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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영 Oct 14. 2021

1954년 구정

    장 박사는 환한 불빛 아래 드러난 환자의 가슴 명치 위에서부터 배꼽 위까지 수술용 칼을 세워 똑바로 그어 내렸다. 벌어지는 피부에서 선명한 피가, 칼을 따라 조심스럽게 솟아올랐다. 복막이 벌어지며 검붉은 자줏빛 색을 띤 간이 불빛을 받아 반짝이며 드러났다. 간의 오른쪽을 들어 올려, 그 뒤에 숨듯이 자리 잡고 있는 위장을 살펴보는 순간 장 박사는 그동안 환자를 만나면서 알게 된 증상들과 의사로서의 직관으로 내렸던 판단이, 우려했던 것보다 더 뚜렷한 증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장 박사는 일순간 눈을 감았다. 옆에서 미국인 보조 의사 스미스 대위가 부지런히 흐르는 핏물을 닦아냈다. 예측했던 것보다 더 사정이 안 좋았다. 매끈해야 할 위장이 흉측한 돌조각 같은 암덩이로 울퉁불퉁 차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위벽을 뚫고 나가 복강과 주름진 복막에 전이되어 있음이 뚜렷하고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불그스레한 색을 띤 단단한 모양의 콩알 같기도 하고 타다가 꺼져가는 석탄 덩어리들이 서로 엉켜 붙어 있는 듯도 한 암덩어리들이 복강 가득히 퍼져있는 것을 그는 보았다. 그리고 간에도 이미 확실하게 전이되어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장 박사는 마취되어 수술대 위에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환자를 잠깐 내려다보았다. 이런 상태가 되기까지는 몇 달 아니면 몇 년의 세월이 흘렀을지 몰랐다. 뱃속에서 죽음의 알맹이들이 무방비 상태의 골짜기들을 서서히 침범해 가는 동안 이 환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전쟁 포화 속을 용케도 헤쳐 나와 공습을 피해 방공호에 들어가기도 하고 트럭에 온 가족을 싣고 안전하게 부산으로 피난해오는 행운을 누렸을 것이다. 젊고 활기에 차, 1년 후, 3년 후, 10년 후의 계획을 세우며 원대한 꿈을 설계했을 것이다. 뱃속에서는 그보다 더 활기차고 집요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을 꿈에도 모르는 채로⋯. 


이런 상태로 인생이 끝나기에는, 그는 아직 너무 젊었다. 그러나 이 환자의 생명을 연장시켜줄 그 어떤 길도 그는 찾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스미스 대위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묻는 눈빛으로 장 박사를 바라보았다. 장 박사는 무언의 그 시선을 향해 그냥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수술대 위에 반짝이며 놓여있는 많은 수술 도구들이 하나도 쓸 일이 없었다. 다시 봉합할 실과 바늘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장 박사는 망설이지 않고 방금 전 절제했던 복벽의 피부 봉합 과정을 마 무리했다. 그리고 수술실을 나와 흰색으로 칠해진 복도의 끝에 있는 가족 대기실로 향했다. 



지난 동안 쉴 새 없이 해온 수술의 거의 전부가 포탄에 의해 절단된 팔다리나 떨어져 나간 엉덩이, 반쯤 날아간 머리를 봉합하는 것이었다. 용케도 목숨을 구해주기도 하고 잃기도 한 수술의 거의 전부를 피와 고름 냄새가 진동하고 환자의 신음 소리와 소음으로 꽉 찬 수술실에서 해치워 왔기 때문일까. 이 희고 청결하며 모든 시설이 완벽한 병원에서 부상자가 아닌 환자를 수술하는 일은 어쩐지 생소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장 박사는 그동안 수많은 수술을 해왔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가던 이 환자가 자신이 우려하던 위암 말기가 아니기를 지난밤 잠들기 전 간곡하게 기도드렸었다. 그러나 자신이 우려했던 것보다 더욱 진행된 환자의 상태는, 의사로서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한계를 절감하게 할 뿐이었다. 


  “오, 주여...” 


가족 대기실 문을 열며 장 박사는 깊은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환자의 아내가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줄곧 서성거렸던 듯 장 박사에게 곧장 달려왔다. 


  “수술이 끝났습니다.” 


