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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영 Mar 15. 2022

기적을 믿는 의사

    그의 불행은 2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1989년 4월 30일 밤 아홉 시 삼십 분부터였다. 그것은 마치 정교한 줄자로 하얀 백지에 문신해놓은 듯 확연하였다. 

  

  “그날 이후로 내 인생은 더는 떨어질 수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어요.” 


그 말을 하는 김일호 선생은 정말 그 깊은 나락의 구덩이 속에서도 멈추지 않으며 계속되는 시련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무엇도, 어느 단어도 그를 위로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말에 동감한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는 더더욱 없었다. 


내가 김 선생을 그의 병실에서 다시 보게 된 것은 꼭 8년 만이었다. 내가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8년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내 불행은 12년 전 4월 30일에 시작되었습니다'라던 그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제는 그가 계산해 낸 20년이라는 햇수에서 쉽게 8년 만에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는 계산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8년 전에도 그는 고난 속에서 허덕이는 가련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었다. 그때는 병실에서가 아니었으나, 그는 지금보다 더 큰 고난에 빠져 있었다. 지금 그 고난을 간신히 헤치고 나온 그는 더 부서지고 타고 남아 재밖에 남지 않은 모습으로 병실 침대에 누워 시련의 날들을 더듬어보고 있었다. 


 김일호 씨 자신이 정형외과 의사이다. 1960년도 말 미국에 온 후, 순조롭게 의사로서의 길을 밟아가면서 아름답고 명랑한 아내와 두 딸을 둔 아버지로서 그에게 나쁜 일이라는 것은 없었다. 30년 전 미시간주의 앤 아버시에서 한국인 의사 중에 김일호 씨보다 더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활동적인 아내가 이룬 부동산 투자는 의사 직업을 그만두어도 좋을 만큼 탄탄했다. 

20년 전 그날, 김일호 씨와 그의 아내 김혜수 씨는 열흘간의 크루즈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큰딸은 대학으로, 그리고 아직 고등학생인 작은딸은 기숙학교로 각각 집을 떠나 있었던 그들에게는 자식같이 사랑하는 개가 있었다. 이 개는 그들이 여행을 떠날 때마다 퍼피 홈(강아지 호텔)에 맡겨지곤 했는데, 그의 아내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개를 찾으러 차를 몰고 나갔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다. 개를 찾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모퉁이에서, 마주 달려오는 음주 운전자의 차에 정면으로 받혀 그 자리에서 즉사한 것이다. 그 순간 튕겨 나간 개는 용케도 아무 상처 없이 집을 찾아가 문을 긁어 혼자 돌아왔음을 김 선생에게 알렸고 이에 의아해서 밖으로 나간 김 선생은 길모퉁이에서 난 사고를 보게 되었다. 사고 장소로 달려간 김일호 씨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된 아내의 모습과 상대편 운전자에게서 풍기는 지독한 술 냄새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김일호 씨의 인생은 나락으로,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내 김혜수 씨를 즉사시킨 상대편 자동차의 운전자는 사고가 난 후 경찰이 와서 이것저것 묻는 데도 술이 깨지 않았는데, 그 옆에 바짝 붙어 앉아있던 젊은 여자도 역시 곤드레가 되어있었다. 경찰은 그의 운전 면허증을 확인해 본 뒤, 수갑을 채우지도 않고 여자는 떼어놓은 채 그를 고이 순찰차에 실어 그의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귀가 조처하였다. 