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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영 Oct 20. 2021

100년의 어머니


  “어머니가 간호사에게 양로원으로 가시겠다고 했는데 너랑 이야기가 된 거니?”


어머니의 병실 담당 소셜 워커(사회복지사)가 내게 물었다.


  “어머니가 양로원으로 가신다 하셨다고?”


노인 아파트에 홀로 사시는 어머니가 호흡 곤란으로 병원에 입원하신 것은 90세 생일잔치를 지난 후 두 달쯤 지나서였다. 평소 협심증 증세가 있었던 것 외에는 무엇하나 지병이라고는 없는 건강한 분이다. 걸음걸이도 꼿꼿하여 100세도 거뜬히 사실 것이라고 주위에서 말하곤 했다. 게다가 고혈압이나 콜레스테롤, 당뇨 등  그 어떤 노인성 지병도 없으셨다. 자기 관리에 철저하신 데다가 평생 기름진 음식을 싫어하셔 거의 입에 대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래서 우리도 어려서부터 기름진 음식을 못 먹고 자랐다.


응급실에 들어오신 어머니는 역시 심장이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아 몹시 숨차 하셨다. 모든 검사 끝에 진단이 나왔는데 심장에 심장 보조 박동기(pace maker)를 삽입해야 했다. 먼저 환자가 의식이 명료하니까 설명해 드린 후 동의를 받아야 했다.


  “어머니, 심장이 힘이 약해져서 페이스 메이커라고 하는 심장 보조기를 달아야 한대요.”

  “그게 뭐냐?”

  “쉽게 말하자면 심장이 약해져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까 거기에 배터리를 넣어서 심장이 잘 뛰도록 

    하는 거예요.”

  “싫다. 이토록 오래 살았는데 배터리까지 넣어가면서 오래 살 생각 없다. 그리고 숨이 찬 것도 많이 나았어.”


어머니는 일언지하에 안 하시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나도 90세의 어머니가 꼭 이 페이스 메이커를 해야만 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는 심장 전문의인 친구에게 어머니의 상태를 전한 후 이 시술을 꼭 해야만 하는가고 자문을 구했다.

답은 간단했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심장이 뛰는 것을 멈춰가면 결국 숨을 못 쉬어 질식하듯 고통스럽게 돌아가신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건강상태로 보면 이 시술을 하면 앞으로 10년은 끄떡없으리라고 덧붙였다.

그대로 어머니에게 전했더니 서서히 질식해서 죽는다는 대목에서는 그건 싫으셨던지 “그럼 해야 되겠지?” 선심 쓰듯 말하며 내게 동의를 구했다.

그렇게 왼쪽 가슴에 성냥갑보다 조금 큰 사이즈의 상자 같은 페이스 메이커를 부착하는 시술을 받은 며칠 후 다시 힘차게 뛰는 심장을 가지게 된 어머니는 담당 간호사에게 퇴원하면 그동안 사시던 노인 아파트로 돌아가는 대신 양로원으로 가게 해달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연세가 많기는 하지만 어머니를 양로원으로 모시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혼자 사시면서 필요한 외출도 하실 만큼 거동이 불편한 것도 아니고 생활 보조인이 매일 와서 네 시간씩 청소나 음식 준비 등 집안 살림에 필요한 것들을 도와주기 때문에 큰 병이 없으시다면 혼자 계셔도 우리가 그다지 신경 쓸 일은 없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어머니, 간호사한테 퇴원하면 아파트로 안 가고 양로원으로 가시겠다고 했어요?”

  “그래, 간호사가 그러던?”


어머니가 자랑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딸을 제쳐두고 간호사와 영어로 의사 전달이 될 수 있다는 만족감이 그 미소 속에 담겨 있었다.


  “너희들이 편해야 내가 편하다. 내가 가슴에 배터리를 차고 아파트에 혼자 있으면 너희들 마음이 편치 않

   을 게 뻔한데, 너희들도 바쁜 생활에 나 때문에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고 또 혼자 있다가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니. 그래도 양로원에 있으면 돌봐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오히려 내 맘이 편해. 너희들이 불편하

   면 내 마음이 안 편해.”


우리들을 위해 양로원에 가시겠다고 선언하신 어머니. 

그 전날 입고 빨아놓은 양말이랑 속옷 가지가 목욕탕 빨래걸이에 그대로, 밥상에 물 잔이 그대로 놓여 있는 채 응급실에 들어오신 어머니는 병원 퇴원과 함께 양로원으로 옮겨 가셨다. 


  “집에 아무것도 없으니 나는 몸만 가면 될 터이고 신통하지는 않아도 가구 같은 거는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다 줘 버리면 돼.”


평소의 꼼꼼하고 내 물건 살뜰히 챙기시던 확실한 성품의 어머니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모든 소유품에 

대한  관심을 놓으신 듯했다.

노인 아파트에서 양로원으로 옮겨가면 한 달 안으로 방을 빼야 한다.

혼자 살림이라고는 하지만 20년 가까이 사시던 아파트에 왜 아무것도 없을 수가 있겠는가…. 부엌 딸린 거실

에 침실 한 개뿐인 조그만 아파트에 있는 물건들을 버리고 원하는 사람 찾아내어 나눠주고, 내가 챙길 것 챙기고 청소까지 끝내는데 꼭 한 달이 걸렸다.

거실에 앉아 드넓은 유리창 너머로 지는 석양을 바라보면 옛날 생각에 잠기게 된다고 하시던 그 시간들을 뒤로하고 서둘러 자식들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 그래야 내가 편하시다며 어머니는 양로원으로 자리를 옮겨 가셨다.

어머니는 그 뒤로 한 번도 떠나온 아파트의 어머니 소지품에 대해 묻지 않으셨다.

그대로 손에서 놓아 버리신 듯했다. 우리들이 다 알아서 정리했겠지 하셨을 것이다.


                                                                                 ******


- 친구들….


1920년생인 어머니는 1980년 초 미국에 살고 있는 딸, 우리 집에 오셨다.

지금 80을 바라보는 내 나이를 생각해보면 이제는 초로라고 하기에도 너무 젊은, 육십을 갓 넘긴 연세였다.

