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제2부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중에서 가장 치욕적인 전투를 꼽으라고 하면 나는 용인 전투를 꼽는다.
치욕의 용인 전투(龍仁戰鬪)는 1592년 6월 5일(7월 13일) 경기도 용인과 수원 사이에 있는 광교산 자락 근처(현 광교신도시 부근)에서 벌어졌던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왜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1,600여 명의 군사로 무려 50배가 넘는 8만여 명의 조선군을 와해시켰다. 정말 부끄러운 전투이다.
용인 전투의 지휘관은 누구인가?
조선군은 한양이 함락당하자 전라도 관찰사 이광은 전라도 병마절도사 최원(崔遠), 전라도 방어사 곽영(郭嶸), 전라도 도사 최철견(崔鐵堅), 중조방장 이유의(李由義), 좌조방장 김종례(金宗禮), 우조방장 이지시(李之詩), 전주 부윤 권수(權燧), 광주 목사 권율(權慄), 나주 목사 이경록(李慶祿), 나주 판관 이복남(李福男), 남원 부사 윤안성(尹安性), 남원 판관 노종령(盧從岭), 고부 군수 이광인(李光仁), 장성 현감 백수종(白守宗), 고산 현감 신경희(申景禧), 함열 현감 정연(鄭淵), 동복 현감 황진(黃進), 구례 현감 조사겸(趙思謙), 익산 군수 고성후(高成厚), 장흥 부사 장의현(張義賢) 등 전라도 각지의 군관을 이끌고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북상한다. 온양에서 충청도 관찰사 윤국형(尹國馨)과 충청도 병마절도사 신익(申翌), 충청도 방어사 이옥(李沃), 충청도 조방장 이세호(李世灝), 충청도 수군절도사 변양준(邊良俊)이 이끄는 충청도 군사들이 합류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도 경상도 방어사 조경(趙儆), 좌조방장 양사준(梁士俊), 종사관 이수광(李睟光) 등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이 중 누가 사령관인가?
용인 전투에 임한 병사들의 사기를 어떠했을까? 삼도 근왕군은 그 수가 5~8만에 이르렀으나, 사기는 매우 낮았다. 순창과 옥과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순창 군수 김예국(金禮國)이 도망쳤다. 담양 부사 이경린(李景麟)의 부대가 전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에게 공격받아 와해당했고, 남원 구례 순천의 군사 8천여 명도 와해되었다. 이광의 군관 옥경조(玉景祚)도 도망가는 병사들을 죽이며 탈출했다. 광주, 나주, 전주의 군사들이 용인에서 도망갈 때, 광주 목사 권율, 나주 목사 이경록, 전주 부윤 권수가 소리치며 말렸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삼도 근왕군의 군사들에게 군기란 없었다. 한 마디로 오합지졸(烏合之卒)이었다.
용인 전투의 작전은 어떠했는가?
조선군은 급조된 부대에다가 지휘관들 대부분은 지휘 역량이 떨어졌다. 작전 회의의 예를 들면, 사기를 축적하면서 조정의 명을 들어야 한다는 권율의 의견과 수원의 독성 산성에 진을 쳐야 한다는 다른 장수들의 의견이 충돌했다. 권율이 신중하게 전투를 치르자고 하는데도 이광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전투를 강행했다.
6월 4일 이광은 조방장 이지시와 전 첨사 백광언(白光彦)에게 군사 1천 명을 주어 북두문산에 진을 치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라 명했다. 백광언은 일본군 십여 명을 죽이고 북두문산의 일본군 진을 불태우는 전공을 세웠다.
6월 5일 전날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조선군은 다시 백광언을 내세워 문소산의 일본군을 공격했다. 하지만 문소산의 일본군은 조선군의 공격에 완강하게 저항했으며 결국 시간만 허비한다. 그 상황을 조경남의 《난중잡록 임진년 상》에서 기록하고 있다.
「백광언은 적이 눈앞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육박해 들어가 도전했는데, 묘시(새벽 5시경)부터 사시(오전 9시경)에 이르기까지 적병이 나오지 않았다. 오시(낮 11시경)에 이르러 아군의 기강이 해이해졌다. 이때 왜적이 풀 속에 엎드려 무릎으로 전진해 와 검을 휘두르며 일제히 일어나 아군 가운데로 쳐들어오니 왼쪽에서 목 베고 오른쪽에서 찍어대고 하여 아군의 전사자가 부지기수였다. 이지시, 백광언, 고부 군수 이광인, 함열 현감 정연 등이 모두 피살되어 대군의 기세가 꺾였다.」
6월 6일 아침, 밥을 지어 먹던 조선군은 와키자카 군의 기습을 받고 후퇴한다. 이 전투 결과를 조선왕조실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재하고 있다.
「이튿날 아침 군중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올라갈 때 적병이 산골짜기를 따라 돌입했다. 흰 말을 타고 쇠가면을 쓴 장수가 수십 명을 데리고 칼날을 번뜩이며 앞장서서 들어오니, 충청 병사 신익(申翌)이 앞에 있다가 그것을 바라보고 먼저 도망하자 10만의 군사가 차례로 흩어졌는데, 그 형세가 마치 산이 무너지고 하수가 터지는듯하였다. 이광·김수·국형은 30리 밖에 있었지만, 이들 역시 진을 정돈하지 못하고 단기(單騎)로 도망하였으나, 적병은 추격하지 않았다. 병기와 갑옷, 마초와 양식을 버린 것이 산더미와 같았는데 적이 모두 태워버리고 떠났다.」
- 선조 수정 실록 26권, 선조 25년 6월 1일 기축, 1번째 기사
용인 전투의 참패 원인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내 생각에 가장 중요한 원인은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상벌 기준이 모호한 점이다.
「지도자는 모름지기 상 받을 자에게는 상을 주어야 하고, 벌 받을 자에게는 벌을 주어야 한다. ‘국가와 군대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기준을 명확하게 정하고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
중국 오자의 병법서 오기에 있는 말이다. 상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선조는 상벌의 기준을 어떻게 적용했을까? 녹둔도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조산 만호 이순신과 경흥 부사 이경록에게 삭탈관직의 벌을 내렸다. 그런가 하면 전투마다 도망치기에 바빴던 경상 감사 김수는 진급을 거듭해 중추원 영사의 벼슬까지 올랐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용인 전투에서 패배의 원인은 선조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