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천 년의 시간들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초겨울 오후 햇살이 황토 빛 흙더미 위로 쏟아져 내렸다. 사각으로 구분된 흙 밭에 안전화 차림의 남자들이 쪼그리고 앉아 흙무더기를 퍼 올리고 있었다. 남자들의 엉덩이에 매달린 빨간색 동그란 의자가 연초록 울타리와 산뜻한 대비를 이뤄냈다. 바람이 한바탕 지나가자 부옇게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사방이 고요했다. 흙 밭에서 퍼 올린 조각들을 골라내느라 하얀 장갑을 낀 손들만이 바삐 움직였다. 그릇인지 기와인지 잘 구분되지 않는 조각들 위로 섬세한 붓놀림이 시작됐다. 흙을 털어낸 조각들이 계란 판에 계란 담기듯 조심스레 손수레로 옮겨졌다.
주황색 손수레 옆으로 <신라왕경 8대 핵심 유적지 복원 정비 사업. 사적 제 16호 경주 월성>안내판이 매달려 있었다.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보관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남아 있는 월성은 경주를 둘러싸고 있던 성벽이었다. 천 년 전 사람들의 체온이 닿았을 물건들이 수레 안에 있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천년의 세월이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었다. 좀 더 다가가 수레 안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금지선이 있어 불가능했다.
켜켜이 쌓인 시간들이 박물관 유리벽 너머에 놓여 있었다. 깊은 어둠속에서 잠자다 깨어난 과거가 천 년 후의 나에게 말을 걸어올 것만 같았다. 파랗게 녹이 슨 도끼날, 익살스런 모습의 토우, 거울, 청동방울, 얼굴무늬 수막새, 독특한 모양의 사리 함, 식물 씨앗, 글자가 새겨진 기와, 깨진 그릇…. 천 년 전, 어느 아낙네는 애지중지 아끼는 그릇에 밥이나 김치, 풋고추 등을 담아냈을 터였고, 어느 소녀는 늠름한 화랑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거울 앞에서 매무새를 가다듬었을 터였다. 유리 위에 손을 대 보았다. 유리 안 수막새 위로 내 손 그림자가 어른대며 비춰보였다. 손끝으로 천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월성 발굴은 종료시점을 정하지 않은 장기 복원 프로젝트입니다. 1920년대 경주 황복사 터 발굴 때에는 커다란 돌에 끈을 묶어 석탑재를 옮겼었고, 70년대에는 시멘트로 문화재를 보수했었습니다. 당시로서는 그게 최고의 기술이었던 거죠. 먼 미래에 월성이 어떤 기술로, 어떤 모습으로 재발견될지는 여러분들이나 후세들만이 알 수 있을 겁니다. 미래에 맡기는 거죠.”
초등학생들이 눈을 반짝이며 학예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문득 먼 훗날에 그들이 월성을 어떻게 기억할지 궁금했다. 그들이 살아갈 미래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찬란할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학생들과 내가 서 있는 박물관 안은, 천 년 전 사람들이 수없이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 ‘미래’라는 곳이었다. 과거가 차곡차곡 쌓여진 현재에 내가 서 있었다. 내가 이쪽에서 시간의 끈을 살짝만 잡아당겨도, 저쪽 끝 과거들이 우르르 달려 나올 것만 같았다. 천 년 전 사람들과 나, 먼 미래를 살아가게 될 학생들은 ‘시간’이란 매개체로 하나를 이루고 있는 셈이었다.
박물관을 나서니 스산한 초저녁 바람이 코끝에 서늘하게 와 닿았다. 바람을 흠뻑 느끼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천 년 전의 사람들이 살아 숨 쉬던 공간에서 천 년 후의 내가 큰 숨을 내 쉬었다. 멀리 웅장한 고분들과 첨성대, 아름드리나무들이 시간의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고분들 사이를 맴돌던 까마귀 떼들이 깊은 어둠 속에서 깨어난 듯 힘차게 날아올랐다. 이때 뎅~뎅~뎅~ 종소리가 울렸다. 현대의 기기로 녹음된 에밀레 종소리였다. 빨갛게 물들어가는 석양 속으로 뎅~뎅~뎅~ 시간의 종소리가 널리 퍼져나갔다. 천 년의 종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