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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영 Oct 06. 2021

3월 어느 날의 일기

    고모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며칠 후였다. 한밤에 잠이 깨었는데 얼핏 보니 디지털시계의 붉은 숫자가 1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의 평소 잠 습관으로는 거의 없는 일이었다. 눈 감으면 잠이 들고 눈 뜨면 아침이 찾아와 있는 잠충이의 정확성으로 볼 때 나의 무딘 잠 신경을 두들겨 깨워놓는 요소가 무엇이었던가 퍼뜩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그 잠재의식의 무게는 꽤 큰 것이었나 보다. 그것은 터뜨려 짜내야만 되는 종기를 그냥 부드러운 붕대로 보이지 않게 덮어버리고, 그러면 저절로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은 결국 최선의 해결책이 아니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고모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처음 발병의 시기에 엇비슷이 태어난 손자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는 긴 세월이었다. 나는 고모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음을 생각해냈다... 그건 지난 수년간의 습관이었다. 무엇이라고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발병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 수년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몸을 움직이는 데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딱히 어디 아픈 것도 없고, 먹고 배설하는 기본적인 생활에도 전혀 이상이 없었다. 그 병의 심각성은 한참 후, 아주 한참 후에, 이상한 이름과 함께 선고되었지만 그럼에도 처음에는 웃는 일로 시작되었다. 앞서 걸어가는 고모에게 몇 발자국 뒤에 가던 한국에서 방문 오신 고모의 오빠가 불러 세워 놀리듯 말했다. 


  “너 걷는 폼이 꼭 뭐라나 하는 그 유명가수가 무대 위에서 노래하면서 이상한 춤추는 것 같데이, 미국에 오래 살면 그런 것 닮나?” 


모두 웃었다. 그리고 또 한마디 했다. 


  “괜찮은가?” 


정말은 괜찮지가 않았다. 


정작 본인도 몰랐고 아무도 몰랐다. 겉으로는 멀쩡했지만 무서운 음모가 어둠 속에서 차근히 진행되고 있었다. 가끔 발바닥에 접착제라도 발라진 듯 발걸음이 잘 떼어지지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이 정체를 처음 드러낸, 시작이었다. 한쪽 발가락 끝에서부터 시작된 마비가 발바닥 중간쯤에 와 있을 때였다. 


  “너무 오랜 시간 서서 일하니까, 아니지, 서 있을 때보다는 앉아있는 시간이 더 많은 걸... 신발에 문제가 있는 걸까⋯.” 


고모가 신발도 바꿔보고 더운물에 담가 주물러 보기도 하고, 약도 발라 보는 동안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발이 이상하다는 정도였고 심장이나 위장이 이상한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발가락 때문에 죽는 일은 없으니까... 그렇게 1년이 가고 2년쯤 지났을 때 고모는 조금씩 심각성을 눈치채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때는 왼쪽 발에 오가던 마비가 오른쪽에서도 서서히 시작된 때였다. 고모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공포심을 짓누르며 우선 가족에게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처지임을 깨달았다. 단순히 실수나 부주의로라도 그렇게 자주 넘어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좀 더 안락한 노후를 위하여 쏠쏠한 푼돈이 들어오는 번화가의 잡화상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잡화상의 수입은 고스란히 고모만의 몫이었다. 그 몫은 고모의 힘이었다. 언젠가 꼭 가보려고 계획한 성지 순례의 꿈이 담겨있는 것이다. 


서둘러 이곳저곳의 크고 작은 병원을 찾아다니며 검사를 하고 간혹 침을 맞아보기도 하는 동안 병은 제멋대로 진행되다 멈추고 쉬기도 하며 그러나 끈질기게 제 역할을 계속하였다. 두 발아래에서 오가던 마비가 발목을 넘어 오르는 눈치가 보일 때쯤 의사인 고모부도 사위도 그것이 일시적인 신경통이나 근육마비가 아님을 알았다. 모든 검사 결과 아무 이상도 나타나지 않는 병. 희귀병 중의 희귀병이라 이름도 붙여지지 않은 병, 그러나 치명적인 병이었다. 그 어떤 약이나 수술로도 완치는커녕 그 진행을 늦추는 치료방법조차 의학계에 단 한 건의 사례도 보고되지 않은 병. 두뇌의 어떤 신경계통 검사로도 나타나지 않는, 설명할 수도 없고 아마 보고된 케이스도 거의 없고 치료법은 더더욱 알 수 없는... 우주 공간만큼이나 신비한 그런 질병이었다. 아직은 간간히 벽이나 가구들에 의지하여, 불편한대로도 나름 집안에서의 거동이 가능할 그즈음까지 나는 다섯 시간 가까이 걸리는, 고모가 사시는 보스턴 근교까지 가끔씩 달려가곤 했다. 고모는 날 붙잡고 할 이야깃거리가 많았고 나는 그 말 상대가 되는 것이 싫지 않았다. 