내 집에 계시던 어머니는 처음 수년간은  2, 3년에 한 번씩 한국을 다녀오셨다. 

작은 아들만 한국에 살고 있었고 자녀 셋이 다 뉴저지에 가깝게 살고 있어서 보고 싶은 사람은 한국의 친구들

뿐이었다. 여고 시절부터 친했던 속 사정 다 아는 친구들이라 서로 가릴 것이 없던 친구들은 그 당시 국제전화

료가 상당해서 전화로 수다 같은 것은 떨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쩌다 친구들과 통화할 기회가 생기면 전화통을 들자마자 냅다 하는 소리가 “빨리 끊어. 전화요금 많이 나와, 그래 알았어. 그래, 나 한국에 나가면 연락할

게, 뭐라고? 뭐 사 가지고 오라고? 그래 알았어. 뭐? 그 애가 동창회에 가죽 바지를 입고 나타났다고? 그 애는 옛날부터 멋쟁이야. 그래도 나이를 생각해야지….” 수다는 한없이 계속되면서 계속 '빨리 끊어'는 틈틈이 잊지 않았다.


어머니의 친구들은 30대 초, 중반도 되기 전에 6.25를 겪으며 남편을 잃고 어린아이들이 둘, 셋씩 딸린 과부들이었다. 그들 젊은 남편들은 납북되었다고도 했고 월북하기도 했으며 행방불명이 되기도 했다.

부산으로 떠밀려 피난 내려가 우리가 머물던 집 건너편 자기 오빠네 집 목욕탕을 개조하여 어린 딸 둘을 데리고 살던 영근 아주머니는 서울의대 교수였던 남편이 6.25 며칠 후, 잠깐 학교에 다녀오겠다며 외출한 후 돌아오지 않은 처음 몇 년은 혹시나 돌아올까 매일 문가를 바라보며 살았다고 했다.

또 다른 친구 명순 아주머니는 여고시절 그 댁에 놀러 가면 하인이 나와 무릎을 꿇고 신발을 벗겨 신발장에 넣고 덧신을 공손히 손에 받혀 신겨주던 대단한 신분 출신이며 남편은 그 옛날 미국에 유학한 인텔리라고 했다.

6.25 반발 초기에 남편 밑에서 일하던 직원이 한밤중에 와서 남편을 반동분자라며 끌고 간 후 소식이 없다고 했다. 그 아주머니는 피난 갈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어린아이 셋을 데리고 그래도 그 치하의 서울에서 견뎌냈는데 근근이 예부터 간직하고 있던 집안의 귀중품을 들고 나와 쌀과 바꿔 목숨을 이어갔다고 했다.

수년 후에는 그나마 집도 없이 여기저기 친척집 문간방을 전전하며 모질게 살았는데 세월은 그래도 아이들을 어른으로 만들어주었고 어른이 된 아이들은 제 몫을 할 수 있어서 먹고사는 걱정을 면했다고 했다.

남편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세월이 흐르며 체념이 되어 더 이상 문 밖의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이는 기다림도 하지 않게 되었다.

또 한 분, 보성 아주머니는 내가 평생 잊을 수 없는 분이다. 이분은 가끔 효자동에 있는 병원으로 어머니의 심부름을 가면 멀리서도 '정보성 산부인과'라고 크게 쓰인 간판이 보여 나는 그분이 산부인과 의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당시로서는 산파가 집에 와서 뜨거운 물을 끓이게 하고 산모에게서 아기를 받는 것 이상의 상식은 없었는데 어찌 되었던지 그분은 모든 친구들 중에 제일 생활 형편이 좋았다. 나는 알게 모르게 우리가 한참 어렵던 시절 이 분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보성 아주머니는 우리 집 주치의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요즈음 병원에서 말하는 그런 의미의 주치의는 아니고 우리들이 감기 들거나 아플 때면 페니실린 주사를 놔주는 일에서부터 어딘가에 종기가 나면 고름을 짜내고 약 발라주는 일이며, 건네주는 세모난 봉

지에 들은 약 가루를 먹으면 만병통치였다.

훗날 어머니가 미국에 오신 후에도 보성 아주머니와는 계속 연락을 주고받아 어머니의 노인 아파트에 오셔서 며칠간 함께 지내시기도 하였다.

그렇게 6.25 사변은 송두리째 수많은 가정을 파탄 내버렸으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흐르는 세월 속에 목숨을 이어가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어른들은 노인이 되어갔다.

부산 피난살이에서 서울로 다시 돌아왔으나 생활 형편이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모두가 어렵던 시절, 그래도 여고 동창생 친구들은 서로 찾아다니며 챙겼다.

깔깔거리며 수다를 떨던 옛 시절은 그리움으로 남았고 자꾸만 늙어 갔다.


나는 아이였을 때부터 어머니의 친구들이 저동에 있던 우리 집에 오면 그들의 대화 속에 끼어 앉아 나누는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핀잔도 많이 들었다.


  “너는 왜 네 방에 가서 공부는 안 하고 어른들 틈에 턱 받치고 앉아있니?”


사실 공부하는 것보다는 그 어른들의 이야기에 끼어 앉아 오가는 이야기 듣는 것이 훨씬 재미있었다.

아마 지금 내가 오지랖이 넓다는 비난인지 칭찬인지 모르는 소리를 듣는 것이 그런 성향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수 십 년 간 친 자매보다 가깝게 지내던 이 숙명여고 23회 졸업 동창생인 친구들과는 아무도 작별인사를 하지 못한 채 한 분씩 사라져 갔다.


                                                                                ********


- 노인 아파트


미국 내 집에 계시던 어머니는 수년 후 가까운 타운의 노인 아파트로 입주하여 독립하셨다.

어머니가 계시던 노인 아파트는 원래 유태계 미국인이 경영하던 곳인데 이 부근에 한국인들이 많이 살다 보니 200여 개의 객실에 거의 반 이상의 한국인이 입주해 살고 있다. 이 노인 아파트에는 아무나 입주할 수가 없다.

