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육상에서는 세 번의 전투가 연이어 벌어졌다. 8월 13일에 시작되어 14일에 끝난 웅치 전투, 14일에 시작된 이치 전투, 15일에 시작되어 16일에 끝난 제1차 금산 전투 등이 그것이다. 이들 전투에서 조선 육군은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한편 해상에서는 승리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당시 해전의 상황이 어떠했을까? 그것을 더듬어보려 하니 가슴이 뛴다.
8월 14일(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왜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은 교과서에서 배웠다. 임진왜란 중 조선 해군의 3차 출정이며, 안골포 해전도 포함된다.
한산대첩은, 섬사람 김천손(金千孫)이 ‘왜선 70여 척이 견내량에 정박 중’이라는 정보를 전해 준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순신은 정보 제공자에 대하여 의심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랬기 때문에 유익한 첩보가 속속 들어왔을 것이다.
견내량은 통영과 거제도 사이의 좁은 해협이다. 그래서 유인 작전을 펼쳤다. 조선 수군의 판옥선(板屋船) 다섯 척이 다가갔다. 왜군은 돛을 올리고 총을 쏘며 공격해 왔다. 조선 수군은 뱃머리를 돌려 슬금슬금 퇴각했다. 좁은 해협을 지나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나왔다. 왜군 함선도 끌려오듯 뒤따라 왔다.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은 뱃머리를 돌렸다. 호각을 불면서 학익진(鶴翼陣)을 펼쳤다. 학이 날개를 펴듯 적의 전선을 에워쌌다.
이순신(李舜臣)의 유인 작전에 말려든 왜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격멸되었다. 왜군 함선 60여 척이 부서지거나 불에 탔고, 후방에 있던 10여 척만 김해 쪽으로 달아났다. 이순신은 선조에게 올린 장계를 통해 작전의 이유를 밝혔다.
“견내량은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이 서로 충돌하여 전투하기가 힘들고, 왜병은 형세가 불리해지면 육지로 도망가기 때문에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했다.”
이순신은 도망가는 적선을 추격하지 않았다. 종일 접전으로 노곤했을 장졸들을 배려한 것이다. 부하를 사랑하는 이순신의 따뜻한 마음이 가슴을 울린다.
8월 16일(7월 10일) 경남 창원(진해)의 안골포에서 일본의 구키 요시다카와 가토 요시아키가 이끄는 수군 함대 42척을 격퇴했다. 이 해전을 안골포 해전(安骨浦海戰)이라고 한다. 한산대첩에 비해 상대한 함선의 수효는 적으나, 이 함대를 이끄는 장수는 일본에서 제일가는 명장이다. 이런 자를 상대하려면 계획을 면밀하게 세워야 하고, 전투에 치밀하게 임해야 한다.
(음 7월 9일), ‘안골포에 왜선 40여 척이 있다’라는 탐망군의 보고가 들어왔다. 가덕으로 향하던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과 토멸 즉 ‘쳐서 없애 버릴’ 계획을 상의했다. 이게 안골포 해전(安骨浦海戰)의 시작이다.
이순신은 작전을 계획할 때,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하 장수들의 지혜를 모으고 전투 의지를 다지게 했다. 이순신의 장점이다.
(음 7월 10일) 새벽, 전라우수사 이억기 함대를 안골포 바깥 바다의 가덕 변두리에 복병으로 남겨두고, 이순신 함대는 학익진을 벌리며 전진했다.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그 뒤를 따른다. 원균은 1540년생으로 1545년생인 이순신보다 5년 상이다. 그런데 이순신의 지시를 받는 것이 마음으로 불편했는지 모른다.
안골포는 좁고 수심이 얕다. 작전을 펼치기에 적당하지 않다. 그래서 유인 작전을 시도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순신 함대는 학익진을 장사진(長蛇陣)으로 변경했다. 장사진(長蛇陣)은 ‘긴 뱀과 같이 한 줄로 늘어선 군대의 진’이다. 조선 수군은 조총에도 뚫리지 않는 거북선을 앞세우고 나아간다. 그 뒤로 판옥선이 따르며 공격한다. 이 작전의 특징은 장수의 명령이 말단 병졸에게까지 신속하게 전달되고 그것이 재빠르게 시행되는 것이다. 이 작전으로 일본 수군은 육지로 도주했다. 이를 바라본 이순신은 1리쯤 물러나 밤을 지냈다. 당시 안골포 백성들이 산속에 숨어있었는데, 쫓기는 일본 수군들이 안골포 백성들에게 분풀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백성을 사랑하는 이순신, 그의 마음이 뜨겁게 전해진다.
다음날 거기로 갔다. 일본 수군은 없고, 전투 현장에 전사자를 불태운 흔적이 여기저기 열두 곳이나 남아 있다.
학자들은 ‘이날의 전투 결과는 명확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왜선이 20척 이상 분멸되었고, 적의 인명 피해도 9,000여 명에 육박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번에 물리친 수군은 일본을 대표하는 정예 수군으로 한반도의 침략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린 것이다.’ ‘거제도 서쪽의 해상 제해권도 장악했다.’ 승전의 의미를 이렇게 부여했다.
한산대첩과 안골포 해전에서 승리한 조선 수군의 함성이 바다 멀리 퍼진다. 그 함성과 함께 이순신의 인간미도 전해온다.
‘적을 섬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사람의 군사라도 잃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피해를 보게 해서는 안 된다.’
이순신은 군사를 아끼는 지도자였고, 백성을 사랑하는 지도자였다. 우리에게는 이순신처럼 따뜻한 마음을 지닌 지도자가 필요하다. 이런 자가 지도자로 선출되도록 유권자로서의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