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임진왜란 중 의병장 조헌과 승병장 영규대사는 단짝이었다. 청주성을 탈환하고, 제2차 금산 전투에 참전하여 장렬하게 전사한 단짝이었다. 그러나 두 분에게서 특별한 사연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영규대사에 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 개혁주의자 조헌의 삶을 풀어본다.
영규(靈圭)는 충남 공주 출신이다. 계룡산 갑사에 출가하여 서산대사의 고제로 공주 청련암에서 수도하였고 선장으로 무예를 익혔다. 1592년 9월 23일(음 8월 18일), 전사하여 금산의 칠백의총에 묻혔는데, 그의 향년 나이는 알 수 없다.
사후 영규대사는 법도, 대인에 의해 진락산에 영각이 세워졌으며 ‘의선’이란 편액이 하사되었다. 편액(扁額)이란 종이·비단 또는 널빤지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방 안이나 문 위에 걸어 놓는 액자를 말한다. 대부분 왕이 내린다.
조헌(趙憲)은 1544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다. 22세인 1565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24세인 1567년(명종 22년)에는 문과에 급제했다.
조헌은 개혁주의자였다.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한 듯하다. 1572년(선조 5년) 홍문관 정자(正字)로 왕의 불공이 옳지 않음을 말하다가 파면되었다. 1574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곳의 문물과 제도 중 따를 만한 것을 조목별로 적은 책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조헌을 그 책을 통해 명나라 신분제의 실상을 일리면서 출신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명나라의 제도를 본받을 것을 제안한다. 공·사 노비를 양민화해 징병자원을 증대시키면 20년 뒤에 100만의 정예 병사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연산군 때의 공안(貢案)이 아직도 민폐가 되므로 개혁할 것을 청하여 소를 올렸다. ‘공안’은 공물(貢物)의 품목·수량을 적던 장부이지만 여기서는 그 일을 맡은 사람을 가리킨다.
경기도 통진(通津) 현감으로 다스리던 중 법을 어긴 궁노비를 장살(杖殺) 한 일이 있었다. ‘궁노비’는 궁중에 속한 노비를 말한다. 그 일로 조헌은 귀양을 갔다. 1582년에는 보은 현감으로 소를 올려 노산군(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할 것을 청했다. 이 일로 인하여 조헌은 모함을 받아 파면되었다.
조헌의 개혁은 실패했다. 자기가 하지 않고 왕을 비롯하여 높은 벼슬에 있는 대신들에게 강조했다. 그 결과 파면되거나 귀양을 가는 등 저들의 반발을 샀다.
조헌과는 달리 개혁에 성공한 자가 있다. 진주대첩의 영웅 김시민이다. 그가 주장한 개혁은 군대 개혁이다. 여진족을 토벌한 그는 군대 개혁에 관한 의견을 병조에 제출했다. 그러나 ‘평화의 시대’라 하며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쓸데없는 짓이라는 핀잔만 받았다. 나중에 진주 목사가 되었을 때 김시민은 평소 생각했던 군대 개혁을 실천했다. 그리하여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김시민이 군대 개혁에 성공한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진주 목사로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의 권한을 행사한 것이다. 진주성의 구성원 곧 관군, 의병, 주민 등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솔선수범하여 실천한 결과이다.
초등학교 교장으로서 나도 교육 개혁을 실천했었다. 그것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교장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 ○○초등학교’ 이런 구호를 내걸었다. 그것은 학교를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 개혁의 목표를 설득하기 위해 추진한 시책은 5분 훈화였다. 매주 월요일 애국주회 시간을 이용하여 아이들과 교직원에게 구호의 의미를 역설했었다.
목표 달성을 위해 추진한 교육 활동은 ‘칭찬하기’와 ‘발표의 기회 제공’이다. 당시에는 월 두 차례 노는 토요일이 있었다. 그런 날에는 자율학습 과제를 제시했다. 아이들은 글짓기나 그림 그리기 중 하나를 선택하여 자율적으로 실천하고 그 결과물을 제출하는 과제이다. 과제물은 교장이 직접 심사했다. 금상 은상 동상 장려상으로 구분하여 되도록 많은 학생을 표창하고, 그 작품은 복도에 전시했다.
‘발표의 기회 제공’은 아이들과 교직원, 학부모가 함께 있는 공개된 장소에서 노래 율동 등 재능을 발표하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매주 월요일에는 학급별로 동요를 발표하였고, 야외 행사가 있을 때는 작은 모임을 만들어 발표하게 기회를 제공했다. 그 결과 학예발표회의 종목이 풍성해졌다. 마지막으로 진행한 160명 전체 학생의 합창은 학부모의 탄성을 자아냈다. 발표한 곡목은 동요 ‘우리가 있잖아요.’였는데, 그 순서가 끝났을 때 아이들은 ‘아빠~’라고 외치며 자기 부모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 품에 안겼다. 정말이지 눈물 나는 장면이었다.
내가 실천한 교육 개혁은 학교를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상 발들 자에게 상을 주고, 벌 받을 자에게 벌을 주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 해당 업무를 교사들에게 미루지 않고 교장이 솔선수범하여 실천했다. 아이들의 행동을 면밀히 관찰하여 아낌없이 칭찬하고, 틈나는 대로 발표의 기회를 제공하는 등 두 가지의 교육 시책을 꾸준히 추진했다. 그 결과는 1년 5개월이 지났을 때 ‘공과금 100% 완납’이라는 놀라운 성과로 나타났다.
어떤 분야의 개혁이건 성공 비결은 내가 추진한 교육 개혁과 일맥상통한다. 모든 구성원이 공감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구체적인 시책을 선정하여 꾸준히 추진하면 성과는 나타난다. 이것이 개혁의 성공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