미국 정부에서 인정하는 저소득자 신분이 확인되어 메디케어(의료 혜택)와 메디 케이드 증명 카드가 있어야 한다. 이 메디 케이드는 미국에서 신통한 수입 없이 사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플랜이다. 내 어머니는 영주권을 받고 미국에 오신 후 만 5년이 지나면서 메디케어를 받고, 이어서 신청한 메디케이드(65세 이상 저소득자)를 받으셨다. 메디케이드는 미국인이 미국에 살면서 국가에서 받는 혜택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내가 미국에 와서 한 일이 뭐가 있다고 이런 대접을 받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황송하다고 했다.


평생  출근 도장을 찍으면서 세금을 나라에 바쳐야 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바라지도 못할 호강이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했다.


  “미국에 살면서 제일 팔자 좋은 것은 메디케이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적당히 놀고먹으며 메디 케이드 혜택

   받으면서 살다가 양로원에서 죽는 것.”

 

전혀 건설적이지 못하지만 이런 말이 나오는 것도 일리가 있다.

평생 일하면서 세금을 잘 내며 살다가 은퇴한 후 매월 정부로부터 받는 소셜 시큐리티로는 겨우 먹고사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저소득층은 아니어서 메디케이드 혜택을 받지 못한다. 한정 금액에서 10불이 넘어도 거절당한다. 별도의 저축이 없는 사람은 살기가 힘들어져 가지고 있던 자동차나 집을 팔아야 되고 그 돈이 완전히 바닥이 나면 면밀한 조사 끝에 거의 죽을 때가 되어야 정부로부터 메디 케이드 혜택을 받게 된다.

그렇다고 어느 부모가 태어난 아이의 장래 희망을 메디 케이드 수혜자라고 할 것인가….

내 어머니도 그 혜택으로 노년의 미국 생활을 불편 없이 할 수 있었으니 어울러 나도 덕을 본 셈이다.


어머니는 노인 대학에도 가고 친구들과 유럽 여행도 다니는 생활도 여유롭게 하셨다.

친구들과 만나는 것이 중요한 한국 여행은 2년에서 3년으로, 5년으로 방문 수가 뜸해지면서 85세 때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가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만나면 즐겁던 한국의 친구들이 하나씩 세상을 떠나고 귀가 안 들려 소통이 안 되게 되고 혼자 외출을 할 수 없어 자식들이 모시고 나오지 않으면 집에서 꼼짝도 못 하는 신세들이 된 것이다. 전화 통화가 안 되니 연락이 두절되고 그러다 보니 한국에 가도 만날 친구들이 끊겨버린 것이다.

끝까지 경쾌한 목소리로 수다를 떨 수 있었던 한국의 여고 동창생 친구들은 여든 다섯 즈음에는 거의, 연락의 끈이 다 사라져 버린 듯했다.

이 일제 강점기인 1939년 숙명여고 23회 졸업생 어머니 친구들은 하나씩, 하나씩 서로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셨다. 송별회도 없었고 그리고 아무도 배웅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한국 방문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으나 미국에서 지내는데 어느 정도 익숙해지신지라 어머니는 크게 상심해하지는 않으시는 것 같았다. 

양로원으로 가시기 전 20년 가까운 세월을 노인 아파트에서 사신 어머니에게는 그녀의 생애에 가장 편안하고 마음 쓸 일이 없으셨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


- 위대한 어머니 (노인 아파트 생활)


  “내가 어딜 좀 가야겠는데 오늘 시간 있니?”


주중에는 직장에 출근하는 걸 아시니까 이런 전화는 안 하시지만 주말에는 종종 호출을 하신다.


  “어디 가시게요?”
  “응. 내가 꼭 갈 데가 있다.”
  “그러지요, 제가 하던 것 좀 끝내 놓고 떠날 때 전화할게요.”
  “그래, 근데 몇 시쯤이나 될까?”


이럴 때는 섣불리 시간을 이야기하면 안 된다.

나는 다른 사람과 시간 약속을 할 때는 정확하게 시간을 지키는 편인데 어머니와의 시간 약속은 이상하게도 느긋해져서 노상 잘 늦는다. 그리고 항상 늦었다고 야단을 맞는다. 그래서 나도 요령이 생겨 어머니와 시간 약속을 할 때는 넉넉하게 잡는다.

어딘가 시간 약속이 되어 있으신 것이 아닌 게 분명할 때는 내가 시간을 정하는데, 그 1분 전도 1분 후도 나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어머니는 항상 먼저 준비를 하고 11층에서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시간까지 넉넉하게 계산을 하셔서 일찌감치 내려와 나를 기다리시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대개 두 세시쯤 될 것 같은데요.”


한 시간 정도 쭈욱 늘려서 대답한다.

  “내가 눈에 녹내장 약 넣어야 하는 시간이 네 시니까 그전에 돌아와야 한다.”

  “가시는 곳이 멀어요?”
  “가깝지만 걸어가기에는 좀 멀다.”
  “알았어요.”


일단 시간을 느지막이 잡아놓고 그 시간보다 조금 일찍 떠난다고 전화하면 기분이 명쾌하시다.


어머니는 금년이 90이시다.

포트리 노인 아파트에서 혼자 사시는지 15년이 되었다.

한국의 작은 아들 말고는 삼 남매 모두 어머니와 10분 내외의 거리에 살고 있고 같은 교회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늘 자주 만나면서 산다.

이렇게 꼭 중요한 일이 있어서 호출을 하는 일 이외에는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될수록 우리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가 않으시다며 혼자 해결하려는 노력이 대단하시다.

이따금 영어편지를 내보이며 물으신다.


  “이 편지, 아파트 관리 사무실에서 왔는데 내가 사전을 찾아보니까 이러저러한 것 같은데 맞냐?”

돋보기를 쓰고 온종일 연필을 들고 단어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면서 찾으셨을 테니 단어 나열만 해도 대개 그 내용이 맞게 마련이다.


  “어머니 영어 실력이 저보다 나아요. 백점이에요.”

  “후후, 정말?”


놀리지 말라고 눈을 흘기시지만 부끄러운 듯, 그러나 흡족하신 듯 후후, 하고 웃으신다.

어머니하고 함께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줄곧 창밖을 내다보며 즐비한 상점들의 영어 간판을 읽으신다. 우선 

알파벳을 읽고, 이어서 읽다가 막히면 내게 물으신다.


