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탐방
약사암(藥師庵)에 올라왔다. 아내와 함께 왔다. 3월의 봄 햇살을 받으며 왔다. 그런데 숨이 차다. 여기까지 오르는 동안 세 차례나 쉬었다. 운동을 게을리한 탓이다.
약사암은 광주광역시가 지정한 문화재자료 제2호로 동구 운림동에 있다.
약사암의 850년경 철감선사 도윤(澈鑑禪師 道允)이 처음 지은 절이다. 그 역사가 무려 1200년 가까이 된다.
처음에는 인왕사(人王寺)라 불렀는데, 1094년(고려 선종 11년)에 혜조국사(慧照國師)가 다시 짓고 1360년(고려 공민왕 9년)에 세 번째 지을 때 절의 이름을 약사암(藥師庵)으로 고쳐 불렀다.
1856년(철종 7년), 관찰사(觀察使) 주석면(朱錫免)의 협조로 성암, 학산 두 스님이 다시 지었는데 이는 한국전쟁 때 모두 불에 타버렸다.
대웅전(大雄殿)과 요사(寮舍) 5동 그리고 일주문(一柱門) 등은 1974년에 보수를 시작했으며, 1984년에야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상은 안내판의 내용을 편집한 것이다. 약사암의 석조여래좌상과 삼층석탑은 여러 번 보았다. 그런데 그것이 문화재라고 하니 다시 보고 싶어 진다. 급하게 올라갔다.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무 관세음보살’ 하며 불경 외는 소리도 스피커를 통해 들린다. 유리창을 통해 들여다보았더니 스님 두 분이 나란히 앉아 불경을 외고 있다. 이상하게도 불상을 바로 보지 않고, 왼쪽으로 90° 돌아앉아 있다.
스님들의 불경 외는 시간은 참으로 길다. 화순 운주사에 갔을 때 2시간이 넘게 외웠다. 절을 떠날 때까지 외는 소리가 들렸다. 합천 해인사에서는 스님 두 분 이 나란히 서서 불경을 외웠다. 사찰에서 말하는 수행이란 불경 외는 그 자체를 말하는 듯하다.
보물 제600호 석조여래좌상의 사진을 찍고 싶다. 사람들은 대부분 마당 가운데 서 있는 삼층석탑보다 대웅전 안에 있는 석조여래좌상을 더 귀하게 여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불경을 외고 있는 대웅전의 문을 열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다. 하는 수 없이 삼층석탑만 찍었다. 지금 나에게는 삼층석탑이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줄곧 광주에서 살아왔다.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은 1971년 이후 2008년 정년으로 퇴직할 때까지 전라남도에서 근무했었고, 그 이후 또 광주에서 살고 있다. 그 인연의 기간이 무려 70년이다.
광주에서 오래 살았다 하여 이런 것까지 다 아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무슨 일이건 관심을 두지 않으면, 소리가 있어도 들리지 않고 사물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관심을 두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에 따라 삶의 기치가 결정된다.
갑자기 약사암을 지켜온 분들에게 감사함이 느껴진다. 백제 시대, 인왕사를 지은 철감선사 도윤(澈鑑禪師 道允), 고려 시대의 혜조국사(慧照國師)와 사찰의 이름을 약사암으로 바꾼 분, 조선 시대 사찰의 개축에 도움을 준 관찰사(觀察使) 주석면(朱錫免), 그리고 성암 스님과 학산 스님 등에게 감사한다. 한국전쟁 당시 불에 타버린 약사암, 그 불운의 역사까지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천 이백 년 동안 약사암을 지켜온 분들에게 감사한다.
나는 요즘 무등산에 오면 약사암까지만 오른다. 토끼등이나 중머리재까지도 올라갔었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버거움으로 다가왔다.
오늘 또 약사암에 올라왔다. 발걸음을 멈추고,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고, 녹음 짙은 그늘에서 땀도 식힌 그것을 감사한다. 아울러 약사암의 장구한 역사, 거기 간직한 문화재 등을 새롭게 인식한 것도 감사하고, 수수한 모습의 시골 처녀 같은 삼층석탑을 보고, 나름대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며 수필 한 편 만들어낸 것 또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