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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영 Mar 11. 2022

우리가 믿는 것

    응급실에 환자가 앰뷸런스에 실려 들어왔다. 몸이 바람 꽉 찬 풍선같이 퉁퉁 부은 데다가 혼수상태였다. 혼비백산한 듯 턱을 덜덜 떨며 말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는 남편이 함께 왔다. 겨우 진정시킨 후 그가 하는 말로는 몸에 좋은 상황버섯을 먹었는데 저 지경이 되었다고 했다.


병원 응급실은 이름을 쓰고 이름이 불릴 때까지 순서를 기다려야 하는데 앰뷸런스에 실려 오면 순서 없이 베드로 직행한다. 남편의 말을 들은 의료진이 지체하지 않고 위 세척을 하고 약물 투여를 하니 정신을 차린 듯 깨어나 여기가 어디냐고 묻는다.


나는 병원에서 일하며 많은 케이스를 보아왔지만 때로는 의료진에 경외감을 느낀다. 발달한 현대 의학의 덕이라고는 하지만 의료진의 재빠른 대처가 생명을 살리는 것을 이따금 보게 되면 우리는 정말 좋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루가 가기 전에 모든 치료를 끝내고 퇴원하는 환자를 보며, 재빨리 응급처치를 안 했으면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고 담당 의사가 주의 사항을 일러주며, 다시는 그런 것 먹지 말라고 당부한다. 상황버섯인지 무언지 모를 것을 몸에 좋다고 남편과 같이 먹었는데 남편은 멀쩡하고 부인만 죽을 뻔했던 것은, 그 함유물 중 무엇에 대해 부인의 체내에서 어떤 거부 반응이 왔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런 미련한 짓일랑은 다시는 하지 말라고 통박을 주며 배웅하다 보니 꼭 남의 일만은 아니다.


 오래전, 정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일지도 모른다. 우리 집에는 보따리 장사라는 아줌마가 이따금 들렸는데 그의 커다란 가방 안에는 외제 물건이 항상 가득했다. 그 아줌마가 어떤 경로를 통해 그 물건들을 구할 수 있었는지는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었으나, 그 당시 귀하고 귀한 미제 물건들은 구경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그냥 씹어 삼키기는 아까워 입속에 넣고 될수록 오래오래 물고 있다가 그 안에서 더 이상 녹을 수가 없을 지경이 되어야 천천히 그 맛을 음미하며 씹던 새알 초콜릿, 색색이 맛이 다른, 캔에 담긴 동글동글한 챰스 사탕, 리츠 크래커 등이 단골 메뉴였지만 그래도 젊은 여자의 눈이 먼저 가는 것은 화장품들이었다. 지금은 최고급 백화점에 한국 화장품 코너가 자리 잡고 있는 만큼 뛰어난 품질이 세계적이라 해도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때는 외제 화장품을 구하는 것은 이 보따리 장사 아줌마를 통하지 않고는 구경도 할 수 없었다. 금색의 도장 같은 꽃 모양 디자인에 노랗고 동그란 통에 들어 있는 코티 분 하나와 레브론 로션 하나 사서 바르면 당장 서구형의 미인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 행복하였다. 거기다 윤기 나는 분홍색 립스틱을 바르면 외제 화장품 사용자로서 자부심을 가져도 좋았다.


 미국에 오고 한참 지난 후, 나는 드럭 스토어에서 내가 화장품 아줌마에게서 구해 아껴 바르던 파란색 크림 통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지금은 미인의 기준이 어떤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젊은 여자의 피부색이 검거나 누르퉁퉁하면 아무리 잘생긴 외모를 가졌어도 미인의 축에 들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무조건 예쁜 여자 소리를 들으려면 맑고 깨끗한 흰 피부가 우선이었다. 뽀얗게 하얀 얼굴에 후까시 잔뜩 넣어 빗어 올린 머리 스타일은 멋쟁이 소리를 들어도 손색이 없었다. 맑고 푸른색 외양의 이 크림 통은 보기만 해도 효과가 날 듯하며 이 화장품은 워낙에 뽀얗고 흰 피부를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내게는 항상 탐이 나는 메뉴였다.


  “매일 아침 세수하고 나서 한번, 저녁에 세수하고 나서 자기 전에 또 한 번, 몇 달 지나면 얼굴이 눈같이 하얘져요. 얼마나 이뻐지는지 써 봐야 알아요.”


주머니가 비었으면 빚이라도 내서 장만해야 했다. 어쨌든지 그 푸른 크림 통은 내 젊은 시절 빈약한 내 화장대 위에서 빛나는 존재로 내 사랑을 받았다. 꾸준히 발랐을 그 세월의 덕으로 내 누런 얼굴색이 뽀오얀 흰색이 되어 미인의 대열에 끼게 되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이 얼굴 표백제 크림을 오랜 세월 지난 후 드럭 스토어 진열장에서 발견했을 때는 거의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 냉큼 집어 올렸다.


  “여기에도 이게 있네?!”


한국 땅에서 오래전 내 사랑을 받던 제품이 미국 드럭 스토어에 당당히 진열되어 있다니 뿌듯한 자랑스러움이 넘쳐 올랐다. 햇볕에 그을은 색을 더 좋아하여 일부러 돈 주고 선탠 룸에 누워있는 이 나라 사람 중에도 흰 피부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나 보다, 하며 겉의 설명서를 유심히 읽어보았다. 아마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계속 이 제품을 발라 희고 고운 피부색을 간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단어는 '클렌징'이었다. 그 작은 글씨를 아무리 끝까지 들여다보아도 피부를 희게 해 준다는 설명은 없었다. 얼굴에 바른 후 더운물로 씻어내라는, 즉 비누 대신 세수할 때 쓰는 클렌저인 것이다.

오래전에도 알파벳 정도는 읽을 수 있었을 텐데 미제 화장품 아줌마의 현란한 상술에 넘어가 철석같이 믿어서였을까, 아니면 예뻐진다는 말에 정신이 빠져 버린 것일까, 왜 한 번도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정성스럽게 클렌저를 발라댔을까..... 황당하기보다는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는 부끄럽고 무식한 과거 행적에 헛웃음만 나왔다. 젊은 시절 수년간 보물처럼 아끼면서 희뿌연 클렌징 크림을 얼굴에 바르고 입술에 미제 립스틱을 바르면서 미제 화장품 애용자의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온 그 시절은 저 멀리 가고 없지만, 잘 견뎌온 내 얼굴이 고맙기만 했다. 그나마 병원에 실려 가는 참사를 당하지 않은 것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예뻐진다, 몸에 좋다. 이보다 더 솔깃한 단어가 있을까? 몸에 좋다는 말만 믿고 버섯의 성분도 모르는 채 먹고 병원에 실려 온 사람이나, 예뻐진다는 말만 믿고 클렌징 크림을 허구한 날 얼굴에 바르고 활보하는 행태나, 한탄스럽고 무식한 것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허상의 정체는 무식에 근거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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