그리고 사고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김혜수 씨는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 사망 확인을 받은 후 부검소를 거쳐 장의사로 갔다가 무덤에 묻혔다. 이 모든 과정을 정신없이 치르면서 김일호 씨는 거의 넋이 나갔다. 두 딸이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다시 학교로 돌아간 후 커다란 집에 덩그렇게 혼자 남은 김일호 씨는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몰랐다. 병원에서 환자를 보고 돈을 버는 일이야 김일호 씨의 몫이지만 당장 끼니때가 되어도 쌀을 씻어 밥솥에 넣고 버튼만 누르면 되는 일 한번 해 본 적이 없는 터라 그 황망하고 생소하게 다가온 일상생활의 먹고사는 일까지 챙겨야 하는 환경에 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다. 너무나 갑자기 찾아온 불행으로 그는 마치 슬픔을 미처 느낄 수조차 없는 막막한 사막 속에 혼자 버려진 듯 방향을 잡을 수도 없었고 이따금 아득한 무아지경에까지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그래서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그래도 세상에 남아 사는 사람은 살아있기 때문에 해야 할 일들이 끊임없이 마치 일몰의 파도처럼 밀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여기저기에서 날아온 수많은 우편물이 산처럼 쌓여있는 것을 보았다. 사고를 당했던 차는 그냥 폐기해버리고 잊고 있었다. 그리고 보험 회사에서 온 우편물들을 추려 변호사에게 건네주고 보험 처리 등에 관해 문의하였다. 그런데 변호사를 통해 그동안 뜻밖의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대편 보험 회사에서 김일호 씨의 보험 회사에 손해배상을 청구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 일인지 피해자인 사망자가 자신의 차를 과실로 들이박고 사망한 것으로 처리되어, 가해자인 상대편이 오히려 부상으로 어느 기간 일을 할 수 없게 된 것과 사고로 정신적인 피해를 본 데 대한 보상을 청구했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태가 파악되었는데, 여자와 함께 술에 취해 운전하다 그의 아내를 죽게 한 상대방은 그 지역에서 대단히 유력한 변호사였다. 그의 로펌에는 수십 명의 쟁쟁한 변호사들이 그의 명예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 상사를 추락시킬 수도 있는 모든 위험한 요소들을 제거해 버렸다. 음주 운전을 한 기록은 물론 없었고 완벽하게 조작된 본인의 운전 부실로 인한 사고로 기록이 모두 정리되어 있었다. 그 무리와 싸워서 이길 승산은 전혀 없었다. 김일호 씨의 변호사는 애초에 이 무리와 싸울 수 있는 그릇이 아니었다. 그래도 변호사의 수임료는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던지 계속 끌고 나갔다. 민주주의 국가 미국에서는 있는 자가 힘을 제대로 발휘할 때는 그 어떤 함정도 비켜 지나갈 수 있고 벽을 뚫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조그만 동양인 의사 김일호 씨는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아내를 잃고 보상금을 받아야 하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고소를 당한 처지가 된 그는 분하고 억울해서 병원 일은 제쳐두고 이 재판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힘 있는 자는 서두를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1년이 가고, 2년이 갔다. 대학에 가 있던 큰딸이 돌아와 함께 싸우기 시작했다. 똑똑하고 예민한 큰딸 에이미는 서류 한 장, 한 장을 들춰가며 법 조항에 대해 연구해가며 이 거대한 벽과 싸우기 시작했다. ‘정의는 이긴다’는 신념이 갑자기 사랑하는 아내와 엄마를 잃은 남편과 딸에게 망령처럼 들러붙어 세상의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다. 


