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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영 Mar 21. 2022

아주 늦지는 않았다

    한겨울답지 않게 거의 푸근한 날씨다. 이런 날에는 감기가 더 기승을 부린다던가. 그래서인지 응급실에는 평소보다 많은 환자가 들어차 있는 것 같다. 얼핏 침대 사이사이에 늘어져 있는 커튼이 젖혀진 틈으로 모퉁이 침대에 앉아있는 젊은 남자가 눈에 띄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동양인인데 그도 나를 보더니 반가운 내색을 한다.  


  “한국인이세요?”  

  “네. 그렇습니다. 반갑습니다.” 


응급실 침대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으면 큰 병이 없어도 긴장되기 마련이다. 아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같은 동양인 얼굴에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기 그지없다. 이 젊은이의 반가워하는 얼굴을 보며 언뜻 병명이 짚이지 않는다. 얼굴에 전혀 병색이 없고 출근길에 잠시 둘러서 볼일을 보려는 사람 같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잘생긴 얼굴과 깨끗이 빗어 넘긴 머리가 어느 전문직에 있는 사람 같다.   


  “응급실에는 어쩐 일로…?” 


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나는 기겁을 하고 놀랐다. 넓적다리를 덮었던 시트를 슬쩍 들어 보이는데 수박만 한 사이즈의 커다란 혹이 있는 것이다. 누가 나보고 과장이 너무 심하지 않냐고 핀잔을 준다 해도 수박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안 들면 조금도 에누리 없이 미식축구공만 하다고 하면 된다. 내가 아무리 냉철하게 현실에 대처한다고 해도 순간적으로 내 얼굴에 떠오른 경악은 극심했나 보다. 오히려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그는 히죽 웃었다. 그 웃음이 마치 어린아이같이 순진하게 보인 것은 그 수박을 달고 있는 젊은이에 대해 연민이 스며든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게 뭐예요?” 


나는 멍청하게 그런 질문은 환자에게 해서는 안 된다는 평소의 이성을 잃고 따지듯 물었다.  


  “이게 암 덩어리래요.”  

  “뭐라고요? 암이요?”  

  “네.” 


나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갑자기 혹이 이렇게 커졌을 리는 없을 텐데 언제부터 이렇게 커졌어요?” 


나는 암이라는 설명을 그에게서 들었지만 대신 혹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에 유의하며 물었다.  


  “작년 4월에…? 처음에는 작은 혹이었는데 조금씩 커지더니 탁구공만 해졌어요. 누르면 좀 아프기도 하고요. 그래서 외과 의사를 찾아갔어요. 그랬더니 수술은 안 해주고 큰 병원에 가서 MRI인가 뭐라는 사진을 찍으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당시 내가 너무 바빴어요. 도무지 시간을 내서 병원까지 가서 그런 사진을 찍을 시간이 없었어요. 보험도 없었기 때문에 보험을 먼저 들고 찍으려고 하다가 차일피일 미루면서 시간을 보냈죠, 뭐.” 


생각났다. 그래, 지난 5월인가 6월쯤인가 외과의 닥터 양의 오피스에서 연락이 왔다. 

 [환자 이름 :최 경준, 나이 :37세, 전화번호 :000-0000]

나는 MRI 부에 전화해서 최경준 씨의 스케줄을 정하고 전화를 했다.  


  “닥터 양이 빨리 약속을 잡아드리라고 해서 전화했습니다. 스케줄이 잡혔으니 몇 날 몇 시에 오셔서 사진을 찍도록 하십시오.” 


그는 잠시 자신의 스케줄을 점검하는 듯 망설이다가 “알았습니다. 다시 곧 연락드리겠습니다”하고 경쾌히 전화를 끊었다. 나는 약속 날짜 하루 전에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제가 내일은 너무 바빠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서두르셔야 해요.” 


나는 이럴 때는 강력한 말투를 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말투가 믿음직스럽지가 않았다.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염려해줘서 고맙지만 내 몸이니 내가 잘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보험이 없는 환자들의 경우 가격을 알아보고 더 싸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나로서도 더는 강요할 수 없다.   


  “알아서 하세요.”  


나는 한숨을 내쉬고 전화를 끊었었다. 약속된 날짜에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닥터 양에게 그 사실을 알리니 아무래도 암인 것 같아서 서둘렀는데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했으니 어디 다른 곳에라도 가서 빨리 손을 쓰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잊고 있었다. 