장 박사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이제 괜찮은 건가요?” 


환자의 아내는 장 박사의 다음 말을 기대하며 숨 가쁘게 물었다. 수술 전 아마 대여섯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는데 곧바로 끝난 것이 의아한 듯 무언가 불안한 눈빛이다. 장 박사는 이북에 두고 온 아내와 거의 비슷한 연배의 이 젊은 부인에게 사실을 통고해야 하는 자신이 괴로웠다. 이북에서 언제 만나게 될지 모르는 남편을 아들과 함께 기다리며 홀로 살고 있을 아내. 그리고 이제 남편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혼자 사 남매를 키우며, 다시 만날 수 없는 남편을 그리워하며 살게 될 이 젊은 환자의 아내.


  “네. 성공적인 수술이었습니다. 이제 회복할 것이고 그리고 건강하게 사실 수 있습니다.” 


아!! 환자의 아내에게 이렇게 대답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장 박사는 평소의 자신 같지 않게 답답하고 약해지는 마음을 추스르며 부인을 의자에 앉으라고 권한 후 자신도 그 옆에 앉았다. 


  “역시 위암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다 퍼진 상태라 그냥 봉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숨에 말하고 장 박사는 자신의 말뜻을 이 환자의 아내가 알아들었기를 바랐다. 더이상 설명해주는 것이 괴로웠다. 의과대학 시절의 선배인 서 박사에게서 이 환자를 소개받았을 때 장 박사는 평소의 차분하던 서 박사의 당황해하던 모습으로 환자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았다. 


  “아무래도 증상이 심상치 않으니 수술을 부탁해야겠어요.” 


서 박사는 일제강점기에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전문의 자격을 따고 충무로에 개업한, 그 당시 흔치 않던 유명한 내과, 소아과 여의사였다. 서 박사와 이 환자는 보통 환자와 의사 사이가 아니었다. 환자와 인근에 살아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중 6.25가 발발하자, 당시 미국 대사관의 한국인 책임자로 근무하던 이 환자의 주선으로 서 박사는 일찌감치 부산으로 피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대신동 피난민촌에 판잣집 병원을 개업하여 그런대로 피난 내려온 환자들을 돌보며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전쟁 직후라 모든 것이 부족한 형편이었지만 이 환자를 통해 미국 대사관의 특별 배려로 소화제나 페니실린 등을 공급받을 수 있어 서 박사의 병원은 환자들로 늘 붐볐다. 이 환자가 얼마 전부터 소화가 잘 안되고 배가 불편하다고 하소연 해왔다. 요즈음 같으면 내시경 검사도 할 수 있고 초음파니 캣 스캔 검사로 즉시 발견해내는 암이지만 그 당시로서는 촉진과 교과서에 의한 불길한 추측 이외에는 배를 째고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확실한 진단을 할 수가 없었다. 보통 처방약으로는 전혀 회복의 기미가 없고 조금씩 여위어가는 환자의 상태를 주시하며 서 박사는 평소에 신뢰하던 외과의인 장 박사에게 환자를 부탁했다. 


  “지금 형편에 어느 병원에서 이 큰 수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이 정도의 수술은 그날로 퇴원하여 나올 수도 있고 사나흘 정도의 입원이면 된다. 그러나 50년 전, 그때는 막 휴전협정이 이루어진 전쟁 직후였으며 폭격을 면한 병원이나 임시로 마련된 응급 치료소도 부상병들의 치료를 우선으로 했다. 게다가 그나마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병원마다 치료받지 못하는 환자로 넘쳐났다. 하지만 이 환자는 미국 대사관의 배려로 장 박사의 집도 하에 마침 그 당시 부산항에 정박해 있던 스웨덴 병원선의 한 수술실을 빌려 수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병원선은 세계 적십자사 소속으로 6.25에 파병된 유엔군을 위해 바다 위에 떠있는 종합병원이었다. 장 박사는 최첨단의 병원시설을 갖춘 이 병원선에서, 어쩐지 마음이 가던 이 환자가 대책 없는 말기 암 환자로 밝혀진 것이 너무나 답답하고 가슴 아팠다. 그 어떤 최첨단 의료기기도, 실력도, 의약품도, 아직은 미지의 세계인 이 말기암 환자에게는 다 무의미했다. 


