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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연 Mar 22. 2023

우리는 모두 1등 당첨자들이다

우리 모두 1등 당첨자인 거 아닐까?

    “아니~ 2등이 664명이나 나왔다는데 여기는 한 명도 안 나온 거야?” 걸걸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판매점의 고요를 깨뜨렸다. 단골손님이었다. “형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 가게에서도 당첨자 많이 나왔는데요?” 그러자 번호연구 중이던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당첨 축하 플랜카드 하나 걸려있지 않은데 무슨 소리냐 하는 표정들이었다. 주인장이 너스레를 떨며 말을 이어갔다. “그동안 당첨된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3등도 많고 5등은 뭐 셀 수도 없을 정도인데요?”     


   “아~ 이 양반아 2등 말이야! 2등!” 남자가 말하자 사람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보탰다. “그렇게 따지면 지난주에 4등 맞았으니까 나도 당첨자네”, “저는 한 달 내내 꼴등 연달아 당첨입니다”. “나도 2년 전에 3등 당첨 된 적 있었잖아. 얼마나 아깝던지 한동안 식음 전폐하고 다시는 복권 안사겠다 마음먹었다니까? 그런데 그게 되나? 1등이 바로 앞에서 손짓하고 있는 거 같으니, 하하~”, “그러게요. 다음 주에는, 다음 주에는 하며 1등이랑 줄타기하다 보니 매주 꼭 사게 되더라고요. 불경기에 장사도 안 되는데 그래도 이 종이 한 장이 비상금처럼 든든하다니까요?”


  이때 분홍색 야구 모자와 감색 점퍼 차림의 아주머니 한 분이 들어오셨다. 새벽 5시부터 아침 9시까지 건물 청소 후, 판매점에 들러 놀다 가시는 분 이었다. 자그마한 키에 항상 도시락 가방을 들고 다니는데, 하얀 피부가 힘든 일은 전혀 못 하실 것 같았다. 남편이 사업 실패로 스스로 삶을 마감한 후, 닥치는 대로 일해서 자식들을 키워낸 분이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새벽엔 아직 쌀쌀하죠? 달달한 거 한 잔 드셔야지” 아주머니가 주인장이 건네는 믹스커피를 받아들고 탁자에 앉았다. 그러더니 “자식들이 내 생일이라고 모인다는데, 복권 하나씩 사서 주려고~” 하며 지갑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턱 꺼내놓았다. 매일 들러도 일주일에 삼천 원 넘게 복권을 산 적이 없는 분 이었다.  

   

  아주머니는 이만 원으로 번호가 각기 다른 복권 다섯 장을 사서 작은 봉투에 나누어 담았다. 그런 다음 겉면에 꼼꼼하게 써 내려갔다. < 둘째야 이제 자식들 말고 너를 좀 챙겨 보거라 >, < 막내야 몸 좀 아껴가면서 일해라 >…. 글씨체가 얼굴만큼이나 고왔다. 오 남매 중 살림이 제일 변변찮은 둘째 딸과 직장 잃고 아르바이트 전전하는 막내아들이 제일 맘이 쓰인다고 하셨다. 봉투를 소중하게 가방에 챙겨 넣으며 아주머니가 쓸쓸한 웃음이 담긴 하소연을 하셨다. “이 중에 하나라도 1등이었으면 좋겠네. 다른 부모들처럼 유산이라도 남겨주고 싶은데, 집 월세 보증금이라야 내 장례비 하면 바닥날 거고…”     

 

  가게를 나가는 구부정한 아주머니 뒷모습에 분위기가 왠지 숙연해졌다. 주인장도, 1등 당첨을 갈망하며 번호를 연구하던 사람들도 침묵했다. 아주머니가 미처 버리지 못하고 간 종이에 적힌 숫자들만이 탁자위에서 어지럽게 노닐고 있었다. 잠시 후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중년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근데 당첨되는 사람은 따로 당첨될 복을 타고나는 것 같지 않아? 옛날에 효자들 눈에만 보였다는 산삼처럼 조상이 도와줘서 당첨되는 건가? 아니면 전생에 나라를 구했거나…. 하긴 난생처음 산 복권이 덜컥 1등으로 당첨 됐다는 사람도 있다니까 뭐~ 그건 그렇고! 이거나 좀 맞춰 봐”      


  주인장이 남자가 건넨 복권을 기계에 넣어 확인 후 “축하드립니다. 당첨 되셨습니다.”라며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남자가 인상을 콱 쓰며 한마디 던졌다. “에이~ 꼴등인데 뭔 당첨 축하야? 어이~ 로또 사장님 지금 장난하시나?” 그러자 주인장이 희망이 가득 담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니 자동도 아니고 수동(手動)으로 여섯 개 중 세 개를 맞춘 거니까 확률로 따지면 50%이잖아요. 대단하신 겁니다. 예비 1등 당첨자님! 미리 축하드립니다.”     


   <1등 당첨자>라는 말만으로도 기분이 좋은지 중년 남자의 얼굴에 싫지 않은 미소가 슬쩍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보니 정말로 1등에 당첨되기라도 한 듯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문득 ‘우리 모두 1등 당첨자인 거 아닐까?’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빠의 정자가 엄마의 난자에 착상될 때 우리는 이미 1등에 당첨된 셈이니 말이다. 온 우주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살아 숨 쉬는 한 인간으로, 인생이라는 커다란 세상에 태어났으니 우리는 모두 1등 당첨자들인 것이다.     


  아!! 물론 복권 1등 당첨도 짜릿하고 행복할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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