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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영 Mar 21. 2022

커뮤니티 브리지 펀드

community bridge fund

  내가 근무하고 있는 병원 사무실에 한 허술한 차림의 부인이 찾아와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도움을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진즉에 찾아봬야 하는데...”


그리고 빵이 들은 봉지를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부족하지만 맛있게 드세요.”


누군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빵 봉지를 주면서 죄송하다니.....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눈치챈 듯 본인이 누구인가를 밝힌다. 

생각났다. 박영준 씨, 약 2년 전쯤 홀리네임 병원(Holy Name Medical Center) 커뮤니티 브리지 펀드(community Bridge Fund)의 혜택으로 탈장 수술을 하신 분의 부인이다.

이 펀드는 수술 날짜를 받아놓고도 그 어떤 혜택도 받을 수 없는 딱한 사정이 있는 분들의 상태를 점검하여 수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한 펀드이다.

한인들이 밀집해 사는 지역의 병원이다 보니 꽤 많은 어려운 사정의 환자에게서 도움 요청 전화를 받게 된다. 보험도 없고 가진 돈도 없는데 그 어떤 혜택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 사각지대에 놓여있으나, 빨리 수술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처지라면 어딘가에라도 문을 두드려보고 싶을 것이다. 그 문이 커뮤니티 브리지 펀드이다. 이 펀드는 그동안 인근 지역의 교회와 개인, 또는 작은 단체들에서 성금을 받아 네 명의 환자가 수술하게끔 도와줄 수 있었다. 그 펀드로 수술을 했던 분 중 한 분이 박영준 씨이다. 걷기조차 힘든 극심한 탈장으로 직장에조차 출근할 수 없는 상태에서 펀드의 도움으로 무난히 수술을 받고 일상생활로 돌아가셨던 분. 세월이 흘러 기억에서조차 사라지려는데 부인이 빵 봉지를 들고 찾아오셨다. 


  “수술 후 박 선생님은 건강하시지요?”

  “네, 건강합니다. 그때 정말 막막했는데 도와주셔서 그 은혜를 갚지도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도움을 받고 정말 새 생명을 얻은 것 같았어요. 여기 우리같이 어려운 처지에 놓인 분들을 위해 쓰시라고 가져왔으니 받아주세요.”


부인은 슬그머니 봉투 하나를 내놓았다.


  “이게 무업니까?”

  “적지만 열심히 모았어요. 받아주시고 꼭 필요한 사람을 위해 써주세요,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미쳐 대답하기도 전에 부인은 도망가듯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봉투 안에는 은행에서 바꿔온 듯 깨끗한 새 돈 2천 달러와 함께 짧은 편지가 들어있었다.


  “수술을 앞두고 막막한 처지에 있던 제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커뮤니티 브릿지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수술을 끝낼 수 있어 정말 감사합니다.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분들을 위해 적으나마 이 돈이 쓰이게 되기를 바랍니다. 조금이나마 저의 감사의 표현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커뮤니티 펀드의 무한한 발전과 혜택받는 분들의 건강을 위해 기도드리겠습니다. 박영준 목사 드림.”


전화번호를 찾아 어렵게 통화가 된 부인과의 통화에서 알게 된 사연은 남편이 신학교를 나와 목사 안수를 받았지만, 여건이 안돼 농작물을 트럭에 싣는 일을 한다고 했다. 이 귀한 성금이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쓰인다면 자신들의 기쁨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고 했다. 마치 처음 만져보는 거액같이 묵직하게 느껴지는 봉투를 어쩌지 못하면서 새삼 부인이 입고 온 낡은 외투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커뮤니티 브릿지는 미국에 살면서 받을 수 있는 모든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인 수술을 앞둔 환자를 돕기 위해 2015년 처음 설립되었다. 

 2014년 홀리네임 병원의 한국 부서에서 슈퍼바이저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이 부서의 특성상 나는 도움을 요청하는 많은 한인의 전화를 받았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정작 없었다. 단지 어떻게 해보라든지, 어디에 가서 문을 두드려 보라든지, 마치 방향을 제시해주는 교통경찰과도 같은 일을 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전화를 걸어온 분은 눈의 망막이 떨어져 실명 위기에 있었다. 한쪽 눈의 시야가 자꾸만 좁아져 가더니 언제부터인가는 세상이 반쯤밖에 안 보였다. 형편이 안 되는 터라 버티다, 버티다 하는 수 없이 안과 의사를 찾아갔더니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실명할 것이며 나머지 한쪽 눈도 나빠지고 있다는 끔찍한 진단을 받고 일단 수술 날짜를 잡았다. 그런데 보험도 없고 물론 돈도 없으니 수술 비용 마련할 길이 막막했다. 나는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았으나 이분을 도울 길이 없었다. 수술 전 병원에 입금해야 할 금액이 3천 달러였으며, 수술 의사는 5천 달러를 요구한다고 했다. 나는 끝내 이분을 도와주지 못했는데 오랫동안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검은 안경을 쓰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길을 걷는 장애인을 어쩌다 보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내게 도움을 청했던 그분이 끝내는 수술을 못 해 장님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죄책감까지 들기도 했다. 나는 이런 분들을 돕는 길을 모색해보기로 했다. 일하는 병원의 한국 부서에 커뮤니티 브리지 펀드를 만들고 그 취지를 설명하는 안내서를 주위에 있는 교회에 우선 편지를 띄웠다. 주소록에 올라있는 교회 명단을 들여다보며 편지를 보낸 교회는 80여 곳이었다. 답장은 단 한 군데에서도 받지 못했다. 내 편지는 교회 쓰레기통에 들어가 버렸을 것으로 추측했다. 아는 어느 교회 장로에게 푸념하니, 그런 편지가 수십 통씩 쏟아져 들어오는데 어떻게 일일이 다 답장을 해주느냐고 했다. 이해가 되기도 했다.


 나는 근교에 있는 교회의 목사나 재정 책임자들을 찾아다니며 커뮤니티 브릿지의 필요성을 호소하였다. 교회에서 성금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거의 많은 교회가 유지하기가 힘들 정도로 가난했고 또 그렇게 가난한 교회조차도 아프리카나 남미 쪽에 있는 선교에 더 관심이 있었고 우리 이웃들의 절박한 수술 비용을 도와주는 데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여만 달러의 성금이 들어왔고 5년에 걸쳐 열세 명의 환자가 수술 혜택을 받고 새 생명을 얻었다. 한인 외과 의사인 닥터 양의 도움이 컸고, 병원에서도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수술 후 완치되어 떠나간 분들에게서 다시는 소식을 들을 수 없었지만, 내 가슴에 남은 기쁨의 덩어리는 오래오래 나를 행복하게 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기억도 없는 부인이 들고 온 돈뭉치.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해 절망에 빠진 누군가가 이 봉투 속에 있는 소중한 돈으로 새 생명의 빛줄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돈벼락이라도 맞은 듯 나의 하루는 풍족한 기쁨과 흥분으로 가득했다.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태양은 부지런히 떠오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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