3년, 4년이 흐르면서 에이미는 신경쇠약으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김일호 씨는 병원문을 닫고 끈질기고 외로운 투쟁을 했는데, 그 당시 그의 모습은 돈키호테 같았다고 그 당시의 그를 아는 사람이 말했다고 했다. 에이미는 그때쯤 전문의로부터 신경쇠약에 의한 조현병 진단을 받고 요양원을 드나드는 형편이 되었다. 보다 못한 한국의 큰형님이, 한국에 얌전한 아주머니가 있으니 재혼하라고 권유를 해왔다. 김일호 씨는 한국에 나가서 그 아주머니와 재혼을 하고 함께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끝도 없이 계속되고 연기되는 재판에 대처하며 새 생활을 시작할 마음으로 뉴욕의 한 병원에 취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면접을 본 후 병원에 취직하기 전 반드시 받아야 하는 건강검진을 하였는데 그 건강검진에서 대장암이 발견되었다.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다행히 아직 증상이 없는 초기여서 수술을 하고 병원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담당의의 조언과 수술 후 예후에 대한 의사로서의 자신의 판단으로 방사선 치료까지 끝낸 후, 조심스럽게 자신의 몸을 돌보며 지내야 했다. 

그때부터 같은 집에 살던 에이미의 신경쇠약 증세가 더욱 심각해지기 시작해져, 재혼해 온 아주머니가 참고 견디기가 힘들게 되었는지 툭하면 가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실을 알고 보면 그 아주머니에게는 이미 결혼하여 처자식이 있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을 미국으로 데려와 가까운 곳에 방을 얻어주고 드나드는 것이었다. 내가 김일호 씨를 만난 것이 이때쯤이었다. 그 당시 나는 부동산업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집안 친척이 그를 내게 소개해준 것이다. 아내가 사 두었던 미시간주에 있는 아파트를 팔았는데 그 돈으로 듀플렉스를 하나 사서, 자신이 죽더라도 딸이 살아갈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해놓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를 부동산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 그는 후욱, 불면 날아갈 듯 여위고 바스러져 보였다. 딸 에이미를 함께 데리고 나왔는데 사정을 미리 들었던 터라 내색을 안 할 수는 있었지만 나를 당황하게 만드는 언행이 섬뜩하도록 생소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걸친 재킷과 흐트러진 머리칼도 놀랄 만큼 예쁘고 깨끗한 외모를 가리지는 못했다. 그 에이미의 언행과 외모는 내 가슴을 아프게 할 만큼 천진하고 예뻤다. 커다란 검은 눈동자는 산속에서 길 잃고 헤매는 슬픈 아기 사슴 같은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눈에 초점이 없었다. 그냥 멀고 깊은 곳을 바라보는 듯했다. 갑자기 엄마를 잃고 외롭게 거대한 벽에 대항해 싸우는 동안 삶의 열정과 시카고 대학을 다니던 명철한 두뇌는 지치고 사그라져서 그냥 타지도 못하고 꺼져버린 재가 되고 만 듯했다. 마치, 잠깐 세상에 다니러 온 천사 같다고 표현하면 될까…. 그때 사고만 안 일어났더라면, 그 엄마가 그래서 살아만 있었다면… 개를 키우지 말고 살았더라면……. 내 아픈 가슴속에 그들을 향한 수많은 생각들이 바쁘게 오갔었다. 

이 천사 같은 에이미와 김일호 씨와 재혼해서 온 아주머니 사이의 갈등은 가늠해 볼 수 없었지만, 실질적으로 에이미가 부엌의 가스레인지를 불이 붙지 않은 상태로 켜놓아 화재 위험은 물론 가스 중독으로 죽을 뻔한 사건이 생기면서 아주머니는 잠시도 같이 살지 못하겠다고 선언하고 집을 나가버렸다. 이렇게 이 아주머니와의 재혼은 실패로 끝났다. 죽은 아내가 억척스럽게 일궈놓은 재산도 그 통에 흠뻑 날아갔다. 


그 후 그는 에이미와 둘이 살면서 다행히도 병원에서는 계속 일을 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직접 환자를 보는 일이 아니라 방사선 엑스레이 판독 전문의로서 앉아서 필름만 들여다보면 되는 일이었으므로 가능했던지도 모른다. 에이미는 증세가 호전되기도 했다가 나빠지기도 하면서 정신병원을 드나들었다. 나는 이 불쌍한 부녀를 만나는 것에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원래는 부동산 에이전트로 만난 관계인데 이 부녀의 비극에 관여해서 하소연을 들어주고 도와줄 사람을 물색해주고 슬슬 교회로 전도하려고까지 하다 보니 내 정신 상태에 무리가 왔다고나 할까…. 남의 불행으로 내가 너무 슬프고 괴로운 것이 싫어졌다. 실질적으로 내가 도와줄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느꼈다. 집을 사라고 보여주는 일도 가당찮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나는 그와의 연락을 끊었다. 그리고 8년이 지난 후 이번에는 병실에서 만난 것이다. 


그래도 세월이 흐르는 그동안 김일호 씨에게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작은딸이 대학을 나오고 대학원을 졸업하더니 좋은 신랑을 만나 결혼도 하여 사위도 보았고 곧 손주도 보게 되었다고 했다. 옛날 보험 회사와의 송사는 손을 떼었는데 분함보다는 오히려 평화로워졌다고 했다. 살다 보면 땅끝에 떨어져 하늘을 쳐다볼 일이 없을 것 같아도, 그래도 태양은 골고루 비춘다던가…. 그런 기쁜 일이 에이미를 자극했는지 갑자기 제정신이 돌아온 에이미는 학교로 돌아가 미처 마치지 못한 학부 과정을 끝내고 계속 공부를 한다고 학교에 남아 있다고 했다. 좋은 일이 자꾸만 생기는 듯했다.  


  “그런데 지난가을에 암이 또 찾아왔어요, 이번에는 독한 놈이에요. 전립선에서 시작된 암이 순식간에 콩팥을 거쳐 뼈에까지 침범했어요. 의사가 길면 4개월이라고 똑똑히 말해주더군요. 같은 의사끼리니까 확실한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래도 예의를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일어나 앉았다. 이번 입원 사유는 폐렴이었다. 면역성이 약한 노인들에게 폐렴은 무서운 병이다. 특히 암 환자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열이 있는지 얼굴이 발그레하다. 