고모에게는 꿈이 있었다. 고약한 이 병이 어느 날 불쑥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떠날 성지순례 여행에 대하여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다. 


  “여행할 때는 작고 가벼운 가방을 들고 가는 게 좋아. 신발도 편안한 것 한 켤레면 되고.” 


고모는 TV를 보고 있는 고모부를 힐끗 바라보고는 소리를 낮추어 ‘고모부가 원한다면 같이 가야지’ 큰 선심 쓰듯 말하고는 즉시 ‘같이 가야지, 나 혼자서야 어떻게 가겠어’ 하고 정정했다. 



고모는 나의 시누이다. 내 남편의 손위 누님인데 아이들이 부르는 호칭대로 그냥 나도 고모라고 불렀다.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서로 통하는 점도 많아 시누올케 사이라기보다는 나이차가 많이 나는 친자매 같다고 하는 소리도 들었다. 나도 때로는 고모가 남편의 누님인 것을 잊고 남편 흉을 보기도 했다. 고모는 30여 년 전, 40대 초반에 미국으로 이민 와 보스턴에서 줄곧 사셨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니 내 생각에도 그만하면 성공한 이민자였다. 의사로서 확실한 직업이 있는 남편과 남들이 보면 부러워하는 예쁘고 똑똑한 아들 딸들과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사위들과 며느리, 윤기 나는 차돌같이 예쁜 손주들이 가득한 행복한 할머니이기도 했다. 그 자리에 이름도 감춘 그 질병이 '놀랬지?'하고 뛰어든 것이다. 고모는 똑똑하고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여자였다. 그 시절만 해도 이민 초창기의 의사는 수입이 넉넉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남편의 재향군인병원의 월급이 자라나는 세 아이들의 교육비며 생활비로는 턱없이 모자라는 것을 아는 즉시 병원장을 찾아갔다. 어찌어찌 마주 앉게 된 병원장의 책상 위에 한영사전을 꺼내놓고 고모는 찾아온 목적을 설명했다. 아니, 단어들을 나열했다. 


  “나는 당신 병원에 일자리를 얻어 한국에서 온 의사 아무개의 부인이다. 당신네 병원에서 주는 월급만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다. 나도 일해야겠는데 아는 사람도 없고 영어도 못한다. 당신이 제일 높은 사람이니까 알아봐서 내가 일 할 자리를 찾아달라.” 


대강 이런 줄거리였다. 어찌 되었건 그 병원장의 주선으로 고모는 부근 양로원에 취직이 되었다. 양로원의 일은 허드렛일이었다. 한국에 살 때는 학교 선생이었다. 고모는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이따금 삶에서 오는 터지는 분통을 싸놓았다가 내게 열심히 털어놓았다. 


고모부는 늘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부근에 있는 학교 운동장을 열 바퀴나 뛰고 돌아와 샤워를 한 후에는 아침 식사 준비를 하였다. 그 전날 저녁 식사 후 그득 쌓아놓은 설거지를 해놓고 직장으로 출근하기 전까지 구석구석 집안을 윤기 있게 닦고 쓸고 하였다. 한국에서 살 때는 하지 않던 힘든 일을 하는 고모가 안쓰러워 될수록 집 안일을 도와주려고 애쓰는 모습은 내 눈에 그냥 그대로 러브스토리였다. 내가 그곳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근사한 커피 냄새가 집안에 가득했고, 그때 일어나 샤워하는 고모의 물소리가 들리곤 했다. 윤기 나는 부엌 바닥도, 반짝이는 유리창들도, 테이블에 준비된 아침 식사도 고모에게는 부아 터지는 일이었다. 여자인 자신이 할 일을 남자가 한다는 그 복에 겨운 투정이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미국에서 미국 사람들 속에 살면서도 결코 빠져나올 수 없었던 옛날 아낙의 사고였던 것인지도 몰랐다. 고모부는 더 이상 욕심이 없는 충실하고 성실한, 고지식한 분이었다. 전쟁 전 이북에서 의과대학을 다닐 때 러시아어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영어로 된 의학전문용어를 매우 힘들어하셨다고 했다. 그러나 안전한 직장, 자라나는 아이들, 닦고 털 수 있는 내 집, 툴툴거리지만 저녁식사 때는 늘 고모부가 좋아하는 생선을 굽고 된장찌개를 끓여주는 아내, 자신이 토담처럼 쌓아 올린 생활 속에서 행복한 분이었다. 


