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밀화가들 사이의 질투, 낯선 화풍에 대한 두려움, 살인, 그리고 사랑…. 오르한 파묵은 터키의 정체성(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동, 서양의 문화적 영향을 받는)에 대한 탐구를 다양하고 섬세한 색채로 담아냅니다.
<< 오스만의 말 >> - 화원장입니다. 살해범의 단서를 찾으러 들어간 국고에서 전설로만 알려졌던 책과 그림들을 본 후, 스스로 자신의 두 눈에 바늘을 찔러 넣어 장님이 됩니다.
* 진정으로 좋아할 만한 새로운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어떤 새로운 것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 내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을 잊어버리고 혼동하는 까닭은 내가 노망이 들어서가 아니라, 아무런 빛깔도 없이 흐리멍덩한 이름이나 얼굴은 기억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 우리에게 그림의 아름다움은 그림의 풍부한 의미와 섬세함에서 비롯된다네.
* 화가는 종이 앞에서는 항상 혼자야.
* 나는 깊은 밤, 이 국고의 추운 방에서 40년 동안 상상만 해왔던 책장들을 추위로 곱은 손가락으로 넘겨 보면서, 그 잔인한 부하라 이야기의 주인공들보다 훨씬 더 행복했다. 평생 전설로만 알았던 책들을 장님이 되어 죽기 전에 직접 손으로 만져 본다는 사실이 나를 정말로 행복하게 했다. 나는 때때로 어떤 그림이 내가 들었던 것보다 더욱 아름답다고 느끼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라고 중얼거렸다.
빨강 그림
* 이 빨간색은 타브리즈 출신의 위대한 장인인 미르자 선생의 빨간색일세. 그는 이 빨간색을 만드는 비법을 무덤까지 가지고 갔지. (중략) 신께서는 자신의 창조물들이 피 흘릴 때 외에는 이 멋진 빨간색을 보여주지 않으시지. 그래서 우리는 지치도록 인간이 만든 천이나 거장들의 그림에서 다양한 빨간색을 찾아다녀야 하는 것이네.
* 나는 품에 작업대를 안고 등이 굽도록 보낸 모든 세월과, 예술을 배우기 위해 맞았던 모든 매, 그림을 그리며 눈이 멀기로 했던 결심, 그림 때문에 겪었던 모든 고통이 행복한 희열의 승리로 바뀌는 듯했다. 금지된 것을 보는 것처럼 그 멋진 그림을 조용히,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희열로 바라보았다. (중략)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볼을 타고 흘러내려 수염 속에 파묻혔다.
* 거울에 눈동자를 고정시킨 뒤, 눈 화장을 하는 여인의 익숙한 손처럼 내 손은 스스로 바늘을 찾아냈다. 마치 그림을 그릴 타조 알에 구멍을 내는 것처럼, 주저 없이 용감하게, 조용히, 그리고 단호하게 오른쪽 눈동자에 바늘을 찔렀다. 내가 한 일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보았기 때문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바늘을 손가락의 3분의 1 깊이로 눈을 찌른 후 빼냈다. (중략) 세상의 색은 생각했던 것처럼 어두워지지 않았다. 단지 천천히 서로 섞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거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차가운 햇빛이 국고의 짙은 빨간색, 핏빛 옷감 사이로 내려왔다.
빨강 컵
<< 올리브의 말 >> - 엘레강스와 에니시테를 죽인 살인자라는 게 밝혀지게 되죠. 카라에 의해 장님이 된 후 도피하려 하지만, 셰큐레의 시동생 하산의 칼에 팔과 목이 잘리고 맙니다.
* 멋진 말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바로 그 말이 된다.
* 문득 내 마음속에 있는 세밀화가의 존재가 두려웠다. 마치 내 속에 있는 다른 영혼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그 영혼을 대하기가 부끄러웠다.
* '스타일'이 있는 것은 악마다.
* 이 장인 세밀화가들은 나의 형제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너무나 사랑했다! 나는 내가 세밀화가인 것이 행복했다.
