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아저씨는 '불쌍한 사람'이었다.
김 아저씨는 형제들 중 외모도, 배움도 제일 못 미치는 분이었다. 맏형이 세상을 떠난 후, 농사를 지어 조카 3명을 대학까지 보냈다. 동네 사람들이 김 아저씨를 부르는 호칭은 ‘착한 사람’이었다. 집 창고에 구비되어 있던 농기계들은 마을 공동 장비나 마찬가지였다. 농사철이면 동네 어르신들의 농사일을 도왔고, 농한기(農閑期)에는 길가나 논둑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정리했다.
김 아저씨의 아버지는 이웃 동네 형들에게 맞고 다니는 둘째를 초등학교도 중퇴시키고 집에서 보호했다. 어머니는 결혼도 못 하고 나이 들어가는 둘째만을 위한 맛깔스러운 밥상을 준비했다. 그러나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김 아저씨의 거처가 모호해졌다. 김 아저씨 형수는 시동생이 독립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혼자서는 밥도 해 본 적 없는 김 아저씨는 고향을 절대 떠나지 않겠다는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동생들이 집을 새로 지어주는 조건으로 형수네 가족과 같이 살 수 있게 되었다.
동생들은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김 아저씨를 답답해했다. 당신의 몫으로 상속받은 돈이 꽤 많았음에도 김 아저씨는 자신을 위해 돈을 쓸 줄 몰랐다. 옷도 싸구려 작업복뿐이었다. 여행이라고는 평생을 거쳐 동네 어르신들 따라 동참했던 나들이가 전부였다. 동생들이 서울로 놀러 오라고 해도 절대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김 아저씨의 세계는 작은 시골 동네가 전부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김 아저씨가 서울을 자주 오가게 되었다. 술, 담배는 입에 대 본 적도 없었지만, 모체로부터 감염되었던 B형 간염이 말기 암으로 발병된 거였다. 원래 왜소했던 김 아저씨는 수술과 퇴원을 반복하며 더 초췌해져 갔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김 아저씨의 생전 모습은 요양병원으로 가기 전,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남아있고 뱃가죽이 등에 붙을 정도로 말라 있던 모습이었다. 돌아가시기 전 김 아저씨는 링거도 거부하며 집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한다. 이미 암세포로 인해 가슴 쪽까지 마비되어 욕창이 생겼어도 인지를 못 하는 상태였다. 고향 집으로 돌아온 김 아저씨는 일주일 후, 미음 한 숟가락을 드시고 나서 간병인이 자리를 뜬 사이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식장은 한산했다. 친구도, 자식도 없는 김 아저씨의 죽음을 슬퍼할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조문객들이라고는 형제들과 동네 어르신 몇 뿐이었다. 어르신들은 “아이고~ 착한 사람이 착하게만 살다 갔네. 장가도 못 가보고 쯧쯧~”, “나는 저 사람 화내는 거 한번 못 봤어~사람이 대책 없이 착하기만 해 갖고서는…” 저마다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젊은 김 아저씨가 영정사진 속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가끔 인사 정도만 나누었을 뿐이어서인지 특별히 눈물이 나오진 않았다.
이때 내 옆에서 향을 올리던 김 아저씨의 제수씨가 갑자기 울부짖기 시작했다. 평소 신기(神技)가 있어서 주변 사람들 점을 봐주기도 하는 분이었다. “제수씨~ 제수씨~ 나 억울해요. 제수씨~ 나 죽기 싫어. 죽기 싫다고. 제수씨~ 나 억울하다고. 죽기 싫다고. 억울하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리고 얼굴이 하얘지더니 피식 힘없이 주저앉으며 쓰러졌다. 기절한 것 같았다. 순간 ‘빙의(憑依)라는 단어가 떠오르며 서늘한 바람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왔다.
어수선해진 장례식장을 나서는데 문득 물음표가 떠올랐다. ‘김 아저씨는 정말로 착한 사람이었던 걸까?’ 어쩌면 김 아저씨는 자신의 어깨에 지워진 형네 가족이라는 무거운 짐이 버거웠을 거라는, 거실 벽에 가득한 동생들의 가족사진을 보며 부러워했을 거라는, 자신만을 위해 비싼 옷도 사 입고 여행도 가고 싶었을 거라는, 어쩌면 ‘착한 사람’이길 원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들이 굴비 엮이듯 얽혀왔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김 아저씨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 ‘불쌍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