장 박사는 며칠 전 만났던 이 환자의, 아직은 크게 병색이 드러나지 않은 활기 넘치고 준수한 모습을 떠올렸다.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인 39세의 일본 동경대학 출신. 영어와 독일어 그리고 일본어에 능통하며 미국 대사관과 운크라(현 유네스코)에서의 한국인 총책임자인 그. 앞날이 창창한 엘리트다. 슬하에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열한 살 장남, 아홉 살 된 장녀, 여섯 살 차남, 네 살 된 딸. 이 쪼랑쪼랑한 아이들과 젊은 환자의 부인을 생각하며 장 박사는 아직은 미지의 세계인 이 암이란 질병에 새삼스레 진저리가 쳐졌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쩐지 오래된 친구같이 허물없는 느낌을 받았었다. 환자와 의사로서 만났지만 같은 이북 출신인 데다 서로 대화가 통하는 동년배여서 이북에 두고 온 가족들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어서였을까⋯.


  “장 박사님, 내 병명이 무언지 짐작되는 게 없습니까?” 


그때 이 환자는 조심스럽게 물었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불길한 조짐이 자신의 몸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을 감지한 듯했다. 장 박사는 환자의 위를 촉진할 때 손끝에 만져지던 의심스러운 촉감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열어서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속단할 수 없다.    


  “위에 이상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오픈해보지 않고서는 정확한 대답을 해드릴 수가 없군요.”    

  “약이나 주사로는 치료가 안되고, 그러니까 꼭 수술을 해야만 병명을 알 수 있다, 라면 박사님께서는 혹 암이 아닐까 의심하고 계시는 거지요?” 


환자의 예리한 질문에 장 박사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의사의 대답을 굳이 안 들어도 알겠다는 듯 환자는 더 이상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었다. 의사로서의 소견으로 이 환자의 미래는 없었다. 아깝다. 너무 아깝다. 어린 자녀들에게뿐만 아니라 할 일이 너무나 많은 인재가 암으로 앞날을 차단당한 것이다. 장 박사는 수술 결과와 그 예후 등에 대해서는 서 박사에게 일임하기로 하고 병원선을 떠났다.


 

                                                                                ***** 


이 환자의 아홉 살 난 딸은 나 자신이다. 

그 해 겨울 우리 가족은 수복된 서울로 올라갈 준비와 아버지의 병환으로 집안이 어수선했었다. 나는 6.25 나던 해, 을지로 5가에 있는 사대 부속 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했었다. 입학하고 '영희야, 철수야'를 선생님이 부르는 대로 따라 목청을 돋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6.25가 터진 것이다. 우리들은 대사관에서 제공된 트럭에 실려 남쪽 끝에 있는 부산으로 떡과 엿을 떼어먹으며 피난을 갔다. 그리고 역시 부산으로 피난 온 이 학교가 보수산 산자락에 임시로 피난 학교를 열고 수업을 시작하여 우리들은 다시 학교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학교라고는 하지만 나무에 칠판을 걸어놓고 그 앞 땅바닥에 둘러앉아 수업을 받았는데 지붕도 없는 노천 학교라 그날그날의 일기에 따라 집에 그냥 머물러 있어야 하는 때가 많았다. 그래도 그 노천 피난학교에서 우리들은 한글을 깨쳤고 덧셈, 뺄셈도 배웠다. 우리 피난학교 아이들은 부산 토박이 아이들에게 괄시를 받았는데 그 애들은 때로는 우리들에게 돌을 던지기까지 했다. 철없는 아이들의 짓거리이긴 하지만 우리들은 주눅이 들어 그 애들이 모여있는 곳은 피해 다녔는데 그들은 멀리서 보면 우리들을 놀리는 합창을 하며 짓궂게 굴었다.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 좋은 다마내기!’ 


그 이상은 기억나지 않지만 의미도 뜻도 없는 이 노래가 들리는 곳을 피해 다니며 우리 피난학교 아이들은 서러운 피난생활을 겪어야 했다. 서대신동의 어느 공터에 천막을 치고 제법 운동장까지 갖추고 이사한 그 피난 국민학교를 다니던 4학년이 되던 그 해 겨울 휴전협정이 체결되었고 학교가 다시 서울로 올라간다고 발표하던 즈음 아버지가 큰 병에 걸리셨다는 것이었다. 