  “퍼스트 시티 뱅크, 메그도날드, 쇼부 라이뜨, 아이 센터. 얘, 아이센터가 뭐냐? 아이(eye)면 눈이라는 말일

   텐데 그럼 눈 센타라는 뜻인가…?”

  “눈 전문 병원을 그렇게 부르기도 해요.”

  “아니, 안과면 안과지 왜 아이 센터라고 하냐?”

  “영어로 안과하면 미국 사람들이 못 알아들으니까 그러지요.”

  “참 이상도 하다.”


안과를 아이 센터(Eye Center)라고 하는 것이 못마땅하신 듯하다.


어머니는 슈퍼마켓을 가셔도 필요한 물건을 그냥 담지를 않으신다.

카트에 넣기 전에 물건이 있는 봉투나 겉의 설명서를 꼼꼼히 들여다보고 계셔서 벌써 한 바퀴 휙 돌고 이미 계산대에 줄을 설 준비가 된 나를 짜증스럽게 만드신다.


  “물 그렇게 읽고 계세요?” 하면 “무언지 제대로 알고서 사야지” 하신다.

그쯤이면 나도 입을 다물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들여다보면 뭔지 아세요?”

그러면 어머니는 “너 사람 우습게 보지 말아라.” 하신다. 내가 어머니를 우습게 볼 턱이 있겠는가….

둘이 후후, 하고 웃는다.


어머니 아파트의 부엌 식탁 앞의 커다란 달력을 보면 스케줄이 대단히 바쁘시다.

일주일에 네 번은 노인 케어에 가신다. 그곳에서 영어 공부, 체조와 율동, 그리고 게임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이따금 영화 관람을 가거나 박물관도 방문하고 때로는 쇼핑도 가신다고 한다.

주일날은 교회에 가시고 토요일은 성경 공부, 구역별 성경 공부에 참석하신다.

일주일에 오전 세 번은 카운티에서 나오는 홈 케어에 의해 반찬 준비나 청소 및 빨래 등의 서비스를 받으신다.

걸러서 가시는 곳으로는 은행과 약국, 때로는 미장원을 혼자 다니신다.

틈틈이 안과, 내과, 발 병원, 피부과 등 전문 병원에 가실 때는 내가 모시고 갈 때도 가끔 있지만 타운에서 제공되는 교통편을 이용하신다.

이만하면 구십 노인의 스케줄 치고 빡빡하다고 안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때까지만 해도 길을 건널 때 팔이라도 잡아드리면 '아직 그런 부축은 안 받아도 돼'하며 뿌리치신다.

내 평생, 내 어릴 때나 노인 아파트로 독립해서 나가기 전 우리 집에 함께 사시던 때나 어머니의 흐트러진 모습이나 세수를 안 한 얼굴을 뵌 적이 없다.

항상 단정하게 차려입으시고 눈썹 그린 것이 짝짝이로 그려지지나 않았나, 하는 염려를 하면서 식탁에 앉으

시곤 했다. 나의 대강 편한 몰골의 차림새와는 대단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그 연세에 눈썹 좀 삐뚤어지게 그렸다고 누가 흉 볼 사람 있어요?”
 

못된 딸이 이렇게 야멸차게 핀잔을 주면 들은 척도 안 하시고 엄숙히 선언하셨다.

 

  “혹시 내가 죽어서 뷰잉(관을 열고 하는 장례식)이라는 걸 하면, 눈썹 그리는 거 절대 잊지 말아, 요즘은 타

   투라는 걸 다 해서 눈썹을 안 그리고들 살지만 지금 와서 그걸 하겠다고 할 것까지는 없고…. 어쨌든 눈썹 없

   이 흉한 꼴 보이기는 싫으니까….”

  “네, 알았어요.”


어머니는 언제부터인가 외출에서 돌아오시면 당신이 입으셨던 옷을 몽땅 세탁기에 넣어서 깨끗이 빨아 옷장에 정리해 넣으시곤 했다. 특히 속옷과 양말은 직접 손으로 빨아 목욕탕 옷걸이에 걸어 말려서 정돈해 놓으신

다. 단 한 번도 두 번 걸치시는 일이 없다.


  “내 나이면 언제 하나님 나라로 불려서 갈지 모르는데 신던 양말이나 속옷들 칠칠치 못하게 그냥 놔두고 가

   게 되면 안 된다.”


어머니는 그날 이후에라도 칠칠치 못했다는 뒷소리는 절대 듣고 싶지 않으신 것이다.

“짜장면 먹으러 갈까요” 하면 어김없이 시간을 달라고 하신다.

준비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필요하시다. 나처럼 집에서 입던 것 대강 걸치고 나오시는 법이 없다. 꼭, 스커트

만 입으시기 때문에 스타킹에서부터 속치마까지, 그리고 옷의 색깔에 맞추어 스카프에 목걸이까지 걸으셔야 외출 준비가 끝난다.

  “까짓 중국집에 짜장면 잡수시러 가는데 뭘 어느 굉장한 데 간다고 그렇게 모양을 내고 나오세요?” 퉁박을 

주면 외식하러 나가는 것만이 즐거운 어머니는 “왜? 내가 촌스럽게 입었냐?” 콧방귀를 뀌신다. 그리고,

  “나같이 나이 든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허술하게 하고 다니면 안 된다. 단정해야지 그나마 사람 취급을 받는

   다” 하신다.

그렇다고 내 어머니를 사람 취급 안 할 사람은 없겠지만 역시 옳으신 말씀이다.

딸 집에 오실 때도 절대 대강 차려입고 오시지 않는다. 여러 개도 아닐 핸드백 색깔까지 신경을 쓰셔서 바꾸

어 들고 나오느라고 뭘 빠트리고 왔다고 노상 한탄을 하시지만 내가 말려서 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자신을 가꾸는 노력은 어머니보다 조금 젊은 나도 못 따라간다.



어머니는 약속 시간보다 내가 5분을 일찍 갔는데도 벌써 내려와 문에 뚫린 손바닥만 한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

는 차를 내다보며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뭐 급히 사실 게 있어요?”

  “아니다. 포트리 플라자에 있는 보석상엘 가려고 그런다.”

  “보석상에는 뭘 하시려고?”