* 자네의 에니시테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죽였네. 첫째, 그가 장인 오스만에게 배네치아 화가 세바스티아노를 원숭이처럼 흉내 내라고 강요했기 때문이야. 둘째는 내가 마음이 약해진 순간, 그에게 '저만의 화풍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기 때문이지. (중략) 난 스타일을 근본이 없고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겼고, 그 의심이 내 속을 갉아먹고 있었어. 나만의 스타일이 있기를 바라면서도, 그것을 악마의 유혹이라고 여겼다네.
* 유럽 화가들의 화풍이 퍼질수록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우화를 자신의 우화처럼 말하는 것이 곧 재능이라고 생각하게 될 거야.
* 빨간 장검이 먼저 내 손을 잘랐다. 그러고는 곧바로 내 목을 잘라 바닥에 머리가 떨어졌다. 나의 머리가 잘려 나갔다는 것을, 가련한 내 몸이 나를 버리고 비틀거리며 내디딘 이상한 두 번의 걸음, 단검을 바보처럼 흔드는 모습, 그리고 목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치며 바닥으로 쓰러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 여전히 걷고 있는 가련한 내 다리는 마치 죽기 전에 몸부림치는 가련한 말처럼 헛되이 발버둥쳤다.
* 모든 시간이 지금 이 시간이 되었다.
빨강 꽃
<< 나비의 말 >> -엘레강스 살해범으로 지목된 궁정화가 3인방(황새, 올리브, 나비) 중 한 사람입니다.
* 나는 멋진 말 그림을 그릴 때에만 난 자신이 될 수 있다.
* 보지 못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은 같지 않아. 어둠과 밝음은 같지 않다. 그림자와 더운 곳도 같지 않다.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도 같지 않다!
<< 에니시테의 말 >> - 비밀리에 서양 화풍으로 그린 책을 만들어 가던 중, 전통적인 화풍을 고수하는 세밀화가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결국 살해되고 맙니다.
* 이 멋진 승천 중에 보았던 색들을 무슨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모든 세계가 색으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것이 색임을 나는 보았다. 나를 다른 모든 것들과 구별하는 힘이 색에서 나온 것이고 지금 나를 사랑으로 껴안고 세계와 연결해 주는 것도 색이란 걸 깨달았다.
* 이런 빛의 축제 속에 있으니 죽음의 순간에 어째서 꽉 끼는 윗옷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편해졌는지도 알았다. 이제부터 내게는 그 어떤 것도 금지되어 있지 않고,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서 살 수 있는 영원의 시공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이해하자마자 '그분'께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어떤 것에도 비유할 수 없는 그 붉은색 존재를 두려움과 행복이 뒤섞인 경외감 속에서 느꼈다. 금세 모든 것이 새빨갛게 되었다. 이 색의 아름다움은 나의 내면과 온 세계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빨강 등
<< 악마의 말 >> - 말 그대로 Devil 입니다.
* 세상에는 선만큼이나 악, 정직만큼이나 죄도 필요하기 때문에 나의 역할은 아주 중요합니다. 신의 질서가 나 때문에 지켜지고 있고, 그것이 숭고한 신의 동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나쁘고', 어떤 권리도 없다는 사실은 말 못할 나만의 고통입니다.
* 많은 사람들은 나의 부추김이나 속임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 욕정, 부족한 신념, 저질스러움 그리고 대부분은 아둔함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 사상이란 그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세밀화가가 무엇을 그렸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그린 방식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추상적인 개념이어야만 합니다.
<< 셰큐레의 말 >> - 어린 시절 맺어지지 못했던 카라가 12년 만에 돌아오자 다시 설레지만, 주변의 시선과 제약으로 인해 선뜻 다가가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살해범을 잡기 전에는 동침을 금한다는 조건과, 아버지의 책을 완성한다는 조건으로 카라와 결혼을 하지만, 책을 완성해내지는 못합니다.
* 페르시아에서 영감을 받아 육성되고 이스탄불에서 100년간 꽃을 피운, 이 그림 장식과 그림에 대한 열정의 빨간 장미는 이렇게 시들어 갔어요. 세밀화가들 사이의 다툼, 끝없는 물음의 계기가 됐던, 헤라트파의 옛 장인들과 유럽 장인들의 화풍 간의 대립도 어떤 결과에도 도달하지 못했죠. 왜냐하면 그림 자체가 버림받았기 때문이에요. (중략) 세상이 한때는 아주 다른 식으로 보였다는 사실이 무자비하게 잊히고 말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