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중에서 가장 치욕적인 전투를 꼽으라고 하면 나는 용인 전투를 꼽는다.
용인 전투(龍仁戰鬪)는 1592년 7월 13일(음력 6월 5일) 경기도 용인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전라 감사 이광은 전라도와 충청도, 경상도의 군사를 모아 한양을 탈환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여 선조에게 보고했다. 이에 따라 (음 5월 19일) 이광은 휘하의 병력을 데리고 한양으로 출발했다. ‘삼도 근왕군’이라는 근사한 이름도 붙였다.
6월 3일, 수원에 도착했을 때, 삼도 근왕군은 전라도 관군 약 4만 명, 충청도 관군 약 8,000~9,000명, 경상도 관군 약 100명으로 구성되었다. 전라 감사 이광, 경상 감사 김수, 충청 감사 윤선각, 전라도 방어사 곽영, 광주 목사 권율, 동복 현감 황진 등이 군을 이끌었으며, 여진족을 격퇴한 이지시, 백광언도 참여했었다.
그런데 전라 감사 이광이 이끈 조선군 8만 명이 그 1/50에 불과한 일본군 1,600명에게 패했다. 그래서 치욕의 전투하고 한다
용인 전투의 참패 원인은 무엇일까?
어떤 학자는 최소한의 전쟁 준비도 없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중앙 정부의 명을 받아 지방의 관료들이 전쟁 준비를 하고자 해도 일반 민중들의 저항에 부닥쳤다고 한다. 병력을 훈련하기 위해 징집하면 반발하고, 성곽을 수리하고자 하면 ‘부역을 과다하게 시킨다.’고 상소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인지라 전쟁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하며 그 책임을 일반 백성에게 돌리고 있다. 일정 부분 그런 점도 있다.
또 다른 학자는 ‘삼도 근왕군은 겉만 화려했다.’고 하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것은 용인전투의 패인이 백성보다는 지휘관들에게 있음을 말해준다.
첫째는 지휘 체계가 일원화되지 않은 점이다. 군 총사령관은 하나이어야 한다. 그런데 전라도 군만 해도 이광과 곽영으로 이원화되어 있었고, 직책상 이광보다 위에 있었던 김수는 휘하 병력이 단 100명에 불과했다.
그들이 수원의 독산산성에서 진을 쳤을 때, 왜군 1,000여 명이 용인쪽으로 이동해왔다. 이 첩보를 접한 근왕군 내부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광주 목사 권율은 ‘한양 탈환을 앞둔 상황에서 작은 규모의 적과 교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했다. 반면 이광은 ‘눈앞에 적을 두고 그냥 갈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무장 백광언과 이지시도 그랬다.
지휘체계가 일원화되지 않으니 마치 배가 산으로 가는 격이다.
둘째는 군의 지휘관을 무관이 아닌 문관으로 세운 점이다. 문관은 전투를 수행함에 있어서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무관들은 이들을 겁쟁이라고 업신여겼다.
이광이 군사 8,000명을 이끌고 한양을 향해 올라가던 중 한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때 이광은 후퇴하려 했다. 그러자 조방장 백광언이 반발했다. 칼을 꺼내 들고 ‘그 자리에서 죽거나 다시 진격할 것을 결정하라.’고 강하게 위협했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이광은 나중에 명령을 어겼다는 핑계로 곤장을 쳤다. 백광언은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 문관들의 이런 견제로 무관들은 전투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
셋째는 병사 중 전투를 수행할 수 없는 피난민이 많았던 점이다. 그것은 병사의 수만 늘었을 뿐 군율이 서지 아니하였고, 기강도 잡히지 않았다는 의미다.
사관의 기개사초에 이런 기록이 있다. 사초(史草)는 조선 때, 사관(史官)이 기록해 둔 사기(史記)의 초고로 실록의 원고이다. 그런데 기개사초는 무엇일까?
“삼도 근왕군이 행군하는데 길이가 40-50리에 걸쳤고, 양 떼를 몰 듯 했다.”
내가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던 1970년대에는 학급당 학생이 평균 60명이었다. 소풍 가는 날이면 둘씩 짝지어 행진한다. 노래를 부르며 가는데도 중간에 흩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통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른다. 하물며 훈련도 안 된 자들이 걸어간다. 행군하는 군사들이 길이가 16 ~ 20Km나 된다. 이들에게 지휘관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될까? 일사불란하게 통제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임금이 시행하는 상벌의 기준이 모호한 점이다.
중국 오자의 병법서 오기에도 국가와 군대를 다스리는 데 있어 상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지도자는 모름지기 상 받을 자에게는 상을 주어야 하고, 벌 받을 자에게는 벌을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기준을 명확하게 정하고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1587년에 있었던 녹둔도 전투를 예로 들어본다. 이 전투에서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은 도망하였고, 조산만호 이순신과 경흥부사 이경록은 반격하여 물리쳤다. 그런데 선조는 상 받아야 할 이순신과 이경록에게 삭탈관직의 처분을 내렸다. 또 다른 예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혁혁한 공을 세운 김덕령은 혹독한 심문을 가해 죽이는가 하면, 참전한 전투마다 도망치기에 바빴던 경상감사 김수는 진급을 거듭해 중추원 영사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그러니까 용인 전투에서 패배의 최종적인 원인은 왕인 선조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