어머니가 갑자기 로또 당첨이 되셨나? 얼마 전 무릎까지 오는 살색의 양말을 사야겠다고 벼르시긴 했지만 별안간 보석상에는 왜 가시려는 걸까…. 도무지 갈피가 안 잡힌다.


  “내 손목시계 배터리가 나가서 포트리 보석상에 간다. 한국에서도 시계에 배터리가 나가면 보석상에서 새       것 넣어줬어. 시계를 못 보니 얼마나 답답한지….”


어머니 방에는 커다란 벽시계가 좁은 방에 두 개나 걸려 있다.


  “어머니 방에 벽시계를 보면 되지 손목시계 들여다볼 일이 뭐가 있으시다고.”

  “내가 집 안에만 앉아있냐? 밖에 외출할 때 손목시계가 없으면 얼마나 불편한데.”


물론 옳은 말씀이지만 시계에 배터리를 넣기 위해 보석상에 가는 일은 나로서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라 좀 얼떨떨했다.


  “보석상에서 어머니 시계에 배터리를 넣어줘요?”

  “지난번에도 거기서 넣어줬어.”

  “어머니 시계가 어떤 건데요?”
 

내가 무심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한심하게도 여태껏 어머니가 어떤 시계를 차고 다니시는지 모른다.
  “이게 말이다…” 하시며 어머니는 배터리 나간 시계가 감기라도 들까 봐 그러신 듯 손수건으로 정성스럽게 

싸놓으신 것을 풀어서 보여주신다. 흘깃, 보니 작고 동그란 낡은 시계가 보잘것없는 모양새로 부끄러운 듯    얼굴을 내민다.


  “싸구려 같은데…?”

  “야, 니가 몰라서 그래, 20년 전에 혜이니 에미가 준 건데 그 딴 싸구려 같은 소리 하지도 마라”


어머니는 자존심이 상하신 듯 화가 나서 일갈을 하시고 다시 소중히 손수건에 싸신다.


  “이 시계가 그때 혜이니 에비 직장에서 몇 주년인가 특별 기념으로 몇 개 만들어서 부부용으로 받은 건데 에

   미가 '어머니 쓰세요'하고 날 준 거야. 가죽끈이라 너무 낡아서 지난번에는 줄을 한번 바꾸고 또 한 번은 장

   식이 떨어져서 줄을 바꿨는데 시계가 얼마나 좋은지 20년이 더 됐는데 1분도 안 틀리고 간다. 뭐라나, 로렉

   스니 뭐니 하고는 비교도 안 돼.”


나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누군가가 돈을 얹어줘도 거들떠보지도 않게 생긴 이 낡은 시계에 배터리를 갈아 주

는 보석상이 있는 것일까….

상점들이 있는 쇼핑몰 주차장에 차를 세우며 건너편에 있는 보석상의 조명을 받아 진열된 반짝이는 보석들을 바라보며 나는 기가 죽어서 말했다.


  “배터리 갈아 넣어 주는데 얼마나 받아요?”


나는 걱정이 되었다.


  “지난번에 5불 주었다.”


어머니는 당당했다.


  “어머니 혼자 들어가서 하세요…. 저는 여기 약방에서 뭐 살게 있어요.”


나는 급히 발뺌을 했다.


  “걱정마라.”


나는 조그만 어머니의 뒷모습이 당당하게 보석상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훔쳐보듯 바라보았다.

약국에 들려서 내가 사야 할 것들이란 물론 없었다. 어쩐지 내게는 어머니의 그 당당함이 없는 것이다.

괜히 큰 사람, 높은 사람, 굉장한 부자 사람 앞에 서면 알지 못할 주눅이 드는 그것이 번쩍거리는 보석상에는 

들어갈 용기조차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게다가 다 알아주는 명품도 아닌 주제에 1분도 안 틀리는 20년 된 고물 시계에 5불짜리 배터리를 갈아넣기 위해 금빛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간다는 것은 나

로서는 안 되는 일이다.

어머니가 들어가신 보석상에 고개를 빼고 그 안을 바라보니 흰 와이셔츠에 노란 넥타이를 맨 깔끔한 청년이 어머니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더니 손수건에 쌓여있는 시계를 어머니가 꺼내 진열장 위에 놓는 것이 보였다.

즉시 돌아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일이 잘 풀려나가는 것일까….

약국에 볼일이 있다고 했으니 그냥 차 안에 앉아 있을 수는 없어서 차 문을 열고 나오며 다시 흘끔 들여다보니 어머니는 이제 고객용 의자에 점잖게 앉아 계셨다.

성사가 된 모양이다.

약국을 한 바퀴 돌고 나오니 핸드백을 옆에 낀 어머니가 노란 넥타이의 배웅을 받으며 모든 일이 잘 돼서 만족

한 얼굴로 보석상의 유리문을 나서고 있었다.


  “배터리 새로 바꿨어요?”

  “그럼.”
  “얼마 달래요?”
  “5불.”
  “싸네요.”
  “고까짓 쬐꼬만 게 5불이면 싼 것도 아니지.”
  “뭐라고 하셨어요?”
  “배터리 바꿔달라고 했지.”
  “아니, 영어로 뭐라고 하셨어요?”
  “췐지 뉴 배터리. 보면 모르냐?”


손목을 휘두르며 내보인다. 손수건에 쌓여 들어있던 시계가 가녀린 어머니의 팔뚝에 제 자리를 찾았다.

아... 위대한 어머니.


  “어머니, 나도 배터리 새 걸로 바꿔야 할 시계가 하나 있는데 좀 바꿔다 주실래요?”
  “너 같이 싸구려 가짜 시계 같은 건 저런 데서 취급 안 한다.”

  “어머니 꼬물 시계나 내 가짜 시계나 그게 그거예요, 내 가짜 시계도 1분도 안 틀리거덜랑요….”

  “그딴 소리 하지도 말아라…. 이래 봬도 이 시계가 그 당시 대통령, 누구냐... 그 사람 이름이 뒤에 새겨져 있

   는 거야. 유대인의 탈무드에 보면 시계란 시간을 알고 싶을 때 꺼내서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되어 있어. 남에

   게 보이기 위해 번쩍거리는 시계를 차고 다니면 웃음거리가 된다고 했다.”