평소 아버지는 건강하셨다. 피난 시절이라고는 하지만 토박이 아이들에게 괄시받는 일을 빼고는 우리는 부족한 것 없이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주말에는 아버지에게 제공된 지프차에 온 가족이 올라타고 해운대나 감천 바다에 나가 파도를 타면서 뾰족 뾰족한 바위틈 사이를 헤집으며 퍼덕이는 물고기를 잡았고, 잡은 물고기를 꽃무늬 양산을 받고 모래사장에 앉아있는 엄마에게 달려가 자랑하며 보여주곤 했다. 때로는 동래 온천장에 가서 온천 목욕을 하고 탱자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냇가에 가서 송사리 떼들을 잡아보겠다고 첨벙거리기도 했다. 어린 시절 그때의 행복했던 기억들은 조각조각 모아져 한 폭의 아름답게 채색된 수채화처럼 지워지지 않고 내 마음속에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걸려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조각들은 아버지의 병환으로 무거운 막을 내렸다. 


아버지는 부산 부두에 정박해 있는 병원선에서 큰 수술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엄마와 남고, 우리들은 다니고 있던 피난학교가 이미 서울로 환도할 준비가 끝난 터라 우리를 뒤따라 이북에서 피난 내려와 함께 살던 할머니, 고모들과 먼저 서울로 올라가기로 결정되었다. 서울로 떠나기 전 우리 아이들은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방문 허가를 받았다. 차에서 내려 거대한 병원선 앞에서 기가 죽어 서있는 우리들 앞에 하얀 가운을 입은 키 큰 외국인 간호사들이 오더니 우리들 코트 자락을 들추고 온몸에 흰 가루를 뿌려댔다. 역한 냄새와 사방으로 날리는 가루에 코를 막고 질색을 하는 우리들에게 마침 우리들을 데리고 간 서 박사가 설명했다. 


  “예방약이야. 혹시 병원에서 균이 옮을까 봐 뿌리는 거야.” 


우리는 순식간에 허연 가루를 뒤집어쓴 이상한 존재들이 되어 한참을 그 자리에서 가루들이 제 몫을 다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우리가 옮을까 봐 하는 염려가 아니라 우리가 균을 옮길까 봐 뿌린 DDT였을 것이다. 전쟁이 터진 나라의 국민이란 그들 병원 관계자들의 눈에는 나쁜 균이 득시글거리는 존재들이었을 뿐이었고 게다가 그 당시에는 이와 빈대들이 겉옷에까지 스믈거리던 때였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나는 이 역사적인 병원선 방문을 이 DDT 세례를 받은 충격으로 그 이상은 기억을 못 한다. 아버지는 내가 예쁜 옷을 입고 커다란 리본을 머리에 달고 한껏 모양낸 모습을 보여드리면 ‘예쁘다, 우리 딸이 제일 예쁘다’ 하며 즐거워하셨다. 6.25전, 유치원에 다닐 때는 명동의 노블 양장점에서 코트를 맞추어 입혔고 그 시절 귀한 미제 구두를 사서 신겼다. 병원의 아버지를 방문하러 가는 날도 나는 아마 그 자리와 분위기에 어울리지는 않았겠지만 아버지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피난시절 최고의 옷을 차려 입고 갔었을 것이다. 거기에 고약한 DDT 가루를 사정없이 그 외국 간호사들이 뿌려 댔으니⋯⋯. 나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어린 마음이지만 그건 더럽고 추한 거지들이 받아야 할 대접이었다. 나는 싫었고 자존심이 상해 그 이후 살면서 한동안 보았던 DDT를 보게 되면 소름이 끼치는 알레르기가 생겼다. 그 DDT는 한참 후에 이 나라에서 사라졌지만 그 시절을 겪은 사람들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파란 눈의 키가 큰 간호원들이 우리 아이들 손을 하나씩 잡고 병원선 입구로 연결되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아버지를 만나고 돌아와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의 일들은 내 기억 속에 없다. 단지 이런 곳에서 수술을 받는 아버지는 반드시 병이 나아서 서울로 오실 것이라는 확신만은 갖고 돌아왔을 것이다. 