언젠가 내가 갔을 때 두 분은 냉전 중이었다. 이유는 새로 산 소파 때문이었다. 크림색 소파에는 플라스틱으로 덮개가 씌워져 있었는데 고모부는 그 플라스틱 덮개를 씌워놔야 깨끗하게 오래 쓸 수 있다는 주장이고 고모는 그까짓 덮개를 벗기고 우아하고 멋지게 그냥 놓고 쓰자는 주장이었다. 덧붙여 ‘그 소파가 나보다 더 오래 이 방에 뻗치고 있을 것’이라는 단언이었다. 그런 다툼은 새로 깐 하얀 카펫 때문에도 일어났는데 고모부는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복도의 흰 카펫이 더러워질까 봐 부분 비닐을 덧깔아 놓았는데 그것이 못마땅한 고모는 볼 때마다 혈압이 오른다고 성화였다. 깨끗하게 오래 쓰려면 먼지가 타지 않게 무엇이든지 덮어 놓아야 한다는 실용적인 사고의 어른과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사고를 가진 어른의 성격상의 부딪힘일 것이었다. 

그럼에도 두 분은 아주 잘 어울리는 부부였다. 노상 사랑을 속삭이며 사는 부부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냥 살아가는 방법이 다를 뿐이었고 그런 다툼은 아예 사랑싸움이었는지도 모른다. 고모의 세월은 원망과 푸념과, 때로 스며드는 조그만 기쁨들을 거느리고 양로원의 허드렛일 뒤에 받아오는 주급 위에 켜켜이 쌓여갔다. 

오랜 세월 후 조금씩 늘어가는 한인 이민자들이 장사를 시작하여 정착해가는 흐름에 따라 조그만 잡화가게를 인수받아 허드렛일을 면하게 된 때쯤에는 고모부가 이미 병원을 은퇴할 나이가 되어 있었다. 한 개의 지팡이에 의지하여 거동하던 고모가 두 개의 목발로, 그리고는 바퀴 달린 워커를 밀고 다니며 온몸을 보조기에 의지하는 과정을 거쳐 휠체어에 앉게 되는 동안, 처음 고모의 이상한 발걸음을 발견하고 놀리던 고모의 오빠와, ‘언니 빨리 나아서 함께 여행 떠나요, 꼭 일어나야 해요, 힘내요’ 하던 막내 여동생이 먼저 세상을 떠나갔다. 

쏠쏠한 재미를 보던 잡화점도 다른 사람에게 넘긴 지 오래였다. 고모의 마비는 이미 가슴에까지 올라왔고 팔은 안으로 굽어져 손은 주먹을 쥔 모양새로 굳어져가는 동안 성지순례를 떠나는 여행의 꿈도 그 주먹 안에서 스러져가고 있었다. 


그 고통과 두려움의 생활을 사는 동안 고모는 용케도 하나님을 찾았다. 절망과 분노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고모는, 처음에는 원망으로 그리고 체념에서 감사함으로 자신의 감정을 승화시키며, 평화 속에 서서히 자신의 진행되어가는 병세를 담담히 받아들이고 진단하게 되었다. 


  “내 병은 이제 가슴을 지나 목 위로 올라올 거야. 그 후에는 목소리가 마비되고 시력이 사라지고 소리도 못 듣고, 암흑 같은 육체 속에 정신만 갇혀서 살아있는 거야. 숨도 스스로 쉴 수 없고, 먹을 것도 삼킬 수도 없어서 기계에 의지한 채 암흑 속에서 얼마인가를 지탱하다가 숨이 끊어지겠지. 제발 그때는 재빨리 다른 조치를 취하지 말고 편히 갈 수 있게 도와줘, 알았지⋯.” 


