬스들 사이 통로로 들어서자, 모돈 들이 몸을 들썩거리며 아는 체를 했다. 돼지들이 놀랄까 조심하며, 숫자 표에 형광펜으로 체크를 해나갔다.

  

  겨우 두 줄을 끝냈을 무렵, 땀이 비 오듯 흘러 내렸다. 방역복과 모자, 두 겹의 마스크 때문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마스크 안에 땀방울이 고이기 시작했다. 숨쉬기가 힘들어 마스크를 살짝 내려 보았다. 그러나 역한 냄새 때문에 후다닥 다시 올리고 말았다. 마트의 진열대처럼 길게 늘어서 있는 팬스들을 보자 언제 끝내나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눈앞이 핑 돌아 쓰러져버릴 것만 같았다. 결국 분만사 문을 열어 제치며 뛰쳐나갔다. 마스크를 벗고 바깥바람을 실컷 들이키니 좀 살 것 같았다. 폐수처리장 쪽에서 분뇨냄새가 몰아쳐 왔지만, 돈사 안 보다는 훨씬 견딜 만 했다.

     

  줄줄 흘러내리는 땀과 지독한 냄새로 분만사를 들락날락 댔더니, 두 개동을 마치는데 1시간 반이 넘게 소요됐다. 이제 점심휴식을 끝낸 직원들이 오후근무를 하러 올 터였다. 업무에 방해되면 안 되니 2시 이전에 마무리해야만 했다. 그러나 도저히 나머지 돈사에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아 괜히 돈사 앞을 서성댔다. 그러던 중 직원들이 쉬는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사료포대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휴게실 작은 탁자는 커피포트와 물병, 수건, 일지들로 어수선했다. 그런데 일지 위에 물티슈뭉치들이 놓여 있었다. 의아해서 자세히 보니 일지에 묻은 분뇨찌꺼기들을 닦아낸 거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현장 사무실에 있는 일지들을 가져다 전산작업을 하는 나를 위한 배려였다.      


  일지를 최대한 깨끗한 상태로 올려다놓기 위해 물티슈로 닦기 까지 했었구나 생각하니, 모돈 번호를 잘 못 기재했다고, 두수가 틀렸다고 직원들에게 툴툴댔던 게 괜히 미안했다. 사료를 챙겨 먹이고, 일일이 주사를 놓고, 폐사된 돼지들을 관리하고, 출하 때면 한 마리씩 세서 차에 실어야 하는 현장 일도 정신없을 터였다. 작업복을 벗지도 못한 채 매일 수기(手技)로 일지를 정리하는 일에, 더러워진 일지를 닦아내는 일이 더해진 거 같아 가슴 저 안쪽이 시큰해왔다. 매일 돈사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실사합네” 호들갑 떠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스크를 고쳐 쓰고 서둘러 교배사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이때 정문 쪽에서 오후 근무를 하러 오는 직원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날 결국 교배사와 임신사의 모돈 체크는 현장직원들이 대신 해 주었다. 그리고 20두였던 오차는 현장 실사로 5두까지 줄어들었다. 현장과 전산의 ‘돼지 숫자 세기’는 당분간 계속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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