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혜영 Oct 27. 2021

뇌물

내 이야기

    뇌물이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지만, 요즘은 뇌물죄로 연루되어 대통령도 감옥에 가는 세상이라 그 단어가 갖는 위세와 죄악의 첨례함은 천하가 떨만하다. 뇌물은 주어도 안 되고 받아서도 안 되는 행동일 것이다. 나야 평생 뇌물을 받을 일도 줄 일도 없는 세상을 살지만 오래전 담배 한 갑 또는 짜장면 한 그릇의 뇌물(?)을 주고 순조롭게(아니면 조금 빠르게) 일 처리가 진행된 적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나 자신 그것을 뇌물로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런데 뇌물과 연관된 일련의 에피소드로 나는 범죄에 연루되었던 적이 있다. 


오래전, 선생님은 학부모가 내미는 봉투를 받아 잠깐 봉투에 적힌 이름을 훑어보고 서랍을 열어 던져 넣었다.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는 했지만, 습관적인 인사일 것이었다. 서랍 안은 항상 봉투가 그득했다. 때로는 조그만 박스에 가죽 장갑도 있었고 넥타이도 있었다. 내가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다닐 그 당시 그런 물건들은 아주 귀했고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내가 왜 어린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을 '먹을거리를 노리는 독수리 눈'처럼 예리하게 관찰하였는지 그것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반세기 이상의 세월에도 선명하게 기억이라는 머릿속 상자에 남아 잊히지 않는 그 교실의 정경은 유명 화가의 명화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다. 수업 시간에 앞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와 거침없이 선생님께 봉투를 주고 가는 순영이 엄마는 매일 등교하는 아이들만큼이나 학교 출석이 정확했다. 그리고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봉투를 뜯어 돈을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안에는 명단과 함께 돈이 그득히 들어 있는 것은 나같이 눈치가 없는 아이들조차도 뻔히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노골적으로 예뻐하고 칭찬하는 것은 그 돈의 액수와 비례한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고,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나도 내 어머니가 봉투에 돈을 넣는 것을 보았고, 그 봉투가 순영이 엄마에게 전달되고, 그 봉투가 선생님의 서랍에 차곡히 쌓이는 데 함께 한다는 것에 아무 이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마 어머니의 봉투가 딴 아이들보다 얇았던지 선생이 나를 특별히 이뻐해 준다거나 중요한 심부름을 시키는 행복한 순간은 결코 오지 않았다.


순영이 엄마는 매일 반 아이들 부모를 만나 돈 걷는 일을 일과로 삼는 듯했다. 그때는 사친 회비라 하며 순영이 엄마는 사친 회장이었으며 돈을 걷어 선생에게 갖다주는 일을 맡았다. 그날 엄마는 순영이 엄마에게 전해주라며 내게 그 봉투를 건네주었다. 그날 하필이면 순영이 엄마가 출석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교 때까지 그 봉투가 내 가방 안에 있었던 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노점상에서 노란 튀김옷을 입고 갓 기름에 튀겨내 진 오징어의 고소한 냄새는 내 양심 따위와 견줄 것이 못 되었다. 한순간 주저했을지는 모르지만, 봉투 속의 현찰을 꺼내든 것과 동시에 이미 오징어 튀김은 초간장과 함께 내 입속에 들어와 있었다.

봉투 안에서 몇 장 꺼내도 큰 차이는 안 날 것이고 또 어른들이 모를 수도 있는 것이고 깜쪽같이 속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의 머릿속으로 그 정도의 계산은 했었을 것이다.


다음날 순영이 엄마를 학교에서 봤을 때는 어느 정도 겁이 나 모자란 돈을 채워서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교하는 길에는 너무나 아이들을 유혹하는 상점들이 많았다. 제법 도톰했던 봉투는 매일 조금씩 얇아져갔고 그 얇아진 만큼씩 나는 뻔뻔스러워졌고 어른들을 속일 수 있다는 자부심까지도 생겼다. 꺼내 쓴 돈을 채워 넣어야 한다는 현실 파악은 있었으나 그것도 잠시, 채워 넣을 길도 재간도 없다 보니 한동안 쇼핑하는 재미가 어린아이의 양심을 덮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역시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옛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서로 연락이 있었던지 엄마와 순영이 엄마가 함께 학교에 나타나 나를 불러내는 순간 내 범죄는 들통이 났고 '내가 순영이 엄마 드리라고 준 봉투는 어쨌니?' 하는 엄마의 다그침과 빨리 그 봉투를 내놓으라며 노려보는 순영이 엄마의 눈빛에 나는 자지러지고 말았다. 그 순간의 감정은 공포였다.


그날 밤 엄마의 귀가를 기다리며 오들오들 떨던 기억은 얼마나 장렬했던지 분명히 회초리로 매를 맞았을 법한 상황이었음에도 그 기억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탄로 난 범죄를 숨기느라고 얼떨결에 봉투를 잃어버렸다고 거짓 실토했던 것도, 미련하게 얄팍해진 돈 봉투가 가방에서 나오는 통에 들통났다. 그때의 당혹감은 평생에 남았다. 엄마는 그 후 내가 탕진해버린 돈을 채워서 봉투에 넣어 직접 순영이 엄마에게 주었고 더 이상 나를 믿을 수 없었던지 내게 봉투를 맡기지 않으셨다. 그 후 순영이 엄마가 선생님께 고해바쳐서 나는 선생님께 범죄인 취급을 받았다.


  “그건 범죄 행위야.”


선생님이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일갈했다. 선생님의 노려보는 눈은 무섭지 않았지만, 엄마에게 신뢰감을 잃었다는 상실감 같은 죄스러움과 무섭던 기억은 맛있던 오징어 튀김과 함께 아프게 남았다. 뇌물을 준 사람, 받은 사람, 가로챈 사람. 법적으로 따져본다면 누가 가장 중한 범죄자인지 나는 모른다. 단지 그 일로 인해 어린아이의 가슴에 박힌 평생에 잊지 못할 공포의 크기는 중범죄인의 수위라고 해도 될 것이다. 


나는 지금도 뇌물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 가로챈 행위는 결코 용서받지 못 할 짓이라고는 하지만 혼자만 범죄인 취급을 받은 것은 어쩐지 억울해지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100년의 어머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