그리고 움직여지지 않는 손가락을 들여다보며 “하나님이 꼼짝하지 말고 쉬라고 이 병을 주셨나 봐.” 속삭이듯 고모는 자신의 병을 설명했다. 


그 죽음까지의 길은 죽음보다 더 무섭고 두려웠다. 잠시 가슴 부위에서 멈칫하고 꾸물거리던 마비증세가 서서히 속도를 내기 시작했을 때쯤 고모는 비슷하게 지체가 부자유스러운 환자들이 머무는, 병원이지만 요양원 같기도 하고 호텔 같기도 한 시설에 입원하게 되었다. 내가 그곳을 방문하였을 때 고모는 3층 병동에 계셨는데 간호사에게 자꾸만 2층 병동으로 보내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나는 아직 정신은 말짱하니 3층은 싫다’는 것이었다. 2층 병동은 아직 중증에 이르지 않은 환자들이 입원해있는 곳으로 그나마 의사들이 오가는 것이 자주 눈에 띄고, 걷는 연습, 먹는 연습이 치료와 병행되는 곳으로써 아직은 삶과 가까운 곳이었다. 3층 병동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도망가고 싶었다. 환한 불빛 아래 깊은 적막이 드리워진 넓은 복도에는 휠체어 수십 개가 모여 있었는데 거기에 앉아있는 환자들이 일제히 열리는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름지고 탈색되어버린 듯한 창백한 피부들, 한때는 그들의 아름다움을 더해주었을, 엉킨 실타래같이 헝클어진 섬뜩해 보이는 머리카락들... 더 늙었고 덜 늙어 보이는 자태를 떠나 바스러질 것 같은 병든 육신들은 온 힘을 모아 강렬한 기대감을 담은 눈빛으로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들, 한결같이 그들의 피붙이들을, 혹은 그리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나 하며, 때로는 영원히 오지 않을 그들을... 



나는 오랫동안 보스턴에 있는 고모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나를 위해 냉면을 만들어주고 빈대떡을 부쳐주는 고모, 자고 일어나면 온 집안에 커피 냄새를 피우며 토스트를 구워주는 고모부가 있던 그곳은 더 이상 가고 싶은 곳이 아니었다. 나는 내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게 된, 냉면이 먹고 싶다고 조르며 꼼짝 못 하고 누워있는 고모를 더 이상 찾지 않게 된 이기심이 많은 나쁜 사람이었다. 그냥 피하고만 싶었다. 


  “고모, 고모의 꿈은 무언가요?”


오랜만에 만난, 너무나 변한 고모에게 할 말을 찾지 못해 쩔쩔매다가 뚱딴지같이 나온 바보 같은 내 질문이었다. 그것이 잠을 잘 때 꾸는 꿈을 말하는 것인지, 이루고 싶은 바람 같은 것을 의미하는지 말하는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디를 헤매는지 모르게 검은 안개 같던 고모의 눈에 반짝, 빛이 떠올랐다. 


  “꿈?” 


입술 모양을 보아야 더 알아듣기 쉬운 꺼질 것 같은 목소리가 꿈?을 붙잡았다. 고모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에는 옆 빌딩의 흰 담벼락과 그 끄트머리에 미안한 듯 살짝 고개를 내 민, 회색 빛 덮인 한 조각의 하늘이 보였다. 고모는 그리운 듯 그곳을 바라보다가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꿈은... 혼자⋯ 걸어서⋯ 화장실에⋯ 가서⋯ 일 보는 거야⋯.” 


화장실은 바로 옆에 있었다. 소문난 음치의 꿈이 최고의 성악가가 되어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를 한다든가, 타고난 안짱다리의 꿈이 발레단의 프리마 돈나가 되는 것이라 해도, 어떤 엉뚱한 자의 꿈이 남북을 평화적으로 통일하여 지상낙원을 꾸미는 것이라 해도 고모의 꿈보다는 덜 불가능할 것이었다. 고모도 나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늘⋯ 그것만⋯ 생각해⋯.” 