아버지와 엄마를 병원선에 남겨놓고 우리들은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로 돌아와 보니 우리 저동 집은 반은 다 뜯겨 나가고 한쪽은 해병대가 사무실로 쓰고 있는 데다가 안방, 건넌방과 마루방, 그리고 목욕탕까지 방으로 개조해서 이북에서 피난 내려온 일가친척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빈집에야 들어와 사는 사람이 주인이지만 그래도 주인이 돌아왔는데도 꿈쩍도 안 하는 이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안방을 겨우 회수해서 짐을 풀었다. 이 집은 일본식 집이었는데 ㄱ자로 꺾인 복도를 옆에 두고 유리로 된 여닫이문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고, 다다미가 열 몇 장씩 깔린 넓은 방이 장지문을 사이에 두고 두 개 맞붙어있었으며, 남서향의 햇볕이 열어놓은 방문을 따라 깊숙이 들어와 한겨울에도 따뜻하던 넓은 방이 있었다. 부산 피난시절 나는 어쩐지 이곳을 몹시 그리워했었다. 그 넓은 다다미 방의 방문들을 다 열어 놓으면 탁 트인 앞마당에는 꽃이 가득 만발한 꽃밭이 보였고, 그 뒤쪽에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두 팔을 벌리듯 견고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가지 하나에는 우리들의 그네가 메어져 있었다. 나는 이따금 그 그네에 매달려 대룽거리며 햇볕이 가득 들어찬 방에서 아버지가 친구들과 차를 마시며 담소하던 일과, 하얀 돌멩이를 쌓아놓는 마작이라는 놀이를 하던 모습을 생각하곤 했다.

그 따듯한 기억 속의 다다미 방은 시커먼 흙이 드러난 골조만 남아 있었고 담벼락 대신 둘러 쌓여있던 유리창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그것들을 받쳐주던 기둥들만이 앙상했다. 누군가가 사람들이 자기들 집에 쓰기 위해 뜯어갔다고 했다. 나는 서울로 환도하여 다시 시작한 학교에 4학년이 되어 등교하였다. 구구단을 배우고 분수도 배우고 빨갱이들이 얼마나 무서운 지도 배웠다. ‘상기하자 육이오’라는 제목의 포스터 응모에 우리 반 아이가 입상했는데 무섭게 생긴 빨간 머리 양쪽에 뿔 달린 괴물이 두 손을 번쩍 들고 울상을 하고 쩔쩔 매고 있는데 그 뒤에서 용감한 우리 국군 아저씨가 총을 겨누고 있는 내용의 포스터였다. 나는 오랫동안 이북의 빨갱이들은 그런 괴물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지금 한국 응원단을 상징하는 붉은 악마의 모습은 똑같은 외모를 가진 귀여운 모습이지만 그때의 빨갱이 붉은 악마들은 무섭기만 했었다. 



                                                                                    ***** 


2월 초, 춥고 바람 불던 어느 날, 아버지는 엄마와 함께 서울 저동 우리 집으로 돌아오셨다. 

한 달 남짓 떨어져 있는 동안 아버지는 무섭게 변해 있었다. 아버지는 잘생기고 풍채가 좋았으며 항상 웃는 얼굴로 우리들을 내려다보셨었다. 그런데 그동안 아버지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움푹 꺼진 볼이며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훌쭉한 모습은 쳐다보기조차 무서웠다. 나는 뒤로 숨었다. 아버지는 뒤로 숨은 나를 잠시 바라보고 말없이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 후 나는 너무나 마르고 날카로운 눈빛만 남은 아버지가 무서워 아버지가 누워있는 안방 근처에는 얼씬도 안 했다. 그날부터 많은 피난민 친척들로 떠들썩하던 집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이 구석 저 구석에 모여서는 찬송가를 부르며 기도회를 열었다. 


  “너도 아버지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모가 그들 옆에서 빈둥거리는 나를 끌어다 놓고 말했다. 


  “자, 내가 하는 대로 따라서 해봐.” 


나는 이모가 시키는 대로 두 손을 모았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아버지가 몹시 아픕니다. 아버지의 병이 낫게 해 주십시오. 하늘나라에 데리고 가지 마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멘.” 


