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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고병균 Dec 01. 2023

[4-4] 이정암과 박진

수필 임진왜란

일본이 바다에서 연전연패하는 중에 명나라의 지원군까지 왔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의병들이 봉기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592년 10월 3일(8월 28일)부터 10월 6일(9월 2일)까지 나흘 동안, 연안에서 왜군 구로다 나가마사의 3군을 물리친 연안 전투(延安戰鬪)는 의로써 싸운 전투였다. 

이 전투의 영웅은 황해도 초토사 이정암이다. 그는 이조참의로 몽진을 떠나는 선조를 따라가려다 개성에서 낙오되었다. 그는 개성 유수 이정형과 함께 개성을 수비하다가 함락되자 백천으로 갔다. 거기서 김덕성과 박춘영의 추대로 의병장이 되어 의병을 모집했고, 조정으로부터 황해도 초토사의 직함을 받고는 전에 근무했던 연안으로 들어갔다. 

연안 부사 시절 선정을 베풀었던 그는 ‘드디어 내가 죽을 곳을 찾았다.’라고 말하며 연안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1591년에 연안 부사였던 신각은 선견지명이 있는 지도자였다. 성을 수리하고 군량미와 무기를 비축하는 등 전쟁 준비를 해 놓았다. 이는 연안을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임진왜란의 육상 전투에서 처음으로 승리한 해유령(蟹踰嶺) 전투의 지휘관이었다.

10월 3일(8월 28일), 왜군 3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의 선봉대 1천여 명이 연안에 접근해 왔다. 왜군의 기세를 보고는 ‘성을 버리자.’라고 제안하는 자도 있었으나 이정암은 거부했다. 그때 왜군에게서 사신이 왔다.

“작은 성으로 대군을 이길 수 없으니 항복하라.”

“너희는 병(兵)으로 싸우나 우리는 의(義)로써 싸운다.”

바람 앞의 등잔불 같은 나라, 조선을 구해낸 힘은 어떤 사람에게서 나올까? 그것은 의를 행하는 사람, 이정암에게서 나온다, 탄핵을 일삼는 사람들에게서는 결단코 나오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하늘의 법칙이다. 

그날, 적병 하나가 말을 타고 와서는 성 쪽을 향하여 엉덩이를 까고 볼기짝을 두드리며 도발했다. 이를 지켜보던 명사수 이출이 활을 발사하여 그의 엉덩이에 명중시켰다. 그날 오후에 왜군의 장수 하나가 백마를 타고 성 주위에 접근하자 수문장 장응기가 활을 쏘아 그의 가슴을 명중시키고는 목을 베었다. 밤이 되자 왜군이 사다리를 타고 접근했다. 조선 의병이 불화살로 쏘았는데, 그것이 화재를 일으켰다. 때마침 역풍이 불어 아군의 화재는 진압되고, 왜군 진영으로 번졌다. 의로 싸우는 사람은 하늘이 돕는다. 바람을 일으켜서 돕는다.

10월 4일(8월 29일)이다. 왜군이 조총을 쏘며 돌격해 왔다. 침착한 이정암은 성벽에 오르는 적군에게만 활을 조준하여 쏘게 하고, 끓는 물을 부으며 방어했다. 

10월 5일(9월 1일)이다. 왜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가 5,000 군사를 이끌고 공격했다. 의병들은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집어던지며 저항했다. 그러나 수세에 몰린다. 그때 이정암은 결단을 내렸다. 장작을 쌓아놓고 그 위에 앉아 아들 이준을 불렀다.

“성이 함락되면 여기에 불을 질러라. 왜군의 손에 모욕을 당하느니 여기서 불에 타 죽겠다.” 

전투에서 장군이 결단을 내리면 병사들은 사기가 높아지고, 용기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힘을 내어 전투에 임하게 한다. 그 결과 왜군은 퇴각했다. 의로 싸운 이정암의 결단에 눈물이 난다. 

이 전투의 승리로 황해도 최대의 곡창지대인 연백평야를 지켜냈다. 선조가 있던 의주와 충청도 전라도와의 교통로도 확보되었다. 

“28일, 적이 성을 포위했다가 2일 만에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이정암의 장계를 받은 조정의 대신들은 당황했다. 이순신의 보고서에는 ‘어떤 군졸이 어떤 부상을 입었다.’ 하는 등 세세한 내용까지 기록해서 그 양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이정암의 장계는 단 한 줄이다. 나중에 3배가 넘는 왜군과 맞서 이겼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이정암의 겸손함을 대대적으로 칭찬했다.      

제2, 3, 4차 경주 전투는 박진·박의장·이장손 등이 경주성을 탈환한 전투이다. 

1592년 9월 25일(음 8월 20일)에 벌어진 제2차 경주 전투의 주인공은 경상좌병사 박진(朴晉)이다. 권응수·박의장 등을 선봉으로 삼아 경주성을 공격했으나, 언양 방면에 있던 적으로부터 기습 공격을 받아 패주 했다. 

10월 12일(음 9월 8일)의 제3차 전투는 박진이 1,000여 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공격한 결과 마침내 경주성을 수복한 전투이다. 경상좌병사 박진(朴晉)의 집념이 이루어낸 전과이다. 

이 전투의 승리에 크게 이바지한 분이 또 있다.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만든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다. 성 밖에서 발사한 포탄이 성안에 떨어졌고, 그것이 폭발하면서 적군 수백 명이 죽거나 다쳤다. 그 무기의 사거리는 30m 이상 되었을 것이요, 날아가서 폭발하는 시한폭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추정된다. 

1593년 8월 6일에 있었던 4차 경주 전투는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던 적장 가토와 모리(毛利吉成) 군사의 공격을 조명 연합군이 막아낸 전투이다.     

의(義)로 싸워 연백평야를 지킨 황해도 초토사 이정암, 집념으로 싸워 경주성을 탈환한 경상좌병사 박진(朴晉) 등은 바람 앞의 등잔불 같은 나라 조선을 살려낸 영웅이다. 비격진천뢰를 발명한 화포장(火砲匠) 이장손과 함께 오래도록 기려야 할 충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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