어머니는 유대인의 탈무드까지 거론하며 소중하게 시계를 들여다보신다.

어머니에게 시계에 대한 어떤 철학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선뜻 의미 있는 시계를 내 준 며느리에 대한 사랑이 이제는 고물이 된 시계에 담겨있을 게다.


  “어머니 옛날에 번쩍이는 시계가 있으셨는데…?”

  “너 줄까?”

  “아이고, 난 그런 것 거추장스러워서 싫어요.”


우리는 후후, 하고 함께 웃는다.

이렇게 좋은 날들이 앞으로 얼마나 있을 것인가….


  “어머니, 이왕 나오셨으니 이르기는 하지만 저녁을 잡숫고 들어가시지요?”

  “아니다. 네 시에 녹내장 약 눈에 넣어야 하기 때문에 그전에 집에 들어가야 한다.”
  “그럼 네 시가 거의 다 되었으니 들어가서 약을 넣고 나오세요, 내가 여기서 기다릴게요.”
  “아니다. 저녁 먹기 전에 침대 시트 빨려고 거둬 놓았는데 오늘 끝내 놓아야 한다.”

  “아이고…, 그러세요. 저도 할 일이 없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렇게 통박을 줘도 끄떡도 안 하시는 어머니.

정해놓은 스케줄을 지키기 위해 아파트 안으로 사라지는 어머니를 눈으로 배웅하며 생각한다. 20세기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태평양 전쟁과 해방, 그리고 맞이한 6.25와 부산 피난 생활, 4.19와 5.16을 차례로 지낸 후 일

찌감치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이민 오시기까지, 그리고 지금 그 연세 구십의 나이에 꿋꿋하게 살아남으셔서 5불짜리 시계 배터리를 바꾸기 위해 보석상을 드나드는... **이 시대에 가장 위대한 어머니**


                                                                                ******


- 양로원


양로원의 어머니는 넓은 유창 너머로 우람한 사철나무숲이 내다보이는 2인 1실의 방에 어머니 마지막 여정의 몸을 의탁하셨다.

자식들이 편해야 어머니가 편하다는 어머니의 결정은 옳았다.

절대로 어머니가 양로원에서 편하게 즐겁게 사셨을 리는 없지만 우리들 마음이 편해진 것은 사실이다. 끼니마다 한국 음식이 제공된다고는 하지만 어디 집밥 맛에 비할 것인가, 스태프들이 친절하게 보살펴 준다한들 이따금 들려서 잔소리나 하고 통박이나 주는 자식들 얼굴 보는 일보다 더 기쁠 것인가….

어머니는 꿈쩍도 안 했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겠니.. 여기서 편히 지내니 감사하지.”


어머니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미국 정부에 감사했다. 나도 입밖에 내지는 않았으나 감사했다.

처음 우리 형제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방문하겠다는 계획은 오래가지 않아 한 번씩으로 바뀌었다. 당시 내게 손자가 태어났는데 손자 보러 가는 길은  즐겁고 경쾌했다. 조금씩 커가면서 부리는 재롱에 함께 까르르, 웃으며 들여다보는 재미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자꾸만 달려가고 싶었는데 정해진 날에 양로원의 어머니를 뵈러 가는 길은 일주일이 왜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가, 생각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여동생과 늘 함께 갔는데 항상 오락실 창문가 정해진 자리에 앉아 유리창 너머로 우리들을 보면 활짝 웃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왜 좀 더 자주 찾아뵙지 못하나 죄송스러워지기도 했다. 

어머니는 연세 90에 앞으로 얼마나 살겠는가, 하며 들어오신 양로원에서 9년 8개월을 사셨다. 끝까지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워커에 의지하여 방과 식당까지의 복도를 걸어 다니셨는데 침상 정리는 군대 훈련병의 정돈된 침상처럼 정결하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리고 지나다 엿보이는 다른 방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흉을 보시기도 했다.


  “어떻게 방구석을 저 모양을 해놓고 사냐?”

  “어머니, 왜 딴 사람 방을 들여다보면서 참견을 하세요?”

  “난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끔 어머니를 모시고 나와 부근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즐기는 것 같았으나 점점 그것조차 귀찮아하셨다. 

그동안 스태프들에게서는 모범생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혈압 정상, 당 수치 정상, 콜레스테롤 수치가 약간 높기는 하나 음식 조심하면 됨(나는 이 대목에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제공되는 식사 가운데는 전혀 콜레스테롤이 높은 음식이라고는 없을 뿐만 아니라 있더라도 반 공기도 안 먹는 식사량에 김치 한 두쪽, 콩나물 무침 두어 젓가락, 고기류에는 손도 안 대고 김 몇 쪽이 전부인 식사인데 어떻게 먹는 걸 조심하라는 것인가) 나무랄 데 없이 건강한 건강 기록을 가지고 계셨다.

그동안 치아가 다 빠져서 틀니를 해 넣느라고 고생을 하셨는데 음식을 잘 씹어 잡수시라고 한 틀니를 식사 때는 오히려 불편하다고 꼭 빼놓고 식사를 하셨다. 그 틀니도 언제인가 식사 후 다시 끼는 것을 잊어버려 아마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버린 듯했다.

나는 속이 상해 틀니란 것은 평소에는 빼놓더라도 식사 때는 잘 씹어 잡수시라고 끼어야 할 틀니를 왜 빼놓고 잡수시다가 잃어버렸냐, 몇 천불을 날렸다, 고 타박을 해댔지만 어머니는 별 상관을 안 하시는 것 같았다. 

하기야 제공되는  음식이 꼭꼭 씹어먹어야 할 만큼 딱딱하고 질긴 음식은 아니었을 테니 대강 잇몸으로 우물거리다가 삼키면 될 일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9년째에 들어와서는 잇몸으로 끼니를 이어갔는데 식사량이 하루에 빵 반 조각과 김칫국물 두어 스푼에 곁들여 밥 한 두 숟가락이 고작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잡수시면서도 살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따금 서랍을 열어보면 일회용 설탕 봉지나 안 뜯은 티슈 박스와 물컵 등이 가득 들어있어서 꺼내 사무실에 가져다주기도 하고 내가 챙겨 넣기도 했다. 어머니는 모아 두었던 소장품들이 없어진 것에는 신경을 안 쓰시는지 모르시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직원들의 말로는 그것이 노인성 습성이라고 했다. 많은 노인들이 그렇다고 했다.