그는 다른 곳으로 가지도 않았고 그냥 탁구공이 야구공만 해지고 축구공만 해지고 이제는 뜨끈뜨끈한 통증과 함께 수박만 한 사이즈가 되어 바지를 입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아무리 바빠도 이제는 응급실에 들어오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 상태의 환자는 응급실에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   


  “의사 선생님은 만나 보셨어요?” 

  “네. 닥터 양이 와서 보시고 다리를 잘라야 한대요.” 


그리고 그는 사타구니로부터 엉덩이 쪽으로 긋는 시늉을 했다.  


  “이렇게 몽땅 잘라내야 한대요.” 


그리고는 분한 듯 입을 꼭 다물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의사가 돼서 고쳐줄 생각은 안 하고 다리를 잘라야만 된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리고는 내게 화풀이라도 해야 하겠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안 그래요?” 


나는 화가 났다. 그가 내게 하는 그 소리에 화가 난 것이 아니다. 1년 전 암 덩어리가 탁구공만 할 때 빨리 조치를 취했으면 다리 하나를 자르는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자리만 긁어내고 방사선이나 항암 치료를 했으면 다리는 건졌을 것 아닌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다리와(혹은 목숨까지도) 바꿀 그 무엇이 그렇게 중요했던 것일까…. 한쪽의 다리라고는 하지만 어찌 그것으로 끝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작년에 나와 통화했던 것 기억하지요? 그때 즉시 치료를 받았어야지 여태껏 늑장을 부려놓고 고쳐줄 생각을 안 한다고 의사를 원망하는 것은 또 뭐예요? 기회를 놓치는 것은 본인의 책임이랍니다.” 


나는 맹렬하게 퍼부어 주었다. 퍼부을수록 더 화가 났다. 다리 하나를 영원히 잃어버리고 외다리로 살아야 할 (그나마 그것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의 젊음이, 그의 준수한 얼굴이 너무나 가슴 아프고 안타까워 더욱 화가 났다. 

그는 묵묵히 내 공격을 받아냈다. 내가 빨리 검사받고 치료해야 한다고 전화로 다그치던 당사자였고 증인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도 설마설마했지만 암 덩어리로 가득한 한쪽 다리를 몽땅 잘라내야만 한다는 그 현실을 어떻게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인가…. 어딘가, 그 상대가 누구이건 간에 원망할 대상이 있어야만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최경준 환자의 다리 절제 수술은 외과의 혼자서는 할 수가 없는 듯했다. 외과 의사 외에 마취의는 물론 신경 전문의, 뼈 전문의, 암 전문의가 총동원되는,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대수술인 듯했다. 최경준 씨는 통증 완화제를 먹으며 며칠간 입원해 있었는데 손위 누나가 이따금 찾아와 옆에 앉아서 울다가 돌아가곤 했다. 그 며칠간 그는 급속도로 비탄에 잠겨 말이 없고 음식도 입에 대지 않아 창백하게 여위어 갔다. 나는 병실을 찾을 때마다 잘릴 운명에 처한 다리에 얌전하게 다듬어 놓은 깨끗한 발가락에 자꾸만 시선이 닿았다. 너무나 아까워 보이는, 그러나 혼자만은 남을 수 없는 흠 없고 가지런한 발가락을…. 다른 병원으로 이동하여 수술을 받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던 날, 그는 퇴원하여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바쁘게 사느라고 아직 결혼을 안 한 터라 큰 수술을 하고 나면 병간호해 줄 마땅한 가족이 없는 그에게 부모가 오라고 성화를 해서 부모 곁으로 간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마음을 놓았다. 한 다리만 남은 채 목발을 짚고 다니는 그를 보지 않아도 되리라는 것은 내게 알 수 없는 위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몇 달 후 우연히 한국 슈퍼마켓에서 그 누나를 만났다. 최경준 씨는 한국의 어느 대학병원에서 엉덩이 바로 밑에서부터 다리를 잘라내는 열 시간에 걸친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고 재활 훈련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리고 암이 다른 곳으로 전이된 듯하지는 않다고 했다. 그 말을 전하며 그 누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눈물을 보며 무엇에 대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자꾸 화가 났다. 그리고 지난해 혹이 탁구공만 할 때 왜 좀 더 강력하게 잡아끌고 와 수술을 하도록 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끓어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다리 하나만으로도 용감하게 바쁘게 사는 방법을 터득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직은 아주 늦은 것은 아닌 것을…,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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