'그래요 고모, 그 꿈은 꼭 이루어질 거예요.' 나는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소리도 없이 소나기를 안고 몰려오는 검은 구름 같은 확실한 죽음의 걸음을 그냥 바라보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두렵고 고통스러운 날들은 오직 고모만의 것이었다. 그냥 삶의 한 부분이었다. 간간히 전해지는 소식으로 알게 되는, 진행되는 병의 정확한 무자비함은 한없이 무력한 인간의 한계만을 느끼게 했다. 알 수 없는 절대감에 인간은 한없이 약했고 최신 의학은 자취를 감췄다. 사람이 달나라에 다녀오는 과학의 경이로움도, 최첨단 의학의 발달도 이 원인도 모르고 단지 추측만이 가능한, 치료 방법도 없고, 그 질병의 끝만이 확실한, 머릿속 세포의 몇 개가 이상을 일으킨다는 병 앞에서는 그저 뜬구름이었다. 그냥 하얀 종이였다. 


고모부는 고모가 입원해있는 병원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점심시간에 맞추어 도착하여 음식을 떠먹였다. 그 병원이 생긴 이래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내에게 혹은 남편에게 점심식사 시중을 들기 위해 방문하는 보호자는 고모부가 처음이며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아마 거의 대부분이 식물인간 상태가 된 채로 장기간 입원해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모는 온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한 달에 한 번씩 병원 구내에 있는 미장원에 실려가서 머리 손질을 하고 검은색으로 염색하곤 했다. 때로는 스타일이 너무 촌스럽다고 까다로움을 피우기도 했다. 고모부는 성실하고 자애롭게 아내를 돌보았는데, 음식을 떠먹여 주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야채가 먹고 싶을 때 고기를 넣어 준다거나, 빵이 먹고 싶을 때 으깬 감자를 넣어준다거나 하면 고모는 건강했던 옛날처럼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부렸다. 


  “당신이 내 부아를 돋우고 있어.” 


부아를 돋우는 것은 고모였지 고모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모부를 향한 투정이 아니었다. 마치 배반자처럼 자신의 의지에 등을 돌려버린 자신의 육신을 향한 절규였다. 그러면서도 고모는 매일 같은 시간에 아래층 식당에서 준비된 음식 쟁반을 들고 들어오는 고모부를 기다리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고 이제는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슬쩍 실토했다. 고모부만 남은 집은 언젠가부터 소파의 덮개가 벗겨지고 복도와 부엌에 연결된 부분 카펫이 없어졌는데 고모에 대한 고모부의 배려에서였는지, 아니면 고모부가 진리를 터득해서였는지 그건 모를 일이었다. 



3월 초. 아직은 차가운 겨울의 끝자락이 떠나지 않고 있는데도 믿을 수 없게 따스한 어느 날 오후, 고모의 고독한 여정의 행진이 끝났음을 알리는 전화가 왔을 때, 앞뜰의 이름 모를 꽃나무는 성급하게 꽃망울을 피우고 있었다. 내가 가서 만난 고모의 마지막 모습은 알듯 모를 듯 시침을 뗀 듯한 표정에 미소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오그라들어 펼 수 없었던 두 손은 부드럽게 풀어져 가슴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아직 살아 숨 쉬며 누워 있을 때보다 훨씬 친근하고 가깝게 느껴지는,  생명이 떠난 육신의 모습. 내 잠 신경을 깨워놓은 잠재의식의 요소가 바로 그것이었다. 꿈을 이룬 사람의 모습. 꿈을 이룬 사람의 신나는 모습이었다. 오래전부터 가려고 계획했던 성지순례의 길을 고모는 끝까지 놓지 않다가, 하나님의 손을 잡고 마침내 떠났음을 나는 알았다. 


  “나는 이제 자유야. 해방이야.” 


모인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하려는 듯 내뱉는 고모부의 모습은 자유하고 해방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귀중한 것을 떠나보낸 허탈한 공허가 그 언저리에 있을 뿐이었다. 잡고 따라가던 손을 놓친 어린아이 같은, 어딘지 어리둥절하고 슬픈, 외로운 모습일 뿐이었다... 함께 떠날 수 없었던 진짜 순례의 길을 우리는 모두 바라보고 있었다. 잘 보아두어야 할 일이 있는 사람들처럼... 


  “안녕.” 


나는 고모에게 작별을 고했다. 디지털시계의 붉은 숫자가 새벽이 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내 밤잠을 깨워놓은 의식 속에 강물 같은 기쁨이 따뜻하게 흘러들었다. 




                                                        -2002년 한국일보 미주 문예 공모전 단편소설 입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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