어머니의 양로원 생활은 오락실이기도 하고 식당이기도 한 넓은 유리창에 앞뜰이 내려다 보이는 장소에서 하루의 아침 식사와 함께 시작됐고 저녁 식사를 끝내고 침실로 돌아가 주무시는 날들로 변함없는 일상의 계속이었다.


  “창밖의 꽃들 좀 봐라. 어쩜 그렇게 제 철을 맞아 찾아오는지….”


넓은 유리창 밖으로는 철마다 흐드러지게 피는 꽃들과 시들어 땅에 지분하게 덮인 것이 보이는 드넓은 정원이 내려다 보였다.

혈압 재고 약 먹는 일은 매일 정확한 시간에 이어졌고 틈틈이 오락시간이 있어 담당자가 모여 앉은 어른들 앞에 서서 재롱을 피우기도 했다. 아무리 재롱을 피워도 깔깔거리며 경쾌하게 웃는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거의가 무표정에 그냥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가끔 위문 공연단이 찾아와 연주도 하고 연극도 해 보였으나 반짝이는 눈으로 관심을 갖고 보는 어른도 하나도 없었다. 싫은지 좋은 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무표정으로 바라보고 있거나 잠을 자고 있거나 밖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일요일에는 교회에서 목사님이 교인들과 같이 와서 앞자리에 어른들을 마주 보고 의자에 앉아 경건하게 예배를 드렸다. 어머니는 우리가 방문할 때도 예배 시간이 되면 그만 가라고 우리를 쫓으셨다.


  “어머니, 목사님 설교가 좋으신가 봐요.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시는 걸 보면.”

  “난 무슨 설교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알아들을 수도 없는 예배는 왜 빠지지 않고 참석하세요?”

  “주일은 예배를 드려야 하니까 그냥 앉아만 있는 거야.”


어머니는 엄숙하게 선언하셨다.

나는 앉아만 있는 예배를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같이 그냥 앉아만 있는 분들이라도 준수한 편에 들었다. 안 들리는 귀로 그나마 주일을 지키려는 마음가짐을 하나님은 기쁘게 생각하셨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앞자리에 앉아있는 예배자를 바라보는 분들도 있었지만 구경삼아 보는 듯했고 대개 다 내쳐 잠만 주무시고 계셨는데 목사님이나 예배 인도자들도 개의치 않는 둣했다.


양로원에는 누가 정해 주지도 않았는데 30여 명의 노인들은 늘 같은 자리에 앉았다.

새로 입주하신 분이 멋모르고 비어있는 자리에 앉으면 주인도 아닌 터에 주인이 나타나 야단을 맞고 뒤쪽 후미진 자리로 쫓겨났다.

때로는 새로 입주하신 분들로 사무실 앞이 시끄러워질 때도 있었다.


  “내가 종로에서 30년 간 병원을 경영한 유명한 의사야. 나를 뭘로 보고 너희들이 건방지게 이래라저래

   라냐?”

  “이래 봬도 우리 아들이 한국에서 국회의원 했던 사람이야.”

  “우리 동생이 무슨 무슨 장관을 한 누구누구인데 까불지 마라.”


아무리 그래도 힘없는 양로원 입주자일 뿐이다.

대개 젊었을 때의 화려한 이력이나 집안의 자랑인 자식으로 콧대가 높았을 분들이 나이가 들어 서글픈 황혼길

의 몸부림은 거의가 친절이 몸에 배지 않은 무뚝뚝한 도우미를 향해 분출됐다. 그러나 입주하며 시간이 흐른

후에는 그 기개마저 노쇠해지는 듯했다. 자리는 보이게, 보이지 않게, 주인들이 바뀌어져 갔다.


                                                                                    ******


-어머니의 마지막 7일


4월이면 100세가 되시던 해 1월, 저녁을 먹는데 양로원에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넘어져서 꼼짝을 못 하고 누워 계시는데 엉덩이뼈를 다치신 듯하여 홀리네임 병원으로 모시고 간다

고 했다.

내가 먼저 병원으로 가서 기다리니 어머니가 앰뷸런스에 실려왔다.

이동 침대에 실려 들어오는 어머니는 꼭 아이 같이 작은 형상으로 시트에 덮여있었다. 시트를 살짝 열어 보니

어머니가 나를 보고 반가운 듯 웃으셨다.
 

  “저녁 시간인데 밥은 먹었니?”


엉덩이 뼈가 부서져서 앰뷸런스에 실려오면서도 딸에게 밥은 먹고 왔느냐고 묻는 어머니... 


  “먹었어요. 이 시간까지 안 먹었을라고, 그런데 어떻게 넘어졌어요?”

  “안 넘어졌어. 온종일 오락실에서 지내고 오후에 침대에서 좀 쉬고 저녁 시간에 맞춰 일어나려고 하는데 삐

   꺽, 하고 아파서 못 일어나겠더라고.”


오피스에서 내게 한 설명으로는 꼭 제시간에 나오는 어머니가 안 나오셔서 방으로 가보니 침대에 누워 움직이지를 못하고 계셨단다.

보조사가 부축해서 일으켜드리려고 하니 아파서 꼼짝 못 하시겠다고 하여 파악하건대 아마 넘어져서 뼈에 이

상이 생기신 것 같다고 했다.

입원하여 검사를 하고 사진을 찍은 결과는 골반 엉덩이뼈가 부서져서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넘어지지도 않았고, 어디 심하게 부딪힌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물었더니 의사는 그냥 고개만 

살랑살랑 흔들었다.

후에 다른 의사하고 상담하니 연세로 보아 악화된 골다공증으로 뼛 속이 텅 비어서 오래된 시멘트 건물이 부서져 내리듯 몸을 받쳐주던 골반뼈가 부서져 내린 것 같다고 했다.

꽤 오래전, 팔십 세쯤 되어서인가, 어머니는 골다공증 진단을 받았었다.


