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사람들에게 직업을 소개해야할 때, 괜히 긴장하게 된다. ‘교사’라고 말하는 순간, 상대가 가지고 있는 고정된 이미지가 나에게 그대로 투영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사회적으로 선호되는 직업을 가졌다고 감탄하고, 누군가는 ‘선생님이니 이것저것 잘 아시겠네요’라며 기대를 덧붙인다. “요즘 애들이 힘들게 한다던데 어떠세요?” 같은 질문 앞에서는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잠시 망설여진다.
그래서 나는 보통 “좋을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어요.”라며 두루뭉술하게, 사람 좋은 웃음으로 답한다. 사실은 교직 생활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힘든 일을 여러 번 겪었고, 상담과 진료를 꾸준히 받아야 했으며, 일과 직장에 대한 불만을 입에 달고 살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낯선 이가 기대하는 ‘교사’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하기엔 TMI이기도 하다. 특히 교직을 헌신과 봉사의 ‘성직’처럼 여기는 사람이라면, 나는 아주 부정적이고 부적합한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교사라고 밝히면 대화가 자연스럽게 학교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이 또한 곤란할 때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학교와 선생에 대한 좋은 기억이 많지 않다. 나와 비슷한 세대, 혹은 그 윗세대는 체벌이라는 이름으로 분풀이를 당하고, 사적인 감정으로 차별을 겪으면서도 항변할 수 없었던 기억을 품고 있다. 내가 교사로 일하기 시작한 2010년대 중반부터 체벌이 금지되고 학생인권조례가 생기면서 학교 현장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학생은 여전히 약자의 위치에 머물러 있다.
게다가 달라지지 않은 부분들도 있다. 고등학생이 되면 아이들은 수능과 대입이라는 절대적 목표 아래 하루 종일 공부에 시달린다. 성적표가 나올 때마다 남과 비교당하고,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모두가 같은 스트레스 속을 지나간다.
내가 가르치는 영어 교육 이야기가 나오면 더욱 말문이 막힌다. 한국의 영어 교육이 가진 한계를 비판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 또한 그 구조의 일부라는 생각을 피할 수 없다. 고등학교 영어 수업에서는 말하기·쓰기 영역이 여전히 철저히 외면받고 있어, 12년 동안 영어를 배우고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학교 수업은 수능 문제 풀이를 위한 기계적 연습으로 채워진다. 2024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고등학생의 67%가 사교육을 받고, 많은 학생이 이미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하고 학교에 온다. 이런 현실에서 내신 시험은 더욱 ‘누가 더 빨리 정답을 찾아내는가’를 가르는 방식으로 굳어지고 있다.
학교가 아이들을 지켜 주지 못한다는 현실도 있다. 2023년 국가데이터처 보고서에 따르면 아동·청소년 자살률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고, 삶의 만족도는 OECD 국가 중 최하위였다. 1인당 GDP가 3만 7천 달러에 도달한 선진국이라 불리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청소년이 가장 불행한 사회’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 구조의 부품으로 일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칠 수 없다.
그래서일까. 내가 교사라는 사실을 밝힐 때마다, 이 숫자들과 현실들이 떠오른다. 교사라는 말 한마디에 담긴 기대와 이상, 그리고 내가 마주하고 있는 실제 교직의 무게 사이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일어난다. 그 감정은 민망함인지 죄책감인지, 혹은 어딘가의 공허함인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내가 교사라는 이름을 가진 이상 이 불행한 구조와 무관한 존재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불편함이 나를 주저앉히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고민하고, 질문하고, 흔들리면서도 나아간다. 학교를 둘러싼 거대한 구조를 혼자 바꿀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맡은 자리에서 이어가는 작은 노력들이 언젠가 변화를 만드는 기반이 되리라는 믿음만큼은 놓을 수가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