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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영 Mar 12. 2022

지하철의 단막극

    처음에 그는 아무의 시선도 끌지 않았다.

더러는 서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몇몇 비어있는 자리도 보이는 한가한 오후의 A 트레인은 그 자리와 시간에 걸맞은 승객들로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정거장에 설 때마다 타고 내리는 사람도 모두 비슷비슷한 수준이어서 늙고 젊음에 관계없이 적당히 낡았고 퇴색한 모습에 짙은 피곤이 깔려 있었다. 그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갓 블레스 유, 주의 축복이 있기를.”


언제 어디에서 탔는지 모르지만, 그의 축복을 기원하는 목소리가 들렸을 때 처음으로 나는 '이건 또 무언가. 노상 전도꾼인가, 구경거리가 생겼구나' 흥미 있게 그쪽을 쳐다보았다. 출발역 가까운 곳에서부터 종착역 가까운 곳까지 긴긴 시간을 멍하니 앉아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유리창과 천장 사이에 있는 광고를 읽고 또 읽어 보아도 시간은 남기 때문이다. 

그는 객차 앞쪽에서 손잡이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는데 낡은 스웨터 위에 바래고 때가 타서 원래의 색깔을 가늠할 수 없는 코듀로이 재킷을 걸친, 40대로 보이는 흑인 남자였다. 낡고 초라해 보이는 외양이긴 하지만 훤칠한 키와 그 목소리는 위엄이 있어 보였다...


  “여러분, 이 지하철은 땅 밑을 달리고 있기 때문에 전기가 나가면 암흑인 것을 아십니까? 그러나 땅 위 저곳에는 지금 찬란한 태양이 비추고 있습니다.”


그는 마치 연극배우가 무대 위에서 대사를 외우듯 했는데 아주 멋진, 깊게 울리는 목소리는 모든 사람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나는 궁금해서 머리를 빼고 그를 관찰해보았는데, 그 목소리에 걸맞은 아주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는 지퍼가 달린 검은 비닐백을 가지고 있었는데, 말을 마친 후 지퍼를 열고 그 속을 흘낏, 들여다보았다. 나는 그 속에서 초나 회중전등 같은, 어두움이나 빛과 관련된 물건을 팔려고 꺼내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무료하게 앉아있던 몇몇 승객들이 흥미를 느끼고 그를 보았을 때 그는 한 개의 노란색 M&M's 초콜릿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소중한 듯 그것을 들여다보던 그는, 한 개를 자신의 입속에 툭 던져 넣었다. 

그의 얘기치 못한 행동은 점점 우리 관객들의 흥미를 자아내게 했다. 그가 초콜릿을 천천히 씹어서 목구멍으로 넘길 때까지 우리는 끈기 있게 그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무언가 대단히 흥미로운 일들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여러분, 잠깐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들 관객들은 그 호칭이 맘에 들었다) 성경을 읽어 보셨나요? 요즈음 나는 나의 확실한 종교관에 잘못된 점은 없는가, 내가 오해하고 있는 것은 없었는가, 회의에 빠졌었습니다.”


아하, 전도사로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여러분, 혹시 잔돈이 있으면 이 사람에게 주어도 좋습니다. 나는 헛되이 낭비하지 않고 오늘 저녁 식사로 핫도그를 먹으려고 합니다. 다운타운 파크 애비뉴 코너에서 아주 맛있는 핫도그를 파는 친구가 있습니다. 좋은 친구입니다. 내게 돈을 내지 말고 그냥 먹으라고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에게도 부양할 가족이 있으니까요.”


깊고 울리는 목소리로 순식간에 돈을 구걸하는 거지로 전락한 이 신사는 또다시 지퍼를 열고 초록색의 초콜릿을 꺼내 들어 면밀히 살핀 후 입에 툭, 던져 넣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 서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에... 또, 이 세상의 어떤 종교도 성경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모든 종교의 시작과 끝은 신, 곧 하나님이니까요. 그리고 성경 말씀은 곧 하나님 말씀이 아닙니까…? 그런데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세요. 하나의 하나님을 놓고 자기 하나님만이 옳다고 서로 죽고 죽이고 있습니다. 오, 주여, 그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잔돈을 구걸하는 걸인에서 또다시 위대한 설교자가 되어 축복을 기원하는 그에게는 두 개의 입이 있는 듯했다. 새알 초콜릿이 들어가는 입과 말씀을 전도하는 입이….


아무도 그에게 잔돈을 건네주려는 눈치가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도 돈을 얻기 위해 움직일 생각도 전혀 없는 듯했다. 아니, 그 일은 잊은 듯, 자기 생각에만 골똘히 빠져버린 것 같았다.

나는 흥미로운 얼굴로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웃음을 던지는 뚱뚱한 흑인 할머니 옆으로, 좀 더 그와 가까워지기 위하여 슬쩍 자리를 옮겼다. 그 순간 그와 나의 눈이 마주쳤는데 자신만만한, 모든 것을 소유한 듯한 빛나는 눈이어서 나도 모르게 움찔하게 되었다.

 

 타는 사람보다 내리는 사람이 많아져 이제 서 있는 사람은 그 혼자가 되었다. 정차했던 차가 문을 닫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동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깜빡 생각이 난 듯 오른쪽 손을 들어 올려 마치 중요한 연설을 시작하려는 사람처럼 둘째 손가락을 허공으로 높이 올렸다.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 이 장소를 어느 높은 빌딩, 전망 좋은 위치에 자리한 콘퍼런스장이라고 생각합시다. 우리는 테이블에 둘러앉아 우리 앞에 놓인 중요한 사항에 관한 의견 교환과 생각을 나누기 위해 특별히 초대된 사람이라고 생각합시다.” 