  “요즘 에이미는 잘 지내고 있어요?”  

  “네. 잘 돼 나갈 것 같아요. 이제 준비를 해야 하는데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 생각하니까 무얼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쓸데없이 죽은 와이프 생각만 자꾸 하게 되고….” 


그는 말을 하다 힘이 들었는지 긴 한숨을 내쉬고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블라인드가 쳐진 창문으로는 밖을 내다볼 수가 없을 것 같아 블라인드를 올리려 하자 그가 만류했다. 


  “눈이 부셔요, 블라인드를 그냥 놔두세요. 그래 봤자 하늘에 구름밖에 안 보일 텐데 그 구름을 보면 참 이상해져요. 그 옛날 죽은 아내와 어린 딸 둘을 데리고 한국을 떠날 때 일가친척들이 버스를 대절해 공항에 나와서 우리를 배웅해 줬거든요. 지금같이 공항 터미널에서 직접 비행기를 타는 시절이 아니었으니까요…. 환송 플랫폼이 따로 있어서 환송 나온 사람들은 거기서 손을 흔들고 우리들은 비행기까지 걸어가서 트랩을 올라갔지요.  그때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하얀 구름이 푸른 하늘에 흐드러진 꽃처럼 펼쳐져 있는데 정말 장관이었어요. 그때는 모든 사람이 나를 부러워했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어요. 얼마 전 한국에 나가 보니까 그때 나를 부러워하던 일가친척들이 다들 너무나 행복하게 나보다 잘사는 거예요. 이제 죽을 날을 세어보고 있으려니 그 모든 지나간 일들이 허황하게 보이네요….”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마지막 날을 세어 보다 보니 철학자가 된 듯, 그의 이야기는 허약해서 간간이 끊어지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단편소설처럼 이어졌다.  


  “그래도 딸들 앞으로 사는 데 보탬이 되라고 펀드를 해 주었는데 제대로 챙기면서 살아갈 수는 있을지 모르겠어요. 누구에겐가 부탁을 단단히 해놔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어요.” 


그는 온 얼굴에 주름을 모으며 또다시 블라인드가 쳐진 창문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4개월밖에 못 산다고 하던 의사가 그래도 항암 치료를 받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그만두려고 했지만 그게 아니더라고요. 와이 낫(why not), 못할 거 뭐 있나 싶더라고요. 첫 번째 항암 주사를 맞았을 때 이틀 만에 머리가 싸악 빠지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죽는 것이 낫겠다 싶더라고요. 그런데 두 번째 맞을 날짜가 되니까 그래도 살기 위해선 죽을 듯이 고통스러운 주사지만 맞아야겠다 싶더라고요. 그러면서 여섯 번 사이클의 항암치료를 끝냈어요. 참 모질지요?” 


그는 목이 타는지 곁의 컵에 있는 물을 빨대로 빨아서 마셨다. 마신다기보다는 목을 슬쩍 축인 듯 컵 속의 물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찾아온 게 폐렴이에요. 그런데 지금이 의사가 말한 4개월 째예요…. 그런데 이상하게 이제 나는 죽는다, 하는 마음보다는 살 것이다, 하는 쪽으로 마음이 자꾸 가기 시작해요. 4개월밖에 못 산다고 할 때는 4개월 후면 죽는구나, 했는데 막상 4개월이 지나니까 나는 이제 산다, 하는 확신이 자꾸 들기 시작해요. 어쩐지 항암 주사의 효과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힘들게 말을 이어 가면서도 그는 하고 싶은 말, 토해내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은 듯했다. 하지만 더 말하기가 힘든 듯 입을 다물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게서 어떤 확신의 답을 듣고 싶은 듯했다. 


  '네. 이제 김 선생님은 죽지 않습니다. 앞으로 5년, 10년, 20년은 더 사실 겁니다.'


이 말을 내게서 듣고 싶은 것일까.. 간절한 여망이 내 눈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힘차게 빛났다. 가장 절망스러운 환자에게 의사들이 갖는 마지막 믿음이 “기적”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도 의사니까 아마 “기적”을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믿고 싶은 기적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며 병실을 나섰다. 그는 의사가 선언한 4개월보다 1년을 더 살고 지난 2월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와 마지막 만났을 때 그는 내게, 그가 믿은 대로 기적의 1년이라고 했다. 기적은 영원한 것은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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