앵무새처럼 이모의 기도를 따라한 나는 그날부터 틈틈이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열심히 이 기도문을 외웠다. 내가 제대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데려가실까 봐 겁이 났다. 나도 오빠도 동생들도 밥 먹을 때나 공부할 때나 합창하듯이 기도문을 외웠다. 



구정이 되었다. 나는 이 1954년 구정을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한다. 

아버지가 중병으로 누워있었지만 그래도 찾아온 설날은 내 가슴을 설레게 했다. 6.25 전이나 피난 시절이나 구정은 우리 집이나 내게는 가장 큰 명절이었다. 나는 그 전 해 추석빔을 지을 때 구정에 입을 한복도 미리 장만해두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복이 아버지가 누워있는 안방 장롱 속에 들어있는 것도 눈여겨보았었다. 색동저고리에 빨간 모본단으로 만든 우아한 긴치마가 색동 솔이 달린 하얀 버선과 같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하필 그것이 들어가기 싫은 안 방 장롱 깊숙이 들어있는 것이다. 


구정 전 날, 그래도 많은 식구들이 그냥 지낼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부엌의 커다란 가마솥에는 떡국 국물이 끓고 전 지지고 만두 빚는 손들이 제법 흥겹기까지 할 때 나는 안방 문 앞에 퍼지고 앉아 떼를 쓰고 있었다. 


  “엄마 내 한복 꺼내줘어⋯, 설날에 입는다고 새로 만들었잖아⋯. 내일이 설날인데 빨리 꺼내줘⋯.” 


할머니가 쫓아와 내 등짝을 철썩 치며 나무랐다. 


  “이 철없는 에미나이야, 네 아바이가 저렇게 아파서 누웠는데 설빔 입을 마음이 생기냐?” 


나는 새 한복을 못 입는 것이 억울한 데다가 할머니한테 야단까지 맞으니 병든 아버지가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다. 나는 아예 방문 앞에 누워버렸다. 그리고 두 발로 방문을 쾅쾅 질르며 악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엄마가 나를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조용히 하지 못하겠니?” 


나는 꿈쩍도 안 하고 더욱 기세를 올려 아우성을 쳐댔다. 그때였다. 그동안 기운이 없어 말도 잘 못하시던 아버지의 조용하지만 뚜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우리 딸의 한복을 꺼내 주구려, 설인데 얼마나 입고 싶겠소?” 


그 조용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 철없는 작은 영혼에 멈칫하고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내 아홉 살짜리 두뇌 속에 그 목소리는 마치 아버지의 딸에 대한 사랑을 가득 적재한 팽팽한 고무풍선이 터져 흩뿌리며 내리는 듯하였다. 이모가 뒤에서 혀를 차며 한탄하는 소리가 들릴 때 나는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에이구, 이 철없는 것아⋯.” 


이모가 눈을 흘기며 건네준 한복을 받아 들고 그래도 부끄러웠던지 그걸 입겠노라고 설치는 짓은 하지 못하고 나는 슬금슬금 어른들 눈치를 보다가 그대로 방에 들어가 이불을 쓰고 누워 버렸다. 


그 말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내게 남겨준 사랑의 언어였다. 구정 바로 다음날 아버지는 엄마와 우리들 사 남매를 남겨놓고 저 세상으로 가셨다. 온 일가친척들과 식구들이 떡국을 먹으며 제대로 설날 기분을 낸 그다음 날 아버지의 몸속에서 요동치던 암은 아버지를 저 세상으로 데리고 가 버린 것이다. 그 해 구정 새로 지어놓았던 한복은 끝내 입어보지 못한 채 우리들에게는 상복이 입혀졌다. 울긋불긋 구정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설빔은 사라지고 우리 계집아이들에게는 흰 광목으로 투박하게 지어진 흰 치마저고리가, 그리고 아들들에게는 흰 두루마기와 흰 두건이 씌워졌다. 유난히 삭풍이 몰아치던 그 며칠 후, 아버지는 통일이 되면 고향 사리원으로 돌아가 선산에 묻어야 한다고 임시로 망우리 묘지에 묻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서너 달쯤 지나서였다. 명동성당 앞 언덕을 내려오는데(우리 집은 바로 그 옆에 있는 영락교회 앞에 있었다) 사람들이 둥그렇게 둘러서서 무슨 구경들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 틈을 헤집고 들어가 보니 약장수가 뱀을 손에 들고 약을 광고하고 있었다. 그는 목에 꿈틀거리는 뱀을 목에 감고 손에 조그만 병을 들고 약을 광고하고 있었는데 얼핏 내 귀에 위암이란 단어가 들어왔다. 그 뱀으로 만든 가루에 이것, 저것 산에서 캐어온 귀한 약재를 넣어 만든 명약인데 한 병만 물에 타서 마시면 온갖 위장병은 물론 위암도 거짓말처럼 낫는다는 광고였다. 