그는 또 대기업의 총수가 되어 중역 회의를 주재하는 노련한 경영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변치 않는 것은 지퍼 달린 비닐백 속에서 지속해서 새알 초콜릿을 꺼내 입속으로 던져 넣는 것이었다.


이상한 것은 멍하니 졸면서 앉아있던 승객들에게 온 변화였다. 마치 총수의 새로운 프로젝트에서 제외되면 안 될 것 같은 긴박감이 생긴 것이었다. 모두 그를 총수로 모시는 데 전혀 이의가 없는 선정된 이사가 되어 주주총회 같은 막강한 모임에 초대된 중요한 존재 같아진 것이었다. 우리 승객들은 정말 피곤하여 입을 벌리고 자는 몇 사람을 빼놓고는 서로서로 눈인사로 재미있다는 듯이, 서로 통하는 사람들의 웃음을 나누었다. 입속의 초콜릿이 완전히 목구멍 속으로 사라진 후 그는 마치 유세장에 모인 청중들을 향해 연설하는 정치가 같기도 하고, 수십만 신도들 앞에서 설교하는 부흥사 같기도 한, 비장한 얼굴로 우리들을 둘러보았다. 


  “여러분, 그러나 요즈음 종교는 타락했습니다. 아니, 가야 할 방향을 잃었다고 해야 할까요... 예로부터 타락하기는 했었지만, 방향만큼은 뚜렷했지요. 종교, 신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엄청난 치부를 한 국가와 단체와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제는 그들조차 방향을 잃었습니다. 피를 요구하고, 목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조차 자신의 목숨으로 피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들의 의견과 생각을 나누는 일에는 관심도 없는 듯 전혀 기회를 주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타이르듯 명료한 어조와 목소리로 연설을 계속하였다.


나는 내가 내려야 할 정거장이 가까워져 올수록 애가 탔다. 나에게는 동전이 있었다. 나는 눈에 띄지 않게 동전을 찾아 쥐었던 손을 슬그머니 다시 가방에 집어넣어 종이돈으로 바꾸어 찾아 쥐었다. 어쩐지 이렇게 묵직한 이야기를 공짜로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았는데 그에게 돈을 건네줄 기회가 좀처럼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


  “여러분, 그러나 그 무엇도 내 종교관을 바꿀 수는 없음을 알았습니다. 내 종교관은 평화, 오직 평화입니다. 그리고 그 평화의 빛은 오직 성경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사랑, 사랑입니다...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그 안에서 진리를 찾으십시오.”

 

우리 초대된 사람들은 침묵하였다. 그 침묵 속에는 제법 심각함도 깔려 있었다. 그는 지퍼가 달린 비닐백 속에서 이번에는 새알 초콜릿 대신 낡고 작은 성경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높이 들어 흔들었는데, 나는 그가 그 작은 성경책을 입속에 넣는 것은 아닌가 깜짝 놀랐다. 그만큼 그에게는 깊고 울리는 목소리와 그 웅변을 뒷받침시키는 강렬한 눈빛의 기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는 흘낏, 어두운 창밖을 살펴보는 듯하더니 이윽고 내려야 할 곳에 닿았음을 확인한 듯, 마치 무대 위의 연극배우처럼 슬픈 표정을 지으며 신음을 토해내었다. 


  “갓 블레스 유. 신의 축복이 그대에게, 신이여, 슬퍼하지 말고 저들을 축복하소서.”

 

막은 내리지 않았지만 우리는 공연이 끝난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여지없이 한 알의 새알 초콜릿을 꺼내 유심히 들여다본 후 입을 열었다.


  “여러분, 제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제 햇빛이 가득한 저 위의 아름다운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성경을 잊지 마십시오.”


그는 둘째 손가락을 높이 쳐든 채, 방청객의 반응을 기다리는 무대 위 배우처럼 잠시 침묵하더니, 마침 정차하여 열린 문으로 급히 나가버렸다, 누구와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는 듯….


나는 그곳에 있던 모두가 주먹 속에 따뜻해진 동전을 움켜쥐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모두 잠시 취했던 꿈에서 깨어나듯 주위를 둘러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모두 미소가 서려 있었는데, 어쩐지 그 전보다 확실히 환해지고 밝아진 것 같아 보였다. 


그가 내려버린 정거장을 뒤로 다시 어둡고 긴 터널을 달리는 사람들 속에 앉아 나는 어두운 창밖을 응시하며 그로 인해 우리들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그의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의 하나님의 세상은 빛인 것이다. 우리들은 밖의 빛을 향해 총총히 각자의 갈 곳을 찾아 흩어져갔지만 보통날과는 다른 충만한 그 무엇을 가슴에 담은 특별한 날이 되었음을 알았다. 내 생애 아마 단 한 번일지도 모르는 15분간의 만남은, 내가 보았던 그 어떤 연극 무대보다, 몰두했던 책보다 강하게 파도처럼 내 가슴을 메워 나를 생각하게 하였다. 


오늘도, 그리고 많은 날들을 부양할 가족이 있는 좋은 친구인 핫도그 장사에게서 식사를 해결할 그는 정말 성경 속에서 진리를 찾았기에 세상 빛 아래 설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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