  “너희들 낳았을 때 뼈가 튼튼해야 한다고 그 당시 딴 사람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칼슘을 네 아버지가 미국 사

   람한테 부탁해서 몇 병을 가져다 먹어서 나는 뼈가 튼튼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말아라.”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의사가 다른 처방을 해주는 것도 없었기에 그냥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 칼슘도 100세까지 유지시키에는 힘에 부쳤을까?


  “어머니 연세에 수술을 해도 괜찮을까요? 수술을 안 하면 어떻게 될까요?”

  “쇠 철심을 박는 수술을 안 하면 앞으로 사시는 동안 꼼짝 못 하고 누워만 계셔야 하고 또 굉장히 고통스럽지

   요. 연세가 많으시더라도 앞으로 얼마나 사실지 모르는데 어떻게 고통스럽게 진통제만 맞으며 누워 있겠어

   요?”


다음날 아침, 어머니는 전신마취를 하고 골반에 쇠심을 박는 큰 수술을 받았다.

수술 다음날 오전, 병실에 가 보니 수술 전 고통스러워하시던 모습이 사라져 아주 평온해 보였다. 거의 쌩쌩

해 보이기까지 했다.

눈을 뜬 어머니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가 먼데 여기까지 어떻게 왔니?” 

  “왜요? 여기가 어딘데요?”


병실을 자꾸 둘러보시는 어머니는 병원에 와서 수술을 받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시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식

사 시간에 맞춰 식당에 가야 한다며 벽시계가 왜 안 보이는가고 물었다.


  “어머니, 여긴 양로원이 아니고 병원이에요. 어제 수술하신 거 기억 안 나세요?”


어머니는 혼란스러운 시선을 내게 보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술 다음날부터 어머니는 걷는 연습을 힘차게 시작했다. 전신마취 후유증으로 왔었던 혼란은 깨끗이 사라져 

명료한 정신은 돌아왔는데, 보니까 병원에서 제공되는 식사는 물론 내가 준비해 간 음식이 그냥 그대로 탁자

위에 있었다.

부드러운 오트밀을 떠서 드시라고 하니 입을 조금 여시는데 수저가 들어갈 틈이 없다. 그리고 “먹기 싫어”하며 고개를 돌리셨다. 요구르트를 한 스푼 떠서 입에 억지로 넣어드리니 애써서 삼키시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수술 후 퇴원하여 다시 양로원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닷새 동안 두 스푼 정도의 요구르트를 넘기신 게 식사의 전부였다.


  “어머니, 좀 잡수세요, 안 잡수시면 그 큰 수술하고 나서 굶어 돌아가세요.”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셨지만 떠먹여 드리는 음식이 담긴 수저를 위해 입을 열지는 않으셨다.

월요일에 병원에 들어오셔서 화요일에 수술을 받고 금요일에 양로원으로 다시 퇴원해 가신 어머니는 다음 날 

토요일 아침 워커에 의지해 정확한 시간에 식당에 나오셨으나 음식은 입에 대지 않으셨다. 일요일은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주무시는 듯했지만 정신은 맑고 깨끗했다. 월요일, 작은 아들이 한국에서 날아왔다.


  “어머니, 저 왔어요. 저 알아보시겠어요?” 


미동이 없던 어머니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왜 내 아들을 못 알아보냐?” 하시는 듯 픽 웃으며 고개를 끄

덕이셨다.

어머니는 그 후 깊은 잠에 드셨는데 이따금 고통스러운지 얼굴을 찡그리기도 하고 무엇을 잡으려는 듯 손을 내젓기도 했다.

그동안 어머니를 돌봐오던 닥터 송이 나를 찾았다.


  “상태가 아주 안 좋으시네요, 고통이 있으실지도 모르는데 편안하시게 하는 약을 좀 드릴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사가 들어간 후 편히 주무시는 걸 보고 우리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참 이상했다.

분명히 마지막을 향해 가는 길임을 알 수밖에 없는 상태인데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다는 현실감이 없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우리는 그냥 이 땅에 남아 있는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 같았다. 다음날 아침 우

리 자식들이 “밤새 평안하셨나요” 인사차 양로원에 도착하여 주차하는 시간에 어머니는 홀로 눈을 감으셨다.

새벽에 어머니의 맥박이 점점 느려진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가 주차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전화가 울렸다.


  “여기 그레이스 양로원인데요, 최숙자 어머님 따님 되시지요? 어머님께서 방금 운명하셨습니다.”


참 낯선 연락이었다. 어머니가 어떻게 운명을 하신단 말인가….

마지막 길이 편안하시라고 안정제까지 드린 터에 돌아가셨다는 게 왜 실감이 나지 않는지…. 나는 후에도 자꾸만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했다.

어머니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으나 낯설어 보였다.


  “어머니, 제가 조금 늦어서 가시는 길 배웅을 못했네요.”

  “괜찮다. 어차피 혼자 가는 길 배웅이 뭐 필요하냐” 하셨을 거다.


어머니와 가장 가까운 시간을 보냈던 침대 옆 벽시계는 변함없이 아침 식사시간을 알리고 있었고 어머니는 더 이상 식사시간에 맞춰 갈 수가 없게 되셨다. 


한 겨울인데도 창밖의 소나무는 청청한 푸른 잎을 달고 있었고 간간한 흰 눈발은 뿌리는 듯 스치다가 곧 바람 속에 섞여 사라져 갔는데 마치 어머니의 영혼의 조각들이 그들과 함께 섞여 떠나가는 듯했다.

그렇게 어머니는 100년의 세월을 꼭 3개월 앞두고 서둘러 저 세상으로 옮겨 가셨다. 

나는 오래전 젊어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100세가 된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재회를 하셨을까 잠깐 생각해 보았다. 내 신앙심과는 별개라고 스스로 다짐하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내게 아무 위안도 되지 못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나를 받쳐주던 빽이 사라졌다는 자각이었다.

거의 마지막 며칠 전까지 하나님께 자식들의 안위를 빌던 그 커다란 빽. 

그 상실감은 어머니가 저 세상으로 영원히 떠나가셨다는 현실감과 함께 나를 외롭게 했다.

마치 내가 강가에 혼자 놓여진 어린아이 같기도 한 것처럼….

어머니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으나 가져가신 것도 없는 듯했는데 그 자리에는 100년의 세월이 우리들과 함께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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