  “뭐든지 먹기만 하면 뱃속이 짜르르 아프다가 사루마다에 사전 예고도 없이 물똥이 되어 나오는 사람! 혹은 먹기만 하면 소화도 안 된 그대로 입으로 음식이 다시 튀어나오는 사람! 또 위암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이 병은 사람의 기가 위에서 빠져나가지 못해 생긴 혹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이 신비의 명약을 한 병만 먹으면 만사형통! 툭툭, 털고 일어나 기운찬 내일을 살게 됩니다!” 


나는 해가 서산에 기울어 사람들이 자리를 다 떠나고 약장수가 보따리를 쌀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너무나 원통하고 분했다. 진작에 이 약장수를 알았더라면 아버지는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것을⋯.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 보고 살려달라고 기도만 할 일이 아니었다. 진작에 저런 용한 약장수를 만나 그 신기한 병 속의 가루를 먹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아버지의 위장병은 깨끗이 나았을 것을⋯. 

나는 사과상자를 이어서 엉성하게 만들어놓은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조그만 약병들을 눈이 시리도록 바라보았다. 한 병, 한 병이 반짝거리는 보석 같이 귀해 보였다. 아⋯! 저 약병 하나를 얻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 아버지의 병이 나아서 지금 우리 곁에 계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이미 어둑어둑해진 길을 집을 향해 걸으며 그 기회를 놓치고 우리들 곁을 떠난 아버지가 가엾고 서러워서 소리 내어 울었다. 이때의 아쉬움이 얼마나 컸던지 그 병 속의 가루는 이따금 꿈속에서도 나타나곤 했다. 할머니가 두 가닥으로 땋아 내린 머리끝에 달아준 흰 리본이 싫어서 집을 나서면 슬그머니 잡아떼어 호주머니에 넣곤 하던 그 어린 시절,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귀신 도깨비가 아닌 암이란 글자였다. 나는 아직도 그 병원선의 DDT 가루 냄새를 이따금 맡는다. 아마 같은 용도로 쓰이는 어느 화학물질일 것이다. 이 냄새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슬픔이 되어 다시는 입을 수 없어 장롱 속에 처박힌 채 자꾸만 작아져 간 내 설빔을 아프게 그립게 한다. 그리고 퀭해서 무섭던 아버지의 눈빛과 그 아버지에게서 들은 마지막 목소리, “여보, 우리 딸에게 설빔을 내어 주구려” 그리고 보석처럼 빛나던 약장수의 뱀 가루로 만들었다는 명약 위장약과, 절망과 회한의 어린 가슴으로 울며 걷던 황혼의 명동성당 앞 언덕길. 그런데 어린아이들이 목청을 돋구어 합창같이 외우던 기도문을 외면하셨다고 생각했던 하나님은 그래도 우리들을 붙잡아 주셨는가.  사랑하는 육신의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지만 주님 손을 잡고 감사의 날들을 살아왔다고 나는 믿는다. 


아버지는 끝내 선산이 있는 황해도 사리원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온 식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니 어머니가 이미 백골이 된 아버지의 유해를 화장하여, 가루가 된 뼈를 강물에 뿌렸다고 했다. 세월이 흐르며 그 두렵고도 멀던 망우리는 더 이상 죽은 사람들이 묻히는 곳이 아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장소로 바뀌었다. 식당과 양품점과 노래방이 즐비한 곳. 이렇게 세상이 바뀌어도 암은 아직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인 가⋯. 반세기 전의 세월에 아버지의 자리에 찾아온 암. 이제 인간은 달을 정복할 수는 있어도 우리 몸속의 돌연변이 세포는 정복할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일까⋯.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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