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제4부
일본이 바다에서 연전연패하는 중에 명나라의 지원군까지 왔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의병들이 봉기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592년 8월 28일(10월 3일)부터 9월 2일(10월 6일)까지 나흘 동안, 연안에서 왜군 구로다 나가마사의 3군을 물리친 연안 전투(延安戰鬪)는 의(義)로써 싸운 전투였다.
이 전투의 영웅은 황해도 초토사 이정암이다. 그는 이조참의로 몽진을 떠나는 선조를 따라가려다 개성에서 낙오되었다. 그는 개성 유수 이정형과 함께 개성을 수비하다가 함락되자 백천으로 갔다. 거기서 김덕성과 박춘영의 추대로 의병장이 되어 의병을 모집했고, 조정으로부터 황해도 초토사의 직함을 받고는 전에 근무했던 연안으로 들어갔다.
연안 부사 시절 선정을 베풀었던 그는 ‘드디어 내가 죽을 곳을 찾았다.’라고 말하며 연안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1591년에 연안 부사였던 신각은 선견지명이 있는 지도자였다. 성을 수리하고 군량미와 무기를 비축하는 등 전쟁 준비를 해 놓았다. 이는 연안을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임진왜란의 육상 전투에서 처음으로 승리한 해유령(蟹踰嶺) 전투의 영웅이다.
8월 28일(10월 3일), 왜군 3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의 선봉대 1천여 명이 연안에 접근해 왔다. 왜군의 기세를 보고는 ‘성을 버리자.’라고 제안하는 자도 있었으나 이정암은 거부했다. 그때 왜군에게서 사신이 왔다.
“작은 성으로 대군을 이길 수 없으니 항복하라.”
“너희는 병(兵)으로 싸우나 우리는 의(義)로써 싸운다.”
바람 앞의 등잔불 같은 나라, 조선을 구해낸 힘은 어떤 사람에게서 나올까? 그것은 의를 행하는 사람, 이정암에게서 나온다, 탄핵을 일삼는 자들에게서는 결단코 나오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하늘의 법칙이다.
그날, 적병 하나가 말을 타고 와서는 성 쪽을 향하여 엉덩이를 까고 볼기짝을 두드리며 도발했다. 이를 지켜보던 명사수 이출이 활을 발사하여 그의 엉덩이에 명중시켰다. 그날 오후에 왜군의 장수 하나가 백마를 타고 성 주위에 접근하자 수문장 장응기가 활을 쏘아 그의 가슴을 명중시키고는 목을 베었다. 밤이 되자 왜군이 사다리를 타고 접근했다. 조선 의병이 불화살로 쏘았는데, 그것이 화재를 일으켰다. 때마침 역풍이 불어 아군의 화재는 진압되고, 왜군 진영으로 번졌다. 의(義)로써 싸우는 사람은 하늘이 돕는다. 바람을 일으켜서 돕는다.
8월 29일(10월 4일)이다. 왜군이 조총을 쏘며 돌격해 왔다. 침착한 이정암은 성벽에 오르는 적군에게만 활을 조준하여 쏘게 하고, 끓는 물을 부으며 방어했다.
9월 1일(10월 5일)이다. 왜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가 5,000 군사를 이끌고 공격했다. 의병들은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집어던지며 저항했다. 그러나 수세에 몰린다. 그때 이정암은 결단을 내렸다. 장작을 쌓아놓고 그 위에 앉아 아들 이준을 불렀다.
“성이 함락되면 여기에 불을 질러라. 왜군의 손에 모욕을 당하느니 여기서 불에 타 죽겠다.”
전투에서 장군이 결단을 내리면 병사들은 사기가 높아지고, 용기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힘을 내어 전투에 임하게 한다. 그 결과 왜군은 퇴각했다. 의(義)로써 싸운 이정암의 결단에 눈물이 난다.
이 전투의 승리로 황해도 최대의 곡창지대인 연백평야를 지켜냈다. 선조가 있던 의주와 충청도 전라도와의 교통로도 확보되었다.
“28일, 적이 성을 포위했다가 2일 만에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이정암의 장계를 받은 조정의 대신들은 당황했다. 이순신의 보고서에는 ‘어떤 군졸이 어떤 부상을 입었다.’ 하는 등 세세한 내용까지 기록해서 그 양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이정암의 장계는 단 한 줄이다. 나중에 3배가 넘는 왜군과 맞서 이겼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이정암의 겸손함을 대대적으로 칭찬했다.
경주성이 함락된 것은 4월 21일(5월 31일)이다. 이후 경주성을 탈환하기 위한 전투가 뚜 차례 벌어졌다
1592년 8월 20일(9월 25일)에 벌어진 전투는 제1차 경주성 탈환 전투이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박진의 지휘 아래 의병장 권응수, 정세아의 5천 의병과 관내 관병을 합쳐 1만여 군사가 경주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북문으로 나와 조선군 600명을 사살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박진은 안강의 본진으로 후퇴했다.
9월 8일(10월 12일)에 벌어진 전투는 제2차 경주성 탈환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경주성을 탈환하는데 공헌한 자는 경상좌병사 박진(朴晉)이다. 그는 전투에 패했어도 포기하지 않았다. 전열을 정비하여 달려들기를 거듭했다. 제2차 경주성 탈환 전투는 박진의 집념과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와 화차 등 전쟁 무기가 크게 공헌한 전투였다. 특히 이장손이 발명한 비격진천뢰의 위력이 얼마나 컸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 있어 소개한다.
“적진에서 괴물체가 날아와 땅에 떨어져 우리 군사들이 빙 둘러서 구경하고 있는데 이것이 폭발하자 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철편이 별가루 같이 흩어져 맞은 자는 즉사하고 맞지 않은 자는 폭풍에 날아갔다. 기이하고 놀라서 서생포로 돌아왔다.”
의(義)로 싸워 연백평야를 지킨 황해도 초토사 이정암, 집념으로 싸워 경주성을 탈환한 경상좌병사 박진(朴晉), 최신식 무기 비격진천뢰를 발명한 화포장(火砲匠) 이장손 등은 바람 앞의 등잔불 같은 나라 조선을 구해낸 영웅이다. 오래도록